(1)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잠이 보약이다

by Terry

6월 13일

시간에 쫓기며 자그레브행 버스를 타기 위해 도로 위를 달린다. 땀에 흠뻑 젖어 도착한 버스정류장에는 다행히 버스는 떠나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 버스 창문은 욕구를 쫓아 망설임 없이 몸을 던진 날벌레들의 흔적이 역력하다.


각국의 인종들이 모여 만들어진 정통 음식 뷔페에 신나 날아다니는 모기, 당장은 좋지만 곧 들이닥칠 한기가 예상되는 적정하지 않은 온도, 오밤중에 국경선에서 실시하는 여권 검사까지 삼박자가 딱 맞아떨어져 오늘 밤도 숙면은 글렀다. 괜히 과자를 먹어본다.


새벽 5시 20분. 동이 트기 시작하는 자그레브. 여권 검사를 기다리며 했던 스트레칭에도 불구하고, 야간 버스 탑승의 여파로 내 오른쪽 허벅다리는 비명을 지르고, 왼쪽 발바닥의 물집들은 잔뜩 물이 올라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정신력 하나로 트램을 타러 갔고, 매표 기계가 없어 다시 버스터미널에 돌아가 표를 사고, 다시 트램 정거장에 앉았다. 시내에서 아침을 먹으며 숙소에 체크인할 수 있는 시간까지 기다릴 요량이다.


6시가 조금 넘은 시각. 시내로 나왔으나 문 연 가게가 없다. 자연스럽게 만만한 맥도널드가 생각이 난다. 개점 시간인 7시까지 미래의 손님 신분으로 당당히 야외 좌석에 앉아 기다렸다. 정신은 점점 흐릿해져 숫자도 순서대로 세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드디어 7시. 우리가 가게 앞 의자에서 미처 엉덩이를 떼기도 전에 어디선가 나타난 손님들이 가게에 들어가는 족족 점원이 무어라 말을 하고, 다들 맥없이 돌아간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맥카페만 연다. 화낼 기운이 없다.


다른 지점을 찾아 나섰다. 어느새 트램 창문 밖 풍경은 익숙해졌다. 구글 지도를 맹신하지 않는 우리는 길을 가로질러가려고 시도한다. 마침 생수 배달원이 기찻길을 건너는 것을 따라 건넜고, 막다른 길을 만난다. 지도를 맹신하며 지하 건물로 들어갔다. 수많은 계단에 승원은 선뜻 내려올 생각이 없고, 이 길의 끝에 맥도널드가 없다면 무슨 행동을 취할지 알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다행히 반가운 m이 보인다.


혼미한 정신 상태이지만 식욕은 살아있다. 샐러드부터 아이스크림까지 풀코스로, 그리고 추가 주문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단숨에 VIP 반열에 올랐는지, 잠시 먹는 것을 쉬고 있으니 직원이 테이블로 와 필요한 게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불러달라며 대접해준다.


9시. 양해를 구하고 일찍 찾아간 숙소. 인지기능을 상실한 내 귀에서는 생전 듣지 않는 피아노 클래식이 흘러나오며, 눈과 입은 그저 문만 보면 “여긴가?”를 자동반사로 외친다. 지도를 보는 승원이 몸속에 맑은 사리 하나가 만들어진다.


도착한 숙소. 오전 7시의 회의가 다소 편안한 분위기였는지 (1) 아디다스 레깅스를 입고 계신 인상적인 주인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도 보이지 않고, 정오에 보일러를 고치러 오겠다는 말도 들리지 않는다. 빨리 드러눕고 싶은 마음뿐이다. 주인의 퇴장과 함께 즉각 실행에 옮긴다.


(2)“(눈을 번쩍 뜨며) 보일러”라고 외마디를 외치며 깨어난 승원은 침실의 문을 닫고, 다시 잠든다.

- “두시에 씻고 나가자.”

- “그래.”

