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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혜진 Feb 10. 2023

나의 짝사랑, 여름


 


 저의 사랑은 보유하는 것입니다. 봄꽃이 싹을 틔우고 타인의 마음을 괜히 몽글하게 만들 때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습니다. 낙화로 어지러운 아스팔트 위를 걸어도 좀처럼 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저마다 삶을 부딪치며 사랑을 속삭여도 요지부동입니다. 그야 그럴 것이 저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뜨겁게 달아오를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지랑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옷차림이 단출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푸르름에 적셔질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밤바람이 춥지 않을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슬프지 않은 그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여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기다림의 보상은 여름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봄꽃이 여물자 열기가 제 존재감을 과시했습니다. 타인들은 물놀이며, 에어컨이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제가 여름이란 계절을 사랑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사랑이 어쩌다 마주친 눈길에서 시작되듯이. 어쩌다 베풀어진 다정함에서 시작되듯이. 사실은 아쉬울 만큼 허무한 감정이었듯이. 자연스럽게 여름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뜨거운 뙤약볕에 도로가 그을리고 뿌연 아지랑이가 제 시야를 어지럽힙니다. 온 세상을 어지럽힙니다. 아지랑이는 현실을 일그러트렸습니다. 본 모습을 숨기게 만들고 왜곡되게 했습니다. 결국 당신을 사랑스럽게 보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더위로 인해 취객처럼 비틀거렸습니다. 저도 그들을 따라서 비틀거렸습니다. 저마다의 여름은 다 다르겠지만, 여름에 취한 사람은 대부분 저렇게 행동했습니다. 저는 뜨거울 때 어떻게 비틀거리는지 모릅니다. 여름을 어떻게 간직하는지, 어떻게 표현하는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이 비틀거리는 것을 보고 어설프게 흉내를 낼 뿐이었습니다.      


여름은 참 이상합니다. 그 존재만으로 큰 비밀을 품은 듯합니다. 흔들리는 풍경을 두 눈동자에 담을 때면 영화를 시청하는 관객이 된 것 같습니다. 아니다,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습니다. 늘 지나던 익숙한 거리도 지나간 추억 속의 아련했던 한 장면처럼 느껴집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저도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랑이란 그런 거니까요. 저를 이상하게 만듭니다. 비틀거리게 만들고, 포근한 그늘을 찾게 만듭니다. 저는 티 없이 맑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한참을 걸었습니다. 뭉게구름 사이로 비행기 한 대가 지나갔습니다. 엔진이 구우우우-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많은 사람은 여름을 맞이했다는 이유로 하늘을 가로질렀습니다. 제 날개가 녹아내릴까 두렵지도 않은가 봅니다. 추락이 두렵지도 않나 봅니다. 겁도 없이 더 높이, 더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기체는 다양한 감정을 태운 채겠지요. 타국의 연인을 그리는 기쁨, 시작하는 청춘의 설렘,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 파일럿의 각오. 비행기는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있는 힘껏 하늘을 나는 것이겠지요. 저는 문득 밀려드는 감정이 부러워 손으로 눈가를 가렸습니다. 제 눈 아래로 손 그늘이 내려앉았습니다.

  

아차, 잊지 맙시다. 원래 목적을 잃지 말자고요. 저는 그냥 점심으로 먹을 국수를 사러 나왔을 뿐입니다. 그래도 조금 봐주세요. 저는 사랑 한 가운데 서 있잖아요. 여름 한 가운데 서 있잖아요.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의미를 두게 되고, 한눈을 팔 수밖에 없습니다. 쉽게 몰입해버릴 뿐만 아니라 별 볼 일 없는 비행 물체까지 손으로 가늠해 보게 됩니다. 그렇게 돼버립니다.     


