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은 구름 위에서 잠깐 잠들었을 뿐이었다. 그는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른 채 가만히 세상을 떠다녔다.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을 떠보니 공중 한가운데, 그러니까 세상 어딘가에 있었다. 지금은 지중해의 파도 즈음일까. 늦은 저녁을 드시는 아버지의 그늘 위일까. 근심 없이 미소 짓는 한 중학교의 운동장일까. 밤기운에 젖은 어둠 위일까. 고민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어느덧 그의 몸은 검게 물들었다. 처음에 세상에 발을 내디뎠을 때는 눈부시게 하얀 뭉게구름이었던 것 같은데. 여기저기를 굴러다니며 온갖 수분을 머금은 탓이다.
예전에 누가 빗방울에게 물은 적이 있다. 너는 구름이니 빗방울이니.
빗방울은 한참을 고민했다. 나는 구름에 속해있으니까 구름이 아닐까?
그러니 상대가 또 물었다. 네 몸은 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따지고 보면 물 아냐?
빗방울은 답하지 않았다. 사실 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이 누군지 모르니 어떤 일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냥 본능처럼 사는 거다. 당연하다는 듯이 이것저것 주워 먹는다. 바닷물, 끓인 물, 누군가의 눈물. 그냥 그렇게 세상의 시끄러운 것들을 먹고 사는 거다. 그러다 해가 저물 때야 지친 척 몸을 누인다. 그게 전부라고 생각한다. 내일도 모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요즘 들어 몸이 무겁다는 사실이다.
몸이 무겁다. 몸이 까맣다. 나는 더러워진 걸까. 나는 버림받을 걸까. 그런데 누구한테 버림받은 거지? 무엇으로부터 더러워진 거지? 빗방울은 밀려오는 고민에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깊은 수마가 그를 덮쳤다.
아마도 나는 곧 떨어지겠지. 이 구름 속에서는 살 수 없는 거야.
그의 말처럼 아래로 스르륵 미끄러졌다. 먹구름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그의 몸은 바깥으로 밀려 나갔다. 큰 먹구름 무리가 산봉우리에 턱하고 걸렸다. 빗방울은 무거워진 제 몸을 온통 떨어트린다. 땅을 향해서 몸을 내던진다. 낙하한다. 떨어진다. 부서진다.
비가 온다.
비갠 뒤 무지개
네가 온다.
너는 며칠 뒤에 한국으로 들어온다고 했다. 전화 수화음으로 들은 네 목소리가 벌써 그립다. 혜성아, 내 말 듣고 있어? 한 3시쯤에 도착할 것 같아. 그 이후로도 통화는 계속됐다. 간만에 들은 네 소식은 울상이었다.
들어 봐. 나 이곳에 와서 잔뜩 깨졌어. 내 영혼 부서진 것 같다고. 떨어진 것 같아. 괜히 음악 하겠다고 나댔어. 그냥 한국에 있을걸. 여기에 내가 왜 있는지 모르겠다니까? 최근에 교수님이 과제를 하나 내주셨는데, 내가 누구인지 써오라는 거야. 답안지에 뭐라고 썼긴. 그냥 백지로 냈어. 그 밖에도 많은 일이 있었어. 그래, 그 미친년들 때문에 하···.
응. 응. 그래. 내 일은 그저 네 담소에 맞장구를 쳐주는 것뿐이지만.
나갈 채비를 했다. 대충 구운 토스트에 잼을 발라 먹고 눅눅한 옷을 걸쳤다. 우산은 노란색. 신발은 조금 더러워진 남색 스니커즈. 마음에는 너를 온통 그리는 그리움. 짧게 자른 머리카락은 보기 좋게 빗어 넘겼다.
눈 앞에 펼쳐진 도시를 바라보았다. 시야로 쨍한 회색빛이 가득 쏟아졌다. 콧속으로 축축한 비 냄새가 차올랐다. 하늘은 거뭇거뭇한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며칠째 먹구름이 하늘을 물들인 채였다. 나는 멀지 않은 공항으로 걸어갔다.
저기 멀리서 네가 보였다.
바닥으로 툭. 하고 빗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아스팔트의 한 귀퉁이가 짖은 회색으로 물들었다. 한 방울을 기점으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너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아마 나에게 건네는 첫인사는
“잘 지냈어?”
하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갸우뚱. 그에 나는 또 뭐, 그렇지. 무뚝뚝하게 굴었다. 우리 처음 만날 때와 달라진 게 없다. 나는 너에게 우산을 건넸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렘이라기에는 잔잔하고, 설렘이 아니라기에는 눈가가 시큰거린다. 기쁨이고, 그리움이고 많은 감정이 가슴께에 모여 벅차올랐다. 그래서 나는 그냥 이렇게 말했다.
“밥이나 먹자.”
메뉴는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나마 기억에 남는 것은 감각뿐이다. 귓가로 들려오는 식기 부딪히는 소리. 데워진 공기. 습기로 찐득한 메뉴판. 미끄러운 바닥. 네 눈동자 색깔. 네 찌푸린 미간. 서투른 젓가락질. 그리고 우리가 나눴던 대화.
“혜성아, 나는 버림받은 걸까. 아니면 더러워진 걸까?”
무엇으로부터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네 표정이 다분히도 공허해 보여서. 약간의 정적이 우리 사이를 채웠다.
“···새로운 출발일 수도 있잖아?”
그 암묵을 깬 건 나였다.
“새로운 출발?”
“그래. 왜 떨어졌다고만 생각해? 네가 네 세상을 깨고 나온 거지. 넌 명문대 대학생도 아니고, 누군가의 여자친구도 아니고, 일 잘하는 아르바이트생도 아니야. 이제 너는 온전히 너잖아. 좋은 거 아냐?”
너는 말 없이 그릇에 고개를 박았다. 숟가락으로 음식을 게걸스럽게 퍼먹었다. 또 못 들은 척하는 것이다. 외로울 때마다 나오는 너의 습관이었다. 나는 섣불리 너의 외로움을 채워주는 위로를 건네지 않았다. 이건 너 스스로 해결해야하는 감정이니까. 간단히 음식을 먹고 나왔다.
날카롭게 찌르는 비는 그치고 하늘에 큰 무지개가 떠 있었다. 그 찬란한 광경을 보고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봐, 네가 오니까 저렇게 아름다워졌어. 내 하늘이. 세상이. 나는 널 이렇게나 기다렸어.
먹구름 말고.
빗방울 같은. 그래, 빗방울 같은 너를.
안녕하세요. 독자여러분. 정말 오랜만입니다. 주 1회는 꾸준히 글을 써보자고 정했는데 참 면목이 없습니다. 변명하자면 할 일이 이리저리 많았다고 하겠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