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객 노라의 고군분투 미국 교환학생 적응기 Ep_11
글/ 사진 보통의 노라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팀플의 늪에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며, 한편으로는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으며 연애를 하느라 2학기는 참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3월. 10일간의 달콤한 봄방학이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학교에서 파견이 된 친구들을 포함해 여러 나라에서 온 교환학생들은 이 날만을 기다리며 2달 전부터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고, 차근차근 계획을 짜고 있었다. 3월, 이곳 나이아가라는 끊임없이 눈이 오는 한 겨울이었지만 이곳만 벗어나면 완벽한 날씨를 즐길 수 있는 시기였다.
"우리는 도깨비 촬영지 보러 퀘벡에 갈 거야. 그러고 나서 몬트리올을 찍고 기차 타고 와야지."
"우리는 뉴욕이랑 보스턴을 다녀올 거야. 타임 스퀘어에서 BTS인형을 사 올 거야."
"우리는 멕시코에 들렸다가 플로리다 바다에서 놀고 올게."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올 때 저마다 마음속에 하나씩 가지고 왔던 그 꿈을 이룰 생각에 친구들의 얼굴에 설렘이 가득했다. 친구들이 물었다.
"노라, 너는 어디로 갈 거야? 어딜 가든 비행기표 가격이 장난이 아닐 거야.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 빨리 찾아봐."
그리고 이어지는 나의 대답에 친구들은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나 사실 피츠버그로 봉사 활동하러 가."
내가 다닌 학교는 가톨릭 학교로 봄방학이 되면 학교에서 10명 이내로 사람들을 선발해 피츠버그에 있는 수녀원에 머무르면서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수녀님들과 아침을 먹고 오후까지 활동을 하고 돌아와 하루 일과를 함께 토론하는 나름 힘든 일정이었다. 가끔은 야간 활동도 있다 했다.
친구들은 의아해했다. 그도 그런 것이 나는 정말 여행광이었으니까. 한국에서도 방학 때만 되면 혼자 어디론가 사라져 적은 돈으로도 참 알차게 여행을 하고 또 그것으로 에너지를 충전하고 오는 나였다. 새로운 곳을 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또 다른 문화를 배운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했고, 앞으로 살아갈 힘을 주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여행을 포기해도 되겠다 싶었다. 아니, 어쩌면 이것 또한 여행이 아닐까 싶었다. 사실 다른 곳은 돈과 의지만 있다면 갈 수 있겠지만, 이런 경험은 다시는 못할 테니까. 외국인으로 미국까지 와서 학교 사람들과 봉사활동을 할 수 있다는 거. 쉽지 않은 경험이라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나는 9박 10일간의 봉사활동을 위해 피츠버그로 떠났다.
우리는 학교 전통에 따라 피츠버그 외곽에 위치한 한 수녀원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300년이 넘은 수녀원이라 서 시설에 대해 걱정했었는데 내 기숙사 방보다 10배는 더 좋았다. 그리고 1인 1실이라니. 이런 호화스러운 봉사가 있나. 봉사를 할 때는 함께 으샤 으샤 하고, 그 이외의 시간은 각자만의 휴식공간을 충분히 주려는 학교와 수녀원 측의 배려가 느껴졌다 (침대가 1인용이기도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처음 3일 동안은 많이 고생했다. 일정이 끝나고 8~9시부터 아침 6시까지 잘 시간이 있었음에도 나는 2시간도 채 자지 못해 차나 심지어 식사시간에도 꾸벅꾸벅 졸곤 했다.
이놈의 불면증.
대학교 1학년 때부터인가 남들보다 뒤처지는 게 아닌가라는 불안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렸고, 그러다 잠이 들어도 가위에 눌려서 오래 잠들지 못했다. 미국에 와서는 심적으로 많이 안정이 되어서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지 심한 가위눌림에 시달렸다. 가장 심하게 불면증에 시달렸을 때처럼 헛것이 보이기 시작했고, 꿈에서 그 헛것이 빠르게 날 쫒아와 목을 조르거나 내 머리채를 잡고 절대 놔주지 않았다. 끙끙대는 소리를 듣고 옆방에서 자던 친구가 급히 문을 열고 흔들어 깨운 적도 있었다. 참 민망했다.
덕분에 컨디션은 최악이었지만, 혹여나 한 사람이 분위기를 망칠까 봐 애써 웃었고 애써 강한 척을 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여 입에 맞지 않아도 꼬박꼬박 열심히 밥을 먹었고 더 열심히 움직여서 몸이 피곤하게 만들었다. 이런 노력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두 번째 날 간 성당에서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바란 덕분이었을까 (참고로 나는 무교지만 기도는 한다. 누구나 원하는 게 있을 때는 기도를 하지 않는가) 4일째부터는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고 잘 잘 수 있었다.