뜨거운 열기가 제 살갗을 숨막히게 옥죄었습니다. 그것들을 헤치고 시원한 가게에 도착했습니다. 인위적인 에어컨 바람으로 차가운 공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여름보다 에어컨을 더 사랑했습니다.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에어컨도 여름이 품은 사랑스러움 중의 하나인걸요. 그러니 에어컨이 아니라 여름을 사랑하는 게 마땅하지 않나요. 그 일렁이는 순간을 사랑하는 게 맞지 않나요. 여름은 자신이 미움받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름은 쉽게 우울해했습니다. 홀로 고개를 모로 돌리고 눈물을 훔쳤습니다.     


국수를 계산하고 밖으로 나오니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습니다. 또 여름이 남몰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바보가 따로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나 당신을 사랑하는데. 왜 몰라주는 건가요. 왜 타인의 시선에만 얽혀 있는 건가요. 자신을 조금 더 사랑해 주었으면 하는데. 당신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데. 도대체 왜. 울지 말아요. 우울함으로 하늘을 검게 물들이지 말아요.      


우산이랄게 딱히 없는 저는 쏟아지는 비를 한껏 맞았습니다. 빗물은 세상을 깨끗하게 씻어내렸습니다. 축축하게 젖은 흙냄새, 저 멀리서 들려오는 빗방울의 부산스러운 소리, 나무가 제 팔을 멋대로 흔드는 소리. 순식간에 열기와 아지랑이는 가라앉았습니다. 일렁이는 것이 사라지니 이제야 현실이 똑바로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의 우울함을 피하고자 우산을 쓴 채로 걸었습니다. 비에 젖어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비가 와서 기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시원해져서 좋다고 했습니다. 당신의 가장 큰 장점인 더위를 미워하는 말입니다.     


저는 슬펐습니다. 비가 와서 슬픈 것이 아니라, 당신의 우울함으로 인해 이득을 보는 사람들 때문에 슬펐습니다.      


저는 당신의 우울함조차 사랑합니다. 비가 와도 피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산을 접고 다 젖어버리고 싶습니다. 괜히 눈을 감고, 두 팔을 하늘을 향해 벌리고 싶어집니다. 그렇게 가슴 속에 소낙비를 품고 싶어집니다.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면서도, 온종일 당신의 우울함이 내리길 바랍니다. 이런 이기적인 저를 용서해주세요. 저도 성숙을 바라는 미성숙한 인간인 뿐인가 봐요. 저의 행복보다 당신의 행복을 먼저 바라지 못하나 봐요.      


이런 제 사랑이 부담스러웠던 걸까요. 비는 그쳤습니다. 사실 도망쳐 버렸다고 하는 게 더 어울립니다. 당신은 어딘가로 숨어버렸습니다.     


저는 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샤워를 간단하게 끝내고 국수를 끓였습니다. 선풍기를 튼 채로 얼음 띄운 국수를 먹었습니다. . 사랑스럽습니다. 사랑스러운 추억이 될 한순간입니다. 하지만 저는 투덜거렸습니다. 비는 왜 그쳤는지. 국수를 먹으며 내리는 비를 보면 더 운치가 있을 텐데. 저를 위해서 더 우울해 줄 수는 없는 건가요. 입을 비죽 내밀고 이기적으로 굴었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동산 위 천문대에 가서 여름 별을 보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거실에 누웠습니다.   

  

그런데 별안간 또다시 비가 세차게 쏟아지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또 당신을 슬프게 한 건가요. 또 당신을 스스로 학대하는 건가요. 저는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걱정과 반가움으로 베란다 창가에 바짝 다가섰습니다. 그때 티브이 뉴스에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건조하게 들려왔습니다.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려 희소식이라는 목소리였습니다.     


아아.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습니다. 저는 당신을 오해하고 있었네요. 제 편견 속에 당신을 가두고 있었네요. 그저 우울하기 때문에 비를 흘리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가뭄으로 힘들어할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우울함을 감수한 것이었네요.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당신은 제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은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보다 더 큰 존재였습니다. 저는 그저 당신의 품에서 열대야로 비틀거릴 존재였을 뿐입니다. 그런 많고 많은 사람 중 하나인 것입니다.     


