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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 다지 Oct 30. 2023

1000만 원으로 결혼하기.

대충 때우려던 결혼식에 진심이 되어버렸다.

장장 6개월이 걸린 혼인신고와 비자를 마무리하고 이제야 발 뻗고 잠을 잘 수 있겠다 생각했을 무렵, 엄마에게서 결혼식 압박이 들어왔다. 법적으로는 부부가 되었지만, 결혼식을 할 마음이 전혀 없었던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주변에서 결혼을 하는 친구도 거의 없었을뿐더러, 8개월의 인턴 - 6개월 그로스 해커 정규직을 거쳐 이제야 브랜드 마케터로 이직을 확정 지었을 때였다. 시간도 없었고 2,3천은 그냥 깨진다는 결혼식을 위해 모아둔 자금 역시 없었다. 하지만, 엄마는 내가 혼인신고를 하든 안 하든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공식적으로 일가친척들 앞에서 부부가 됨을 알리는 결혼식이 진짜 결혼을 의미하는 것이라 말하며, 대학 다닐 때도 6개월에 3-4번 전화를 했던 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주 아주 자주 전화를 걸어오셨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예식장 예약을 시작으로 1년에 걸쳐 결혼식을 준비하게 되었는데, 엄마의 주장을 이해하고 동의해서가 아니라 본가에 내려갈 때마다 친척들에게 남자친구라 소개하며 동거를 하는 것은 꼭꼭 숨겨야 한다고 하는 엄마의 행동 때문이었다. 이제는 남편이 된 남자친구 앞에서 더 이상 거짓말이 계속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최소한의 돈으로 아주 대충, 결혼식을 때워보기로 했다. 



하지만 엄마는 어마무시한 완벽주의자의 내 성향을 알고 이런 프로젝트를 맡겼던 것일까. 결혼식 준비를 하면서 그 어떤 것도 나는 대충 할 수가 없었고, 원래 생각했던 1000만 원이라는 예산을 수정하지 않고서 가장 최대한의 결과물을 뽑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내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인플루언서나 파워 블로거가 아니기 때문에 협찬 같은 것은 배제하고 말이다. 그 방법은 아래와 같다. 



1. 예식을 비수기에 잡는다: 예비부부들이 가장 선호하는 계절인 봄, 가을은 대관료 + 식비가 당연하게 비싸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토요일 오전 11시 - 오후 1시 사이의 예식은 더 비싸고. 우리에겐 계절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기에 8월 중순에 예약을 했고, 성수기의 30% 도 안 되는 가격으로 대관을 할 수 있었다. 소중한 발걸음을 해 주는 분들께 더위로 불편하게 해 드려 그 점은 조금 맘에 걸리지만 식은 내부니까. 다만, 광복절 같은 공휴일은 피해서 잡는 걸 추천한다. 


2. 결혼반지에 대한 욕심을 버린다: 나의 경우에는 친한 친구의 언니가 웨딩 플래너라 몇 번 추천을 받았었는데 가성비 업체라고 추천을 해 준 것도 둘이 합쳐 4백만 원이 기본이었다. 맥북 2개는 살 수 있는 가격을 이 작은 반지에 투자하고 싶지 않고 싶어 열심히 검색을 한 결과 회사 근처에 있는 디자인은 고급지고 가격은 착한 브랜드를 찾았고 총 150원에 맞췄다. 물론, 자녀에게 반지를 물려주고 싶거나, 반지에 대한 로망이 있다면 원하는 것으로 하는 것이 맞지만 나는 애초에 반지가 아닌 타투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부분에 있어 돈을 줄이기로 했다. 



3. 스, 드, 메는 한 번에 계약하자: 웨딩 박람회를 통해 가성비 업체이지만 그중에서도 좋은 퀄리티를 자랑하는 곳들을 골라 170만 원에 계약을 했다. 특히 스튜디오는 그 안에서 메이크업부터 드레스, 턱시도까지 대여할 수 있는 토탈 스튜디오를 선택했는데 따로 계약을 했을 때는 스튜디오만 140만 원이라고 해서 놀랐다. 박람회에 가기 전 원하는 메이크업 / 드레스 스타일과 결혼사진 분위기도 미리 찾아서 보여주는 것을 추천! 그러면 돈도 아끼고 실망할 확률도 확연히 줄어든다. 



