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랑 데이트하고 싶어

방랑객 노라의 고군분투 미국 교환학생 적응기 Ep_10

by 보통의 다지

누구나 대학생활의 로망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있지 않은가?

나도 하나 있었다.

남녀 공학에 다니는 친구들이 들으면 질색팔색 할 바로 CC(Campus Couple, 캠퍼스 커플)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응답하라 1997>에 빠져 한 장면이라도 놓칠세라 야자가 끝나고 학교에서 가장 빠른 버스를 타고 뛰어 왔고, 수능이 끝나고 고3 수험생에서 마침내 벗어난 나는 이번에는 <응답하라 1994>에 빠져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CC였다. 함께 도서관에서 밤새 함께 공부를 해보고 싶었고, 함께 공모전도 나가보고 싶었으며, 시험 기간이 되면 남몰래 소소한 교수님 뒷담화도 해보고 싶었다.


당연히, 이런 로망 하나쯤은 대학만 가면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여중- 여고를 거쳐 여대에 진학했다.


물론, 지금은 언제나 이 학교에 다녔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살지만 처음에는 참 암울했던 건 사실이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원하고 원했던 캠퍼스 커플은 이번 생에 물 건너갔다고 생각했다.

근데, 참 살다 보니 별 일이 다 있다.

머나먼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갔다가 연애를 시작하게 된 거다.


이 친구를 처음 보게 된 것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마라톤(?) 후 한 풀장에 모여 바비큐를 먹을 때다.(Ep_2를 참고하세요) 교환학생 테이블이 따로 있는지도 모르고 똥 배짱으로 내 과를 찾아가서 앉아 열심히 질문도 하고 또 열심히 닭다리도 뜯었다. 이 날 정말 창피했는데 내 옆에 앉아 칠칠치 못하게 고기를 흘리면서 먹는 한 아이를 보고 좀 긴장이 풀렸던 기억이 난다.


그게 첫 만남이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자기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


그리고 우리는 같은 수업을 듣게 되었다. 전공 필수 과목이었기에.

하지만, 개똥 같은 내 영어 실력 때문에 항상 질문을 대기해야 하는 나는 항상 맨 앞에 앉았고, 이 친구는 항상 맨 뒤에 앉았기에 얘기를 해 볼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 나는 얘가 같은 수업을 듣고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러다 겨울이 되었고, 크리스마스이브 이벤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학교 자체가 워낙 작다 보니 내 친구가 걔 친구였고 개 친구가 내 친구였기에 어쩌다 같이 앉게 되었는데 그날 거기서 이 애한테 반했다. 반한 이유를 얘기하면 너무 이상해서 좀 부끄러운데,


'누가 누가 오레오를 이마에 높이 쌓나'라는 참 유치한 게임을 하는데 얘가 정말 진지한 얼굴로 이마에 엄청난 탑을 쌓는 거다. 그때 그 초롱초롱한 눈에 반했다. 그때는 잠시 내가 돌았나 보다. 어쨌거나 나는 그때 결심했다. '저 친구랑 데이트를 해야지.'


다이나믹하고도 짧았던 겨울방학을 마치고 학교에서 국제학생들을 위한 설날 파티가 있었던 날이었다. 나는 그날도 무슨 똥 배짱인지 앞에 나서서 박효신 노래를 불렀고, 다행히 중국 베트남 친구들이 이 노래를 잘 알아서 간신히 민망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친구의 초대로 홈파티에 가게 되었는데 술을 한참 마시고 있는데 이 친구가 오는 거다. 이때다 싶었다. 참고로 난 술에 취하면 뇌가 입력하는 대로 바로 행동으로 옮긴다.


대놓고 들이댄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것 같다.

그 친구와 술잔을 함께 기울이고 옆에 붙어 있다가 함께 학교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그에게 눈 쌓인 의자 위에서 먼저 입술을 댔다. 살면서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행동을 하는 내가 스스로도 참 웃기고 당황스러웠다.


그날 같이 손을 잡고 새벽에 학교를 몇 바퀴나 돌면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 미안하지만 기억이 1도 나지 않는다.


다음날 오전,

도대체 언제 스냅챗을 교환을 한 건지, 일어냤냐면서 기숙사 앞에 서 있다고 했다. 거절을 당할까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나오자마자 꽉 안는 것이 아닌가. 뭐지 싶었다.


점심을 먹으며 다행히 그도 나를 좋게 생각한다는 말에 안심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늦은 것 같아서 걱정스러웠다. 미국은 썸을 3-4달 정도 타고 진지하게 사귀는 경우가 많기에, 벌써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4달 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이 친구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우리는 '썸' 같은 걸 가뿐히 뛰어넘었고 그냥 그대로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파티에 다녀온 지 1주일쯤 지났을까, 기숙사 로비에서 내 머리를 묶어주며 "너는 정말 가장 귀여운 여자 친구야."라는 간단하지만 세상 달콤한 말로.


그리고는 말했다. 자기는 첫날 수업에서 날 보자마자 데이트 신청을 하고 싶었다고. 근데 용기가 없어서 못했는데, 그날 설날 이벤트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 용기를 냈다고. 얘도 상당히 또라이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나도 대답했다. 나는 오레오를 이마에 쌓는 모습에 반했었다고.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외국인 남자 친구와 CC가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와 사귄 이후에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미치게 행복했던 적도 있었고, 미치게 얄미운 적도 있었고, 그의 친구에게 인종차별도 당했고 한국 교환학생들로부터 곱지 않는 시선도 받았다.


그리고, 아직은 둘 다 어렸기에 그리고 모든 감정을 빠르고 정확하게 공유를 하기에는 내 영어실력이 부족했고, 그 역시 한국어를 구사할 줄 몰랐으므로 한번 갈등이 생기면 좀처럼 풀기 어려웠다.


결국 우리는 학기 말이 되어 헤어졌다. 처음으로 참 많이 울었던 것 같다.


하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그에게 먼저 다가가 고백을 한 내 모습이 좋았고, 그와 함께 있을 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넘쳤고 참 많이도 웃었다. 대체로 범죄, 스릴러 장르였던 내 지난 연애를 잊을 수 있었고, 영어도 정말 많이 들었다.


그와 거의 매일 밥을 같이 먹었는데, 겨우 피자 두 조각 또는 샌드위치 하나 이렇게 먹는 그를 보면서 잔소리를 늘어놓은 적이 있다.


그가 조심스레 말했다.

"이거 비밀인데, 나 사실 수업 끝나고 바로 친구들이랑 밥 먹어. 근데 너 심심할까 봐. 그리고 너랑 같이 또 먹고 싶어서."


이 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타지에서 언제나 힘이 되어줬던 이유였을까.

예전 남자 친구들은 모두 남보다 못한 적이 되어 갈라섰지만, 그는 종종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다양한 이슈를 함께 얘기하는 친구가 되었다.


결국 헤어진 사이지만, 교환학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기에 몇 글자 끄적여본다.

고마웠어,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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