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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 다지 Oct 25. 2023

혼인신고에 2시간이 걸린 이유

아직 있지도 않은 아이의 성을 정해야 하는 국제부부.

결혼식이라는 어마무시한 1년짜리 대형 프로젝트를 끝낸 지금은 그 어떤 것도 무서울 것이 없지만, 올해 초까지만 해도 인생에 가장 어려웠던 혹은 짜증 났던 경험이 있다면 바로 결혼! 아니 혼인신고라고 대답할 정도로 우리가 하나의 가족이 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이 시리즈의 2번째 편에서 잠깐 다뤘지만, 국내에서 다른 국적을 가진 두 사람이 혼인신고를 하기 위해서는 그 다른 국적을 가진 나라의 혼인신고가 먼저 필요했다. 그래서 약 4개월에 걸쳐 스페인 대사관에서 혼인적격진술서 (자국에서 결혼을 하거나 파트너로 신청한 사람이 없는 완전한 single이며, 범죄 기록이 없는 사람임을 증명하는 종이 한 장)를 받았고, 추후 EU 내에서 자유롭게 이동하고 거주할 수 있는 나의 영주권이자 우리의 혼인을 증명하는 가족 수첩도 가지고 올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정말 스페인 대사관의 느긋함에 화가 많이 났는데, 일단 무슨 운영을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만 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고, 인터뷰는 무조건 영어와 스페인어 중에서 선택해야 했다. 한국어만 가능하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그리고 인터뷰 시간을 아주 제멋대로 바꿔서 이 사람들이 직장인일 가능성을 아예 배제하고 있나 궁금하기도 했다. 4개월에 걸쳐 5번의 방문 끝에 원하는 서류를 받아낼 수 있었는데 2년 내에 스페인으로 이동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지금 이 게으른 행정은 정말 걱정이 되는 부분이다. 


이 모든 절차가 끝난 후, 우리의 수많은 연차와 이태원의 언덕을 오르내리며 흘린 땀방울이 모여 얻게 된 이 소중한 서류를 가지고 당시 우리가 거주하던 동네의 구청으로 향했다. 국제 커플들이 종로 구청으로 많이 간다고 들었지만, 스페인 대사관에서 사는 곳으로 가는 것을 추천해 주기도 했고, 웨이팅이 있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2분이면 끝날 줄 알았던 우리의 혼인신고는 2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 이유는 크게 2가지. 


첫 번째는 그날 일을 하고 있던 약 6명의 분들이 이 혼인신고를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할지 몰랐다는 것이었다. 출생, 혼인, 사망 신고' 담당자분들 포함해서 말이다. '아, 이래서 많이 처리를 해본 종로구청에 가라는 것이구나. 한 번에 깨달았다. 시간 아끼려고 이곳에 왔는데 이렇게 오래기다려야 하다니.'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는 순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 누구도 나서서 우리에게 '기다려라, 우리가 이런 게 헷갈려서 더 확실하게 찾아보려고 한다.'라는 설명도 없이 다들 일사불란하게 국제 커플에 관한 아주 두꺼운 책을 사무실 저 뒤편 서고에서 10권씩 들고 와서 관련된 내용을 엄청 뒤지기 시작했는데, 정말 슬프고도 웃긴 광경이었다. 그렇게 40분쯤 지났을까 방법을 찾은 듯 책의 어느 한 면을 쫙 피더니 우리의 정보를 쭈욱 입력하기 시작하셨고, 그렇게 끝나나 했는데...


더 어이없었던 두 번째 문제가 터졌다. 바로 태어나지도 않을, 어쩌면 태어나지 않을 우리의 아이 성은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 때문이었다. 우선, 둘 다 5년 안에는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를 한 상황. 성에 관해서는 나는 내 성이 들어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었고, 부모 성이 다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인 스페인에서 나고 자란 남자친구 역시 그게 좋기는 한데 사실 아이를 낳게 되면 10개월 동안 아이를 지켜온 엄마의 성을 따르고 싶었다고 해서 우리는 이 질문에 엄마를 선택해야지 했었다. 아, 근데 질문이  Q. 아이의 성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A. 아빠의 성을 따른다. B. 엄마의 성을 따른다. 이게 아니었다. 


한 번에 이해하기도 어려운 이 질문은 바로, ‘자녀의 성·본을 모의 성·본으로 하는 협의를 했는가?’였는데 이때 단번에 '예'라고 표시를 해서 내자 구청 직원분이 가장 먼저 한 말은 이거였다. 


"제대로 읽어보신 거 맞나요? 꼭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하며 우선 사회적 관습에 따라 아빠 성을 따르겠다고 체크를 하고, 나중에 아이가 생겼을 때 마음이 바뀌면 그때 가서 다시 엄마 성에 따라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아는바로는 (아주 어이없게도) 협의서를 작성해야 하는 거로 안다고 말했더니 엄청 버벅거리면서 자신도 어떻게 하는지 좀 찾아봐야 하는데 오래 걸릴 것 같으니 이대로 우선 진행해서 혼인 신고를 마무리하자고 우리를 설득하였다.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퇴근 시간이 소중한지 알기에 우선 알겠다고 했는데, 결국은 남자친구의 이름이 전산에 입력이 안될 정도로 상당히 길어서 내 성을 따르기로 했다 (하하). 2005년에 호주제가 폐지되고 엄마성을 따르는 것이 가능해졌다고 들었는데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도록 왜 혼인신고의 양식은 바뀌지를 않는지, 그보다 아이를 낳을지 말지도 고민하는 수많은 20 - 30대 부부에게 혼인신고에서부터 이런 압박을 주는지 알 수 없었다. 


중국, 베트남, 필리핀에 관련된 서류만 가득한 구청에서 처리할 줄 모르는 국제커플이라서, 어렸을 때 양성 평등 교육을 받고 종종 포스터도 그린 세대로서 당연히 엄마 성을 넣고 싶은 90년대 후반생이라서 우리는 그렇게 혼인신고에 2분이 아니라 2시간이 걸렸다.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있고, 사람들의 인식은 그보다는 조금 느리지만 그래도 그 변화를 잘 따라가고 있는 듯 보인다. 과연, 우리나라는 이 변화에 잘 대응하고 있는 것일까? 5년 후의 혼인신고서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청약 기준에 맞춰 Q. 향후 7년간 자녀를 낳을 계획이 있으신가요? 이렇게 바뀌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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