- “n시에 씻고 나가자.”

- “그래.”


승원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이 뫼비우스의 띠를 끊어냈다. 샤워를 마치고, 나갈 준비를 하니 몸도 마음도 조금 진정이 된다.


집 밖을 나선 시각은 다섯 시. 말이 다섯 시지 땡볕이다. 아무 계획도 없으므로 구글맵을 열고, 어트랙션의 방향을 확인하고 출발한다. 이태원을 연상시키는 오르막길, 떠나고 싶지 않은 냉장고 터널을 지나고, 맥주집이 즐비한 거리에 도달했다. 관광을 잠시 미루고 한 맥주집에 들어갔다.


주문하는 승원을 바라보는 서버의 눈빛은 생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나에게는 눈빛조차 주지 않고, 주문을 받는 동안 그는 간간히 미소를 짓기도 하고, 승원의 발음을 고쳐주기도 하며, 오롯이 승원의 움직이는 입, 승원의 목소리에 집중한다. 너무 소중해 어쩔 줄 모르는 그의 눈빛을 보고있으니, ‘울애긔 인형인 줄 알았는데 말도 하네’라는 말이 나에게도 들리는듯하다. 하지만 계산서를 갖다 달라는 말에 차갑게 돌변하는 그의 모습에서 자본주의의 차가움을 느끼며 쫓기듯 가게를 떠나야 했다. 혼란스러운 경험 때문인지 가게를 나와서도 저주에 걸린 듯 그 가게가 있던 거리를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고 가게를 서너 번 더 지나친다.


남들 다 간다는 주요 명소들을 간 후, 이별 박물관으로 향했다. 세계 각국에서 보내온 전시품은 잡동사니와의 경계가 흐릿하지만 흥미롭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머리카락으로 만든 인형부터 웨딩드레스까지 다양한 전시품, 기구한 사연에 더불어 훌륭한 냉방시설을 갖춘 곳이다. 더위와도 잠시 이별할 수 있다.


인파를 뚫고 힘겹게 찾아간 마트는 마감시간이 임박해 자동문이 밖에서는 열리지 않는다. 안에서 나오는 손님이 연 문에 오른발을 들이밀어 안으로 들어간다. 더럽게 무거운 물, 과자, 맥주를 샀다.


숙소로 돌아왔는데 어딘가 달라진 싸한 느낌이 든다. (3) 주인이 왔다 갔다.


낮에 '한국'마트에서 산 라면을 끓여먹으려 냄비에 물을 올렸다. 뽀얀 석회가 나온다. 아무리 냄비를 씻어도 사라지지 않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석회와 씨름하며 저녁(23시)을 먹었다.


먹고 바로 누워 소가 되기만을 얌전히 기다리는데 들리는 열쇠 소리. (4)또 주인이 왔다. 왜? 이럴 거면 왜? 아니, 도대체 왜? 라는 생각만이 내 머릿속을 지배한다.


6월 15일

다음날 아침. 바쁘게 짐을 싸는데 울리는 초인종 소리. (5) 주인 딸이 우리의 안위를 살피러 왔단다. 빅브라더급 감시에 쫓기듯 숙소를 나선다.


빵집에서 빵도 사고, 스무디도 한잔씩 마셨다. 하지만 관광할 기분이 들지 않아 그냥 다음 여행지로 이동하기로 결정한다.


매표소 창구에는 보라색 옷을 입은 창백한 청년이 앉아있다. 청년과 긴 질의응답 시간을 갖고, 마침내 표를 산 한 모자는 발권된 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환불을 요구한다. 청년은 더 창백해졌고, 바로 뒤에서 이를 지켜보던 우리는 그 청년의 창백한 안색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긴 대기시간이지만 빵들과 커피로 이겨내고 버스 탑승. 친절한 직원, 그리고 플릭스 버스 생일이라며 받은 과자에 얼마 전 플릭스 버스에 데인 상처가 조금은 아물어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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