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할게.
나 요새 쓸 거 없어.
사소한 좌절과 소박한 행복들로 꽉꽉 들어찬 요즘 내 일상에는 글이 될 생각을 할 만한 빈 틈이 없어.
다만 소설만을 편파적으로 사랑하던 내가 최근 들어 시집을 한두 권씩 찾아 읽게 된 점만큼은 적어둘 만한 일인 것 같아. 독자를 어떻게든 이해시키기 위해 문장에 문장을, 거기에 또다른 문장을 끝없이 덧붙여 책 한 권이 꽉 차도록 이어나가는 소설이란 장르가 언제나 딱 내 취향이었는데, 읽는 이가 이해하든 말든 알쏭달쏭하게 몇 문장 툭 던져놓고 뒤돌아서는 시의 도도함이 언제부턴가 문득 그리 매력적이더라. 어딘가 제목부터 그럴싸한 시집 한 권을 펼쳐서 시를 한 편 한 편 읽다보면 무슨 소린지는 통 모르겠어도, 그냥 잘 모르는 산책로를 타박타박 걸어가는 것처럼 그 분위기 자체가 풍경으로 아스라하게 남아.
요즘 내 생활의 풍경은, 끝을 모르고 놓여있는 수백 대의 컴퓨터를 파티션들이 미로처럼 이리저리 갈라놓고 있는 우리 회사 사무실의 풍경. 보안 때문에 창문 하나 없는 그 갑갑한 사무실 안은 아이러니하게도 온통 초록으로 꾸며져 있어. 사원들이 일하다 중간중간 쉴 수 있게 만들어놓은 쉼터, 복도를 걸어가면 자꾸 팔에 채이는 큼지막한 화분들, 영어로 fresh 어쩌구 하는 글씨들과 함께 가득 그려져있는 잎사귀 그림들... 그 사방의 초록빛 속에서 겪는 기묘한 답답함. 꼬박 6개월을 내일 뭐하지, 내일 뭐하지 하며 살다 이제 막 바빠진 지 겨우 한 달 좀 넘었는데 이젠 또 바빠서 힘들다 투덜대는 내가 귀여워. 뭐, 인생 원래 그런 거잖아? 그래도 역시 바쁘니까 재미도 있고 살맛은 나는데, 내 몸이 바쁜 새 내 사유의 공간은 더없이 한적하고 적막해있다는 걸 깨달으니 마음이 많이 안 좋더라. 하루종일 사무실 안팎에서 친한 친구들과 정신없이 울고 웃고 떠드는데, 나랑은 대화할 시간이 거의 없더라. 그렇게 과연 뭣이 중헌가, 매일 밤마다 생각해보고.
나도 음식 얘기 해볼까. 내 인생 최고의 음식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우리 할머니가 해주는 갈비야. 사실 말이 갈비지 할머니가 해주는 음식은 전부 환상이야. 어릴 때 난 키도 작고 삐쩍 마른 게 밥을 통 안 먹어서 할머니가 많이 속상해 했거든. 근데 LA갈비를 구워주면 내가 그거 하난 그렇게 잘 먹었던 거야. 손녀딸 끔찍하게 예뻐하는 우리 할머니는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나한테 밥을 해먹일 일이 있는 날이면 수십 년을 한결같이 갈비를 구우실 수밖에 없었지. 언제나 고슬고슬 윤기가 자르르한 흰 쌀밥에 다 먹고나면 항상 고기가 남는 소고기뭇국, 어떤 계절에도 싱싱한 배추김치와 아빠가 좋아하는 물김치, 할머닌 모르지만 내가 은근히 되게 잘 먹는 잡채와 고모가 좋아하는 곤드레나물, 할머니 손을 거치면 절대 쓴맛이 나는 법이 없는 도라지무침과 더덕구이 등이 항상 갈비 안 남기고 다 먹기를 방해하는 주역들이고 말이야. 그래선가, 그 왜소하던 아이는 고등학교 때부터 살이 붙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이렇게 누구보다 잘 먹는 어른이 됐지 뭐야. 내가 얼굴이 괜히 이렇게 빵빵한 게 아니야. 이게 다 갈비 때문이라고. 할머니의 꿈은 이루어진다.