4. 신부 관리 패키지에 쓸 돈을 줄인다: '신부 관리'라고 유명 결혼 카페에 검색만 해도 보톡스, 필터, 경락 마사지 등 어마무시한 패키지 정보가 쏟아진다. 그걸 한참 동안 보고 있다 보면 내 몸은 괜찮은지 의심을 하게 되고, 인생에 딱 1번뿐인 결혼식에 아낌없이 투자를 하고 싶어 진다. 물론 나도 결혼식에서 정말 아름다운 신부로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열심히 번 돈을 그 하루를 위해 쓰는 것이 맞는지,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 돈을 쓰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이게 더 컸다) 물었을 때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신부 관리 패키지를 포기하고 필라테스 그룹 수강권을 끊었다. 얼리버드 특가 총 54회. 67만 원이었다. 아직도 잘 다니고 있다. 



5. 내가 노력해서 만들 수 있는 것인지 고민하기: 결혼식을 가보면 식전 영상부터 선물 같은 것들을 모두 업체에 맡기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예의는 지켰으나 무언가 영혼이 빠진 느낌이 들기도 한 것이 무언가 심심했다. 그래서 직접 식전 영상, 식중 영상을 기획, 편집했고, 스페인에서 직접 찍었던 사진들을 (우리가 없어 집에서 편하게 걸 수 있는) 70가지 형태의 문장과 더해 폴라로이드 형태로 주문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건 엄청난 돈이 드는 것은 아니지만 점점 더 짧아지는 결혼식에 조금이나마 특별함을 줄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서 조금 귀찮아도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참고로 우리는 결혼식 안에서의 돈을 아끼진 않았다. 서울 근교에서 비수기로 날을 잡았지만 그 지역에서 가장 밥이 맛있다는 곳으로 선택했고, 포토 부스나 친한 친구들을 위한 애프터 파티도 새벽 1시까지 진행했다. 

오시는 분들께는 최대의 만족을 드리고, 우리가 불필요하다고 느끼는 것들을 줄이는 것이 목표였다. 


물론 처음 준비하는 결혼식이었기 때문에 우리도 아쉬운 점은 있다. 드레스 최종 셀렉 단계에서 드레스 투어를 했을 때 이외의 것이 더 예뻐서 추가 비용을 지불했던 것 (드레스 샵의 트릭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결혼사진 촬영 때 미리 다른 색의 셀프 웨딩드레스를 준비해 가지 않았던 것 (그래서 사진에 흰색 드레스만 있다...), 본식 사진 / 영상 업체를 꼼꼼히 알아보지 못했던 것 등등. 그래도 다행히 1000만 원이라는 예산 안에서 무사히 모든 것을 잘 준비하고 보여드릴 수 있었고, 많은 호평 아래 우리의 결혼식이 마무리되었다. 


3개월이 넘게 엄마와 싸우며 대충 때워야겠다고 생각한 결혼식. 어느 순간 이렇게 진심이 되어버렸고, 1년 동안 둘이서 모든 것을 함께 계획하고 꼼꼼히 준비해 나가면서 비로소 진짜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또,  나의 부모님, 남자친구의 부모님, 친척들, 친구들까지 나를 둘러싼 모든 인연들을 살피면서 나만 생각했던 어린아이에서 조금은 다른 이들도 생각할 수 있는 어른이 되어감을 느끼기도 했다. 


엄마가 결혼식을 꼭 해야 한다고 말했던 이유가 이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일생일대의 장기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이만큼 성장했으니 참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리고 나에게도 너무 수고했다고, 이제 조금은 편하게 쉬어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잘했어 다지야. 너 유부야. 



마지막으로,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예비 부부에게 응원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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