저는 안심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당신을 사랑해서 다행입니다. 여름은 빛나고, 푸른 청춘을 품고 있으며, 저 나름의 시원함을 가졌습니다. 어느덧 저는 달빛을 맞이합니다. 여름은 참 신기합니다. 뜨거운 여름이 있는가 하면 선선한 여름도 있습니다. 선선한 여름이 뭔가 하겠지만, 여름밤이라고 하면 단번에 이해가 될 것입니다. 저는 한풀 꺾인 열기 속을 걸었습니다. 귀뚜라미 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했고, 때때로 반딧불이가 제 길을 밝혔습니다. 어디선가 부는 바람결에 모기향의 불내가 섞여 있기도 했습니다.     


반딧불이의 숲으로라는 만화 영화를 아시나요. 여름에 만난 인간과 요괴가 서로 사랑하게 된다는 이야기인데. 요괴는 인간과 신체가 닿으면 소멸해버린대요. 사랑하는데 사랑할 수 없는 거에요. 서로를 지키기 위해서. 당신과 나 같지 않나요? 잠깐, 당신 제 말을 듣고 있는 건가요.     


저는 기분이 들떠서 조잘거렸습니다. 별이 보이는 동산 위에 도착했습니다. 동산 위는 어둡고 쌀쌀했습니다. 별빛과 달빛에 의지하는 연약한 것들이 축제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저는 가만히 자리를 깔고 앉았습니다. 여름에만 볼 수 있는 별자리를 눈으로 좇았습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니, 저 멀리서 낯선 유성하나가 빠르게 떨어졌습니다. 그것의 빛나는 꼬리를 만끽하기도 전에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저는 핸드폰으로 유성을 검색했습니다. 대형 포털사이트의 검색어 순위는 온통 유성 이야기로 도배되었습니다. 10년에 한 번씩 떨어지는 유성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때마침 제가 본 것입니다.     

 

핸드폰을 끄니 검은 화면과 마주했습니다. 그 표면에 비친 저는 입꼬리를 아래로 떨어트리고 있었습니다. 여름의 끝은, 사랑의 끝은, 언제나 이런 감정과 닮아 있습니다. 운 좋게 마주친 유성이, 사실은 10년에 한 번 떨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의 감정과 닮았습니다. 왜 더 주의 깊게 살피지 못했는지. 왜 사진으로라도 남겨서 추억하지 못했는지. 왜 그 순간을 아끼지 못했는지. 왜 소중한 인연이라는 것을 지나친 후에 깨닫게 되는지. 온통 그런 것들과 닮았습니다.     


한기가 몰려왔습니다. 어느새 벌써 여름은 다 지나 끝물입니다. 당신의 끝을 만난다는 것은 덮을 것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제 마음을 데울 것을 굳이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당신도 저의 아쉬움을 알고 있을까요. 사람들은 사랑하다가도 때가 되면 자신의 인생길을 따라 흩어집니다. 사랑했던 한때를 가슴에 품고 다른 곳에 뿌리를 내립니다. 아쉽지만 그것이 자연스럽고 성숙한 것입니다.  

    

그 때문에 저도 한껏 성숙한체하며 당신을 지나칩니다. 당신도 저를 잠잠히 지나쳐갑니다.     


저의 미성숙을 견뎌준 그대. 내년에도, 후년에도. 추운 나를 무더위로 잔뜩 덥혀주세요. 당신의 우울함으로 적셔주세요. 아지랑이로 일렁여 주세요. 그때까지 저를 찾아올 가을과 겨울의 슬픔을 잘 견디고 있을게요. 그러니 당신도 잠깐 새우잠만 들었다가 때가 되면 꼭 저를 만나러 와야 해요. 다음번에 만날 때면 저도 성숙해져 있겠지요. 당신을 멋대로 오해하지 않겠지요. 당신에게 제 사랑을 강요하지 않겠지요.   

   

나의 짝사랑. 나의 보유하는 사랑. 나의 여름. 우리, 때가 되면 다음에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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