우리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MERCY'라는 피츠버그 시내에 위치한 노숙인 쉼터였다. 피츠버그는 뉴욕주 옆에 있는 펜실베니아주에서 꽤 큰 도시로 케첩과 마요네즈로 잘 알려진 하인즈 그룹의 본사가 있는 곳이다. 20-30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정말 잘 나가는 도시 중 하나로 손꼽혔지만, 지금은 실업률이 50%가 넘는 곳이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래서인지 길거리에 노숙인들을 쉽게 볼 수 있었고, MERCY에도 하루에 적게는 70명 많게는 12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오고 가곤 했다.
사실 처음에는 좀 많이 당황했다. 내가 봉사활동을 하던 곳은 주로 학교였고, 내 역할은 멘토였기에 성인을 만날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여기는 미국이었고, 나는 아시아인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무서웠다. 술에 취해 담배인지 마약인지 알 수 없는 물질을 입술에 걸치고 입구로 들어가는 우리를 훑고 있는 것이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았고, 센터에 들어가자 아파트 쓰레기 장에서 맡았던 냄새의 몇 배나 강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내가 무슨 영광을 누리자고 내 발로 여기까지 왔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을 따라 공유가 있던 퀘벡이나 갈걸. 아니다, 프리다 칼로의 생애를 보러 멕시코시티나 갈걸. 어딜 가든 여기보다 낫겠지.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으니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다. 엉망진창이었던 창고를 영혼 없이 정리하고, 누가 봐도 외국인인 내가 궁금해 걸어오는 말들에 대해 형식적으로 대답했다. 무표정을 하고선.
할 일을 마치고 의자에 앉아 멍하니 있다 보니 함께 온 친구들이 보였다. 이곳에서 무표정을 하고 영혼 없이 일을 하고 있는 건 나뿐이었다. 이상했다. 쟤네도 분명 지독한 냄새를 맡았을 텐데, 분명 그 무서운 눈빛을 봤을 텐데.
"너희는 안 힘들어? 저 사람들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근데, 저 아저씨 좀 무섭게 생겼다 그렇지?"
"힘들지. 그래도 괜찮아. 나는 겨우 며칠인데 저분들은 더 많이 힘들 거야. 그리고 여기 오고 싶어서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리고 저 중 대부분은 여기 오게 될 줄 상상도 못 했을 거야. 우리도 혹시 모르지. 지금은 운이 좋은 것뿐"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실제로 사람들과 얘기를 하다 보니 정말 예전에는 성공궤도를 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번 시기를 잘못 타서 혹은 사람을 잘못 만나서 가진 걸 잃게 되었고, 그 후로는 마약과 각종 범죄 사건에 뒤엉키면서 이곳까지 왔다는 것.
이곳에 있으면서 깨달은 것은 어쩌면 자유주의 상징이자 많은 이들의 '아메리칸드림'을 이뤄 준 이 나라도 어두운 면이 많다는 것. 풍요로운 땅에서 빠르게 성장했고, 세계적인 기업들을 가지고 있으며 자유의 상징처럼 보였던 미국에서도 한번 넘어지면 다시 일어날 기회를 부여받기 힘들다는 거. 돈을 잃고 노숙인이 되면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아도 더 감옥에 갈 확률이 높아지고, 특히 백인이 아닐 경우에는 더 심한 잣대가 씌워진다는 것. 그러고 보니 이곳 센터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내가 궁극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참으로 답답했다.
그냥 웃자. 웃고 웃게 만드는 거야. 영혼이 돌아왔다. 의욕이 생겼다. 이 센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찾아다녔다. 그림을 그려 팸플릿을 완성하고 주방 창고에 널브러져 있는 수 천 개의 통조림을 정리했다.
"아저씨 아저씨, 창고 좀 봐요."
"뭐? 왜 무슨 일인데?"
"제가 월마트 (미국의 대표 대형마트)를 만들었어요. 제 솜씨 어때요? 엄청나죠?"
호들갑을 떠는 내 모습을 보며 친구들과 센터에 있는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구나. 나도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구나.
2m나 되는 선반에 사력을 다해 완벽하게 캔을 쌓느라 팔다리가 부르르 떨렸지만,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나에게 그들은 더 이상 무서운 사람들이 아니었고, 더 이상 악취도 나지 않았다.
피츠버그에 오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2편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