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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 다지 Aug 18. 2024

도망치는 게 잘못은 아니잖아요.

스물여섯 번째 편지: 지구 반대편에서 만난 새로운 나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이 세상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던 적이 있니?  내가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괜스레 사람들 앞에서 주눅 들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다시 삶을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 말이야. 대학교 4학년, 24살의 나는 그 생각으로 깊게 잠식되어 있었어. 꽤 괜찮은 대학에 입학해서 하고 싶던 경험들을 차곡차곡 쌓았다고 생각한 나의 자신감은 취업이라는 거대한 산 앞에서 처절하게 발가벗겨지고 찢겨나갔거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갔던 인턴 면접에서는 "요즘 영어는 기본이죠. 제2 외국어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공모전은 열심히 했는데 1등 한 건 없네... 학점 3.9라.. 그래서 학점이 좀 낮네" 등 온갖 비아냥거림을 다 들어야 했고 간절한 기대로 방문한 취업 상담 센터에서는 마케터를 지원하는 것이 맞냐며, 내 경험들이 난잡하다는 피드백까지 받았으니까. 지인들을 통해 꽤 많은 기업에서 H 이하는 뽑지 않는다는 걸 안 후부터는 더욱 좌절했고.


사실 지원자들을 정중하게 대하며 학교 타이틀로 차별하지 않는 회사들도 많고, 학생의 취업을 돕는 교내 취업 상담관이 저렇게 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걸 지금은 너무나도 잘 알지만 이제 막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24살의 나에게는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도 무서웠어. 게다가 미디어 전공이었던 만큼 동기들은 입학부터 아나운서, 기자, 예능 피디 등 확고한 꿈이 있었는데, 나는 선생님이라는 과거 꿈에 대한 미련과 전공을 살려야 한다는 강박이 섞여 혼란만이 가득했어. 결국, 졸업식을 마치고 얼마 있지 않아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게 돼. 사실 나에게 나라는 중요하지 않았어. 영어를 쓰는 나라 중 캐나다는 추첨에서 떨어졌는데, 호주는 추첨 없이 100% 비자를 준다니까 갔지. 아, 추위를 많이 타는 나에게 호주의 날씨가 플러스가 된 건 분명해.


호주에 간다는 건 모두에게 응원받는 결정은 아니었어. 오히려 걱정과 만류가 많았지. 전과와 교환학생으로 이미 남들보다 졸업이 1년이 늦춰진 상태에서 취업준비까지 1-2년 미뤄지면 정말 큰일이 난다면서.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이런 모든 압박을 지금 당장 견딜 자신이 없었어. 어딜 가나 '늦었으니, ~ 를 해야 한다.'는 말만 듣고 지내니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나란 사람은 무엇을 좋아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더라고. 면접은 무슨 이력서에 한 줄 쓰는 것조차 다 거짓말 같고 벌써부터 거절당하는 느낌이었지. 


그렇게 도망치듯 온 호주에서의 삶은 평탄하지만은 않았어. 제3의 도시 브리즈번에서 차로 50분 정도 떨어져 있는 골드 코스트에서 베이비 시터와 딤섬을 파는 일을 했었는데 울고 싶을 때가 많았어. 오페어란 이름으로 일한 베이비 시터 일은 임금 체불로 추후 옴부즈맨에 신고를 해야 했고, 딤섬을 팔러 간 한 페스티벌은 온통 마약 소굴이었거든. 결국 브리즈번으로 도망치듯 돌아와 지내게 되었는데, 일을 구하고 있는 도중에 코로나로 주 경계가 봉쇄되고 식당들도 문을 닫게 되면서 일을 할 기회도 없어져 버렸지. 


