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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meralda Aug 06. 2020

012 콩국수와 김치전 그리고 고명으로 토마토 썬 것

 에이 이번에는 언니 글이 다소 짧네요, 늘 너무 길다고 툴툴대면서 며칠 동안 읽고 또 읽는 게 하나의 재미였는데.

 아 인왕산이 청계산보다 낮은 산이었구나, 그렇다면 분당에 불곡산도 꽤 좋더라고요. 제 해방구는 산인데 산 오르면서 마음의 찌꺼기를 함께 나누며 내려올 때는 망각하며 내려옵시다 그럼. 오 그 산은 망각의 산이겠네요!


 제가 좋아하는  요조 씨가 팟캐스트에서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어요. 누구도 30대, 40대의 인생이 좋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자신의 30대는 너무 즐겁고 행복하다고. 40대는 더 기대된다고요. 저는 스물여덟에게 그 삶이 지금보다 낫기를 간절히 바라며 묻는 스물다섯이긴 하지만, 항상 누군가 돌아가고 싶은 나이가 있냐고 물으면 지금이 제일 좋다고 합니다. 진짜 그래요. 나이가 들수록 조금씩 능숙해지는 느낌이 좋아요. 저는 어릴 때부터 생토마토와 두부를 안 좋아해서 엄마가 토마토 위에 달달한 꿀이나 설탕을 뿌려서 예쁘게 줘도 매정하게 먹지 않았고, 두부김치 집에 다 같이 가면 김치만 쏙쏙 골라 먹어서 같이 온 사람들이 그다음부터는 저를 빼고 가기 시작하더라고요. 둘 다 들어간 음식인 콩국수는 너어무 힘들었어요. 그럼에도 올곧은 우리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먹만 한 토마토와 두부와 콩국물을 늘 냉장고에 꽉꽉 채워두고 제 닭가슴살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게 만들곤 하세요. 그러다 보니 닭가슴살의 거처를 만들기 위해 토마토를 먹고 두부를 먹게 되더라고요. 지금은 점점 입맛이 담백해져서 여름 겨울 가리지 않고 맛있는 콩물을 사다가 국수를 말아 고명으로 토마토를 잘라 올려 먹곤 합니다. 사실, 그 중간에 제 입맛을 결정적으로 확 바꾼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요.


 스물 언저리에 혜원이와 내일로 여행을 떠났을 때 화순에 있는 혜원이네 할머니 댁을 거처로 삼고 그 근처를 돌아다녔어요. 한바탕 돌아다니고 어둑어둑해질 때, 저희는 진이 다 빠져서 할머니 댁으로 지역 명물 닭강정을 가득 사서 돌아갔는데 할머니가 콩국수를 해주신 거예요. 그때에는 제 콩국수 혐오도가 카레와 비등비등해질 즈음이어서 적지 않게 당황했었어요. 설상가상 같이 먹으려고 펼친 시장 닭강정이 생각보다 맛이 없었어서 더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라고요. 그렇지만 몸도 성하지 않으신 우리 소중한 할머니께서 콩국수를 넙적한 쇠그릇에 한가득 말아서 주시는데 어떻게 안 먹을 수 있겠어요. 그래서 '눈 딱 감고 먹어보자 맛있을 수도 있잖아' 다짐하고 국물부터 후루룩 떠먹어보는데, 세상에. 제 인생에 초콜릿 향 1도 없는데 그렇게 단 음식은 처음 먹어봤습니다. 설탕에 콩국을 말아주신 건가 싶을 만큼 정말 단 콩국수였어요. 순대나 회처럼 초장파와 쌈장파가 나뉘듯 콩국수도 소금파와 설탕파로 지역마다 나뉘는 음식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군산이 설탕의 도시였나요, 그건 전혀 들어보지 못했는데요. 혜원이랑 저는 입술에 하얀 콩국 자국을 내고 차마 삼키지도 못한 채 앞의 국수와 서로를 번갈아 보면서 난감해했어요. 그렇지만 난감함이 지나간 이후에는 꼭 먹어치우겠다는 강한 의지도 불타오르기 시작했어요. 할머니는 제가 댁에 도착하자마자 처음 보는 손녀딸 친구에게 세상에 없는 포옹으로 가족이라는 단어 자체가 되어주신 분이셨어요. 안아주시면서 "어이구 우리 손녀딸 사랑해. 사랑한다"라는 말을 귓가에 놓으시며 제 등을 토닥토닥해주셨을 때에는 눈물이 너무 많이 났어요. 진짜 뜨거운 눈물이 막 흘렀어요. 덧붙여 할머니는 "사랑한다는 말은 아끼는 거 아니여. 사랑해. 사랑해."라고 하셨어요.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의 따뜻함이 뭔지 궁금한 적도 없던 저에게 할머니는 여행보다도 더 큰 제 삶의 쉼이 되어주셨어요. 그런 분이 주신 콩국수인데 소태 국이건 설탕 국이건 무조건 다 마셔버려서 기쁘게 해 드려야겠단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요. 그렇지만 이내 깨끗하게 비우지는 못하고 자작하게 남겨버렸는데, 아직도 그게 후회가 돼요. 그때 그 달콤한 콩국수가 있었기 때문에 저는 지금 콩국수를 진짜 달달하게 먹을 수 있게 됐는데, 그냥 다 마셔버려서 머리에 써버릴 걸 왜 그랬을까요. 이제는 먹을거리가 다 떨어져서 장 볼 때가 되면 마트에 가서 꼭 맛있는 콩국물이 들어왔는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때 그 할머니의 웃는 눈가 주름이 떠올라요.