나에게 할머니가 갈비와 쌀밥이라면 엄마는 채소와 현미밥이야. 내가 커서도 어릴 때처럼 쌀밥에 갈비만 먹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우리 엄마는 최고의 간호사지만 원래는 식품영양학과가 가고 싶었대. 아플 때 주사 놔주는 엄마가 있다고 하면 다들 부러워하지만, 사실 모든 밥상에 탄단지 식이섬유 이하 비타민과 철분과 무기질 등 각종 영양소가 하나라도 빠질까 걱정하는 걸 넘어서 식재료를 과하게 가열하거나 너무 잘게 썰어서 영양소가 손실되는 일이 없게 하려는 엄마야말로 진짜 강적이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난 이런 우리집 주방에는 먹을 게 없다고 항상 투덜댔었어. 그러다 건강을 위해 식이조절을 시작한 후부터 내가 어떤 계절에든 거의 매일 아침 제철 과일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 여느 마트가 부럽지 않을 만큼이나 다양한 샐러드 드레싱들이 우리집 냉장고에 있다는 사실, 카카오닙스나 비트가루, 달지 않은 그릭요거트나 거의 양주병 모양을 한 식용유 같은 구하기 힘든 건강한 식품들이 우리집에 잔뜩 쌓여있단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게 됐지. 이건 딴 얘긴데, 그래서 우리 엄마가 가끔 한 번씩 라면을 먹을 때면 되게 귀여워. 우리 가족 건강지킴이 이미지를 신경 써선지 사실 라면 되게 좋아하면서 어쩌다 한번 먹을 때면 꼭 약간 부끄러워하거든. 우리집에서 라면은 뭐랄까, 가족들이 제발 좀 먹지 말라고 말리는데도 꼭 한 봉지 끓여먹고 어김없이 배탈이 나고마는 아빠의 전유물 같은 그런 존재인지라. 그거 알아? 우리집은 무려 진라면 순한맛을 먹는 집이야. 이리도 나약한 한국인들이 근데 또 유럽 가서는 고추장을 그렇게 찾더라.
요즘 바빠서, 생각할 겨를이 없어서 글을 잘 못 쓴다던 처음의 말을 조금 수정해야 될 거 같네. 요즘 좀 바빠서, 글을 잘 안 써서 생각을 많이 안 하게 됐었어.
어제는 집 계량기에 불이 나서 온 집안이 정전이 됐어. 까맣게 타버린 계량기 사진을 가족 톡방에 올리면서 엄마가 남긴 감사하다는 멘트가 사진과 이루는 묘한 아이러니가 웃겨서 꽤나 웃었는데, 폭발해버린 계량기도 하나님이 준 거라서 감사하다는 엄마의 이상한 카톡이 왜 이리 머리를 떠나질 않는 건지, 쓰면서 한번 생각해볼까. 엄마의 믿음이 그만큼 성숙하고 대단해서라기보다, 그냥 엄마 자체가 이유인 것 같아. 저 말을 하는 엄마가 엄마라서. 묘하게 제멋대로인 띄어쓰기조차 엄마 거라서. 우리한테 하는 말인지 혼잣말인지 하나님한테 하는 기도인지 구분이 안 되는 애매한 말투마저 엄마가 하는 거라서. 아마 엄마도 마찬가지겠지. 큰 사고로 번지지 않아서 다행인 것도 있겠지만, 하루종일 집에 전기가 안 들어와도 감사하다 말할 수 있는 건 아마 우리가 있기 때문이겠지. 내가 갈비를 좋아하는 것도 할머니가 아니라면, 내가 채소를 잘 먹는 것도 엄마가 아니라면 아무 의미 없는 일인 것처럼.
이 사랑이 날 항상 어렵게 해. 가야 할 길이 있어도 사랑을 남겨두고는 떠날 수가 없어. 그 길이 더 큰 사랑을 찾으러 가는 길일지라도 말이야. 원래 사랑이란 게,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기에 의미 있는 법이잖아? 사랑을 억지로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사랑을 억지로 떠나지도 않고 싶은데, 어쩐지 항상 양쪽 모두에 실패하는 기분이야. 이 집을 떠나면 연기 자욱한 보일러실 문을 열고 시시로 폭발하는 계량기에 붙은 불을 수건으로 끄는 아빠의 용감한 모습도, 이 모든 일에 감사기도를 드리며 두 딸에게 침착히 상황을 설명해주는 엄마의 현명한 얼굴도 가까이서 보지 못하게 되겠지. 내가 당장 어디 떠나는 건 아니고, 알잖아, 뭐 그냥, 그렇다고. 난 여전히 계량기가 뭔지도 모르는 어린앤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