어쩔 수 없이 호주에 올 때보다 5배가 넘는 돈을 주고 예매한 전세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며 25살 나의 도망은 허망하게 끝이 났지만, 나는 이곳으로 온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


우선, 이집트, 인도, 브라질, 멕시코에서 온 플랫 메이트들과 각자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과거부터 미래까지 쉴 새 없이 이야기하면서 대학, 졸업, 취업에 갇혀있었던 세계가 엄청나게 확장됨을 느꼈어! 하루는 브라질의 성 소수자의 인권과 정책을 그다음 날은 멕시코의 미투 운동과 마약 소탕 작전을, 그다음 날은 이집트의 경제 상황과 내란에 대해, 때론 사라지지 않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비 정상적인 결혼 제도에 대해 공부하면서 말이야. 한국의 취업 현실과 높은 자살률도 물론 들어가 있었지. 슬픈 과거 이야기에는 함께 울고 등을 두드리며, 모두 다른 이유로 호주에 있는 서로를 응원하며, 또 함께 미래를 그리면서 우리는 힘든 코로나 시기를 이겨낼 수 있었어. 그 사이에 영어 실력은 늘고, 친구들과도 끈끈해졌지.


또, 한국인이 하나 없는 풋볼 경기장에서 호주인에게 딤섬을 팔며 내가 쓸모 있는 존재라고, 꽤나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이 생겼어. 한국에서는 당연했던 것들이 그들의 눈에는 엄청 싹싹하고 부지런하게 보였던 걸지도 모르지만. 2년 전까지만 해도 읽고 쓸 줄은 알아도 말할 줄은 몰랐던 '영어'로 지구 반대편에서 외국인들에게 음식을 팔고, 자연스럽게 스몰 토크도 하고, 단골손님도 생기는 것 자체만으로 그저 행복했어. 누군가는 '에이, 정규직도 아니고, 그냥 알바로 음식을 팔았던 거 아니야?.'라고 할지 모르나 나의 노력으로 시간당 25불 (21,000원)에 주말, 연말 수당까지 추가로 받은 후, 나를 위해 1주일간 멜버른으로 여행을 갔던 순간을 잊지 못해. 


마지막으로, 8살부터 쉬지 않고 적다 몇 해전부터 멈춰버린 글을 다시 쓰기 시작했어. 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고, 또 하루를 기억할 수 있는 글을 말이야. 그전에는 생각이라는 걸 하기 싫고, 하루하루 사는 게 재미없어서 일기도 쓰지 않았었는데. 그때 브런치를 알게 된 건 꽤나 행운이라고 생각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위로를 받으며, 또 내 이야기를 나눌 용기를 얻었으니까. 


'도망간 곳에 천국은 없다.'는 말에는 동의해. 인종차별, 임금체불, 코로나 시기 정부의 대처까지 호주에서의 삶은 천국과는 거리가 멀었거든. 다만, '너의 관점을 바꾸면 문제는 해결된다.'는 건 동의하지 않을래. 모든 문제가 내 안에서 오는 것이 아니듯, 내 관점만 바꾼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니까. 마치 사회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려는 것 같아. 그러니, 만약 지금 당장 무엇을 할지 모르겠다면, 내게 주어지는 압박과 스트레스로 어디론가 훌훌 떠나버리고 싶다면,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어. 다른 종류의 힘든 일이 너를 찾아오겠지만, 혹시 알아? 환경이 바뀌면서 너도 몰랐던 재능으로 그 문제를 잘 견디고 더 강하고 멋진 사람이 되어있을지! 


다녀와서 알게 된 사실인데,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오면 결혼정보회사에 등록할 때 마이너스 포인트가 생기고, 때때로 면접에서도 불이익이 주어진다며? 물론 그들이 생각하는 일이 펼쳐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그보다 더 다양한 삶의 모습이 있어. 적어도 내 주변에는 그랬어. 워킹 홀리데이를 다녀왔다는 이유로 부정적인 프레임을 씌운다는 것 자체도 어이없고, 그것이 어떤 이유로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은 누군가의 선택지를 빼앗는 것 같아 슬프기도 해. 


또 다른 압박에, 남들의 시선에 너는 흔들리지 않길 바라며, 힘들 땐 언제든 마음껏 쉬어도 된다고, 도망치고 싶을 땐 편하게 떠나봐도 좋다고 응원해주고 싶다. 대신, 떠난 곳에서는 정말 너의 행복만 생각하기로 약속해.


그럼, 오늘의 편지도 이만 마칠게. 다음 편지는 수술로 인해 조금 늦게 닿을 것 같아. 그동안 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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