 어쩌면 어른이 되어 입맛이 바뀌는 건 맛에 추억이 가미되어서 그러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지금도 엄마는 거실에서 콩국수랑 먹을 김치전을 부치고 있는데요, 딸내미가 다이어트를 하든지 말든지 그녀의 밀가루 사랑은 식을 줄을 몰라요. 오늘은 스케줄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 엄마가 좋아하는 바밤바랑 비비빅을 좀 사 와야겠습니다. 이제는 제 최애 아이스크림이 된 비비빅은 조금 더 많이 사 올 거예요.


 1편인가 3편에서 언니가 추천해준 영화 '카페 벨 에포크'를 어제 보고 왔어요. 사람은 추억으로 산다는 말이 참 어울리는 영화였어요. 보는 내내 연출 기법만큼이나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영화가 끝나니까 머리가 지끈지끈했어요. 눈가에는 눈물이 범벅돼있었는데 불이 켜지고 옆에 있던 남자 친구가 "지원이 (대체) 왜 울어?"라고 물어봐서 뒤통수를 그냥 갈기고 싶은 충동에 산통이 깨졌습니다. 근데 그러게요 왜 울었을까요. 마지막에 늙은 아내가 카페에 들어올 때부터 저는 이국적인 우리 엄마 얼굴과 닮은 표정에 엄마의 처녀 때가 가늠되기 시작하면서 눈물이 나기 시작한 것 같아요. 두 사람의 기적같이 재현된 첫 만남 그 순간의 뭉클함과 현실의 엄마와 아빠가 겹쳐 보이기 시작하면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그렇게 영화 막이 내려지고 아쉽게도 먹먹함이 오래가지 않았지만요. 추천해주어서 고맙습니다. 프랑스 영화는 프랑스 영화예요 복잡 미묘하게 기분 나쁜 듯 간지럽게 설레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동정심이 생기는 희한한 감정의 소용돌이였어요.


 김치전 냄새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거실에 나갔는데 막상 마주하니 차마 먹질 못하겠어서 다이어트 셰이크 하나 만들어서 왔습니다. 좋아하는 사람 만나러 갈 생각에 매우 설레다가 막상 얼굴 보니 입도 못 떼고 오는 늬낌입니다.. 제가 먹는 [배칩이 들어있는 유산균 단백질 셰이크] 매우 맛있습니다. 자주에서 구경하다가 단백질 함량이 높고, 가격이 합리적이어서 샀는데 3통째 먹고 있어요. 그런데 왠지 김치전 냄새를 맡으며 셰이크를 먹으니 이긴 기분이네요? 이겼을 거예요 진 것 같지만 이겼어요 이겼겠죠. 비 오는 날 언니는 뭐가 생각이 나나요? 막걸리 좋아하는지. 저는 술은 대부분 안 좋아하는데 막걸리를 정말 좋아해요. 김치전에 막걸리 정말 맛있겠다. 아 이거 봐요 왜 맛있는 것들은 다 밀가루를 부르는 거죠? 으으으

 

 장마가 가실 기미를 보이지 않네요. 코로나도 가실 기미가 없어서 마스크를 소모품처럼 늘 쟁여뒀는데 이번에는 장화를 사야 하나 고민이 돼요. 당근 마켓에서 '헌터 부츠'를 키워드 알람 설정해놓고 "당근!" 소리가 나면 부리나케 찾아봅니다. 작년에는 비가 너무 안 왔어서 농부들 걱정이 됐는데, 이번에는 대대적인 홍수라 또 수재민들이 걱정되네요. 제가 10년 동안 살던 반지하집에서는 비가 많이 오던 날 별안간 자고 일어났는데 집에 발목까지 물이 들어차서 동네 사람들 다 불러 모아 다 같이 쓰레받기로 물 퍼내기 바빴던 시간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 집에 와서 처음 사람들을 초대했을 때 비 오는 날이 었는데 식기도 하면서 건조한 바닥에 앉아서 사람들과 둘러앉아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해 엉엉 울었던 게 생각이 납니다.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는 간절하게 바라는 꿈속에 살고 있나 봐요. 생각해보니 엄마랑 눅눅하지 않은 집에서 오손도손 김치전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도 엄청 큰 선물인데 내가 마다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이건 먹어야 해


P.S. 오늘 같은 날 떠오르는 노래를 추천합니다. 중학교 때 되게 좋아한 가수인데 역시 좋은 목소리는 유행을 타지 않아요.  해석된 가사를 같이 첨부합니다


Angel - Sarah McLachlan


당신은 다음 기회를 기다리느라 시간을 다 보냈죠

또 모든 것이 괜찮아질 그때를 기다리느라,

충분히 기쁘지 않은 데엔 언제나 한 가지 이유가 존재해요

그리고 하루의 끝자락에선 고단함을 느끼죠

저는 약간의 환기가 필요해요

오, 아름다운 해방감이요

혈관을 스미는 기억

나를 비워내어 무중력의 상태가 되게 해 줘요

그럼 아마 나는 오늘 밤, 평안을 얻게 될 거예요


천사의 팔에 안기어서

여기로부터 훨훨 날아가세요

여기, 어둡고 추운 호텔 방과

당신이 끝없이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그대는 그대의 잔잔한 몽상의 잔해 속에 잠겨 들어요

당신은 천사의 팔에 안겨있어요

그곳에서 안식을 찾게 될 거예요

엄마는 늘 나를 위해 부침개 끝을 바삭하게 태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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