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객 노라의 고군분투 미국 교환학생 이야기 EP_4
글/사진 보통의 노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먼저 다가가지 않으면 그 누구도 먼저 친구가 되자고 오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내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고. 그래서 동아리도 세 개나 지원했었는데, 실패로 끝났지.
하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9월 중순 나에게도 드디어 학교 친구가 생겼다. 와 아아아아아 아.
각 기숙사 1층과 학생회관에는 포켓볼을 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학생 회관의 시설이 훨씬 더 좋고 수업을 듣는 빌딩과 가까워서 수업이 끝나고 시간이 남을 때마다 함께 파견된 언니들과 게임을 하곤 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우린 2:2로 나눠 포켓볼을 치다가, 이제는 ex 중 한 명이 된 전 남자 친구와 연락을 하기 위해 나는 잠깐 경기를 쉬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때 7명의 무리가 나에게 다가왔다. 6명의 모범생 같아 보이는 남자애들과 리더로 보이는 1명의 여자아이로 구성된 무리였다.
"헤이, 너 교환학생이야? 어디서 왔어? 이름이 뭐야? 포켓볼 좋아해? 스냅챗 교환하자."
따발총보다 빠르게 오는 질문들에 정신없이 대답을 하고 '스냅챗은 도대체 뭐지?' 하는 순간 이미 내 폰에는 미국인들의 카카오톡 같은 (카카오톡의 100분의 1도 못 따라가는 앱, 저장을 안 하면 메시지들이 다 사라지는 앱이다) 스냅챗이 깔려 있었고, 각자 돌아가면서 자신의 아이디를 알아서 추가해줬다. 물론 그중 몇 명과만 친해졌지만.
그리고 몇 주가 지나서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인데, 이들 모두가 다 신입생이라는 것이었다. 참고로 미국 신입생 나이는 대체로 만 17살에서 18세. 솔직히 말하면 몇 명은 교수님인 줄 알고 학생 식당에서 고개 숙여 인사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비밀이다) 나중에는 이 친구들을 위해 내 여권으로 술을 참 많이도 조달했지... 이럴 땐, 만 21세가 넘은 게 참 좋았다.
그 이후로 거의 매일 같이 만나서 포켓볼도 치고, 밥도 같이 먹고 숙제도 같이 하면서 우리는 단짝이 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단짝이 생겼다. 바로 내 룸메이트 쯔웨이. 나는 중국에서 온 2명의 친구들과 한 방을 쓰도록 배정을 받았다. 방 자체가 워낙 커서 같이 쓰는 게 전혀 불편하지 않았고, 인간 친화 기능이 극적으로 발달한 나에게는 룸메이트라는 존재가 있다는 게 너무나도 큰 행복이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서 남자 친구를 사귄 한 명의 친구는 독방을 쓰고 싶다며 다른 기숙사로 옮겼고, 나는 쯔웨이랑 둘이서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최고의 룸메이트였고, 가장 소중한 가족이 되었다.
갓 세븐의 골수팬이라는 이 친구는 한국어를 곧잘 했다. 띄어쓰기나 받침의 오류 같이 문법은 버거워했으나, 나와의 대화에는 거의 문제가 없었다. 한 학기 후, 쯔웨이는 중국에 사는 한국인처럼 거의 완벽한 네이티브가 되었다. 책에서 배우지 못하는 문장을 내가 열심히 알려 주었지
예를 들면, "너 라면 뿔은 게 좋아 아님 꼬들한 게 좋아?" 같은 거.
이 친구와 친해지게 된 계기가 있다.
