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는 틀린 것을 왜 틀렸는지 일깨워주는 부모가 필요하다.
오페어로 일한 지 2달이 되어가는 날. 브리즈번에서 약 1000km 떨어진 사우스웨일주에서 난 큰 산불로 인해 예상치 못하게 긴 홍수가 이어졌고, 아이들은 2주가 넘도록 등교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깨우기 위해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고,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뉴텔라로 범벅이 된 샌드위치도 싸지 않아도 되었지만 평소보다 더 오랜 시간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에 이미 지칠 때로 지쳐 있었다.
돌이 갓 지난 막내는 넘어져도 울지 않고, 노래만 틀어주면 혼자서도 신나게 놀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고, 7살이 된 둘째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첫날부터 유독 나를 잘 따랐다. 누가 봐도 미술에 재능이 있던 이 아이와 함께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고, 지루해질 때쯤 아무도 없는 들판에서 함께 축구를 하는 것이 나에게도 큰 힐링이 되었다. 문제는 이제 막 사춘기에 들어선 첫째였다.
이혼 후 표현을 하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이 많아졌으니 더 많이 신경 써달라는 호스트 맘의 말에 따라 이 날도 게임을 하는 첫째의 방 앞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때 들려오는 욕설들. 닫힌 방문을 뚫고 들려오는 그 욕설의 대상은 충격적 이게도 첫째와 같은 반에 있는 한국인 학생이었다. 몇 주전 아이들 학교의 학예회를 다녀왔을 때, 가장 눈에 띈 아이였다. 골드코스트라는 근교에서도 아주 멀리 떨어진 시골 학교에서 본 첫 한국 가족이라 반갑게 인사를 했던 기억이 났다. 이민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새로운 환경이 낯설 법도 한데, 만 11살의 아이는 아주 당차고 씩씩했다.
"칭, 챙, 총 fucking Asian... Poor country... " 듣고 싶지 않은 단어들이 연신 귀를 때렸다. 그리고 나는 확신했다. '이 아이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구나. 그 아이가 한국에서 온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반 친구들과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구나.'
들끓어 오르는 화를 최대한 가라앉히고, 아이가 모를 거라는 가정 아래 용기 내서 방문을 열었다. 나를 본 아이는 이상하리만치 침착했다. 사실 신경을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아이의 헤드셋을 벗기고 침착하게 대화를 시도했다.
"A야, 혹시 네가 방금 친구들과 한 말을 다시 알려줄 수 있을까?"
"왜요?"
"내가 무슨 단어를 들었는데, 그 단어가 아주 중요한 것이라 너와 대화를 하고 싶어서."
"기억이 나지 않아요."
"칭챙총."이라고 한 거 맞니?"
"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는 있니? 혹시 누구에게 한 거니?"
"모르겠어요. 기억 안 나요."
끝까지 발뺌을 하는 아이를 1시간 동안 설득하다 결국 호스트 대디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D, 첫째가 이런 단어를 쓰면서 반 친구들과 대화를 하는 것을 들었어. 그리고 나는 아이의 반 친구 중에 한국인이 있는 것을 알아. 모르고 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틀린 건 틀린 거야. 내가 대화를 시도했는데, 아빠인 네가 해 보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 단어의 의미와 얼마나 그 단어가 인종차별적인 것인지에 대해 충분히 설명한 후, 함께 아이를 데리러 갔다.
그리고 나는 그날, 첫째와 가까워질 기회를 영영 잃고 말았다. 호스트 대디는 아이에게 단어의 의미와, 왜 그것을 사용하면 안 되는지에 대해서 알려주는 대신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했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어떻게 자신의 아빠에게 전달되었는지 아는 첫째는 나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증오는 내가 그 집에서 나오는 결정적 불씨가 되었다.
누군가는 왜 이렇게 이 문제에 대해 민감하게 구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마도 내가 인종차별의 피해자도 되어보고 목격자도 되어봐서가 아닐까 싶다.
아무것도 모르던 15살, 우연히 자매결연을 맺은 뉴질랜드의 한 중학교에 1달간 파견된 적이 있다. 그때 베트남에서 몇 달 전 이민 온 동갑 남자아이가 단지 영어를 못하고, 까무잡잡하다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대놓고 따돌림을 당하고 맞는 걸 보았다. 그때 내 큰 키가 날 보호해줄 거라고 믿었었는지, 수많은 남자아이들을 뚫고 들어가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도서관으로 도망쳤다. 이것이 인종차별이라는 것을 몇 년이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처음이었다.
그리고 8년이 지난 후, 교환학생으로 미국에서 1년을 보내게 되었을 때, 사회학 시간 팀 활동 시간에 단지 내가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당연히 영어를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가운데에 앉은 나에게 말도 걸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다. 또 같은 과였던 미국인 남자 친구와 함께 밥을 먹는 나를 보고 그의 친구들이 지나가면서 "야, 너는 여기 예쁘고 섹시한 white girls 말고 왜 저런 못생긴 아시안을 사귀냐."라고 했던 것도 스쳐 지나갔다.
아마 이런 나의 경험들이 첫째 아이의 방문을 열고, 내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호스트 대디에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다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맞다. 나는 이 일을 계기로 일자리를 잃었고, 일주일 휴가를 내고 여행을 간 사이에 그들의 집에서 그달 월급도 받지 못하고 쫓겨났다 (이건 다음 에피소드에서 다룰 예정이다) 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나의 행동 하나로 절대 사회에 파장을 일으키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그것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으니까.
그래도 아쉬운 것이 있다면, 부모가 진심으로 자신들의 무지함을 깨닫고 아이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시켰으면 하는 것이다. 사실 아이들은 잘못이 없다. 그것을 그대로 방임한 학교와 부모가 잘못일 뿐.
멜팅 팟, 이민자들의 나라인 호주에서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 인종차별. 그것을 첫째가 살아갈 미래 호주에서는 더욱더 중요한 문제로 다루길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