지난 에피소드에서 말했듯이 나는 친구들을 만들고, 영어 스피킹 실력을 빠르게 향상하기 위해서 홈 파티에 자주 갔고, 술을 많이 마셨다. 거기에는 다른 학교에서 파견된 한국인 친구들도 있었는데, 성별이 남자인 친구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술잔을 기울이는 나의 모습을 오해하고는 이상한 소문을 내 버렸다. 전공 성격 때문인지 교환학생 전용 빌리지가 아닌, 외딴곳에 방을 따로 배정받은 나는 이 소문을 학기가 끝날 때쯤에서야 알게 되었고, 그전까지는 왜 한국인 친구들이 나를 피하는지 왜 이상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고는 "너 남자 친구 있지 않아? 처신 잘해야 될 것 같은데."라고 말하는지 알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성별 상관없이 어깨동무를 하고 어울리던 나는 이게 왜 잘못된 일인지 소문을 듣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바람을 핀 것도, 마음을 준 것도 아니고. 그저 술잔을 부딪히며 축구 시작 전에 '파이팅'을 외치는 것처럼 여러 명과 어깨동무를 한 것뿐인데 말이다.
무튼, 이유도 모른 채 들리는 험담에 남몰래 속앓이를 하다가 결국 몸살에 걸렸다. 항상 건강할 거라고 자만했던 나는 한국에서 가지고 온 약이라고는 '지사제'와 '멀미약' 그리고 '후시딘' 밖에 없었고, 주말이라 학교 내 의료 센터의 문도 닫혔을 때라 그저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너무 몸이 좋지 않아 한국인 교환학생으로 이루어진 단톡에 "혹시, 몸살감기약을 가지고 있는 사람 있나요? 병원도 닫히고 제가 몸이 많이 안 좋아서요. 부탁드려요."라고 썼는데 16명에게 읽씹을 당했다 (그중 몇 명은 모르는 사이이기에 이해는 갔다)
나는 그렇게 정신을 잃어갔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떠보니 내 머리 위에는 수건이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내 옆에서 내 룸메이트는 나를 그윽이 내려다보며 "괜찮아?"라고 물었다. 그때는 제대로 대화도 안 해본 사이었는데,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거리면서 이마에 수건을 올렸을 게 떠올라 통제할 겨를도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자 친구는 그저 씩 웃으면서 "일어나, 약 먹어야 해 약!"라고 말하며 중국에서 가져온 자신의 약봉지를 휘적이더니 알약을 차례차례 6개나 입에 넣어 주었다.
"쯔웨이, 이거 정말 6개 다 먹는 거 맞아? 나 약물 과다 복용으로 더 아파지는 거 아니지?"
"과다 복용? 그게 뭐야? 일단 먹어. 먹으면 다 좋은 거야. 안 아파질 거야."
그리고서는 주말 동안 계속 먹으라며 약을 꺼내 왔다.
월요일이 되어, 의료 센터를 다녀오고 상태가 나아진 나에게 그녀는 말했다.
"사실, 그거 6개 다 먹는 거 아니래. 그래도 괜찮아졌잖아?"
"죽고 싶지? 너 나중에 내가 복수할 거야."
말은 이렇게 했지만, 몸은 그녀를 힘껏 안아주고 있었다.
그렇게 나에게도 소중한 사람이 생겼다.
한국 라면 + 김치 조합에 미친 쯔웨이와 함께 우리는 매일 새벽에 야식을 갓 세븐을 보며 야식을 먹었고
1시간의 오차도 없이 생활 패턴이 똑같아서 그런지 생활에 불편함도 없었다.
(10시 기상- 4시 취침, 오후 2-4시 낮잠시간)
야식을 먹고 난 다음에는 나는 30분간 한국어를 알려주고 쯔웨이는 중국어를 알려 줬다.
물론, 복습을 1도 하지 않아서 머리에 남은 단어가 없다. 미안해. 연락할 때마다 사과를 한다.
한 학기 후, 중국으로 그녀가 돌아갈 때 눈보라에 맨발로 기어 나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남자 친구랑 헤어질 때도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던 내가, 4개월을 같이 산 이 친구가 떠날 땐 왜 그리도 처절하게 울었는지. 아직도 기억난다. 같은 기숙사를 쓰고 있던 사람들이 날 보고 웃었던 기억이...
어이없게 이상한 소문에 휩쓸려 많이도 힘들었던 교환학생 초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옆에는 좋은 사람들이 있어 외롭지 않았다.
친구의 고향이 우한 근처라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코로나가 터지기 전 상해로 이사를 갔다고 해서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른다. 빨리 이 재앙이 끝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