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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meralda Aug 28. 2020

당신의 절망을 찍어 죽이는 앨범, 한영애<샤키포>

한영애의 정규앨범 <샤키포(2014)>를 차근차근 들어봅니다.

수많은 시간이 지나가도 늘 같은 자리에 있는 나무처럼 아무리 흔들고 흔들어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그네처럼 내 사랑은 변하지 않아요 언제든 힘이 들 땐 뒤를 봐요 난 그림자처럼 늘 그대 뒤에 있어요

- 6번 트랙 [바람]


아, 골 때린다. 데뷔 45주년을 가뿐히 넘긴 대모에게 감히 이런 표현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노래 중간중간 육성으로 터지는 이 말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골 때리는 아티스트입니다. 그녀는 세련됐다가, 촌스럽다가, 웃기다가, 울컥하며 부드럽게 무너뜨립니다.   

샤키포 앨범자켓



이런 사람에게 이 앨범을 추천합니다


 퇴근길 집 앞에서 시원한 맥주를 들이켤 때의 그 분위기를 아는 사람

 사랑하고 미워하는 일에 지긋지긋하게 상처 받은 사람

 가요차트 경쟁에 지쳐 신선한 음색이 고픈 사람 




About the TRACK


01. 회귀

마녀가 돌아왔다. 그것도 웬 전자 기계를 날으는 빗자루 위에 가득 얹고서.


02. 너의 편

도입부의 전자음 소리부터 정말이지 골 때린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는 기분 좋은 촌스러움이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래 난 비밀이 있어, 사실 나는 너의 편이야' 이런 가사는 시대를 막론하고 실패가 없다. 세월의 고단함을 아는 윗세대가 주는 이런 따뜻한 말은 더더욱 따뜻한 격려가 된다. 또 가사를 힘주어 부르는 한영애의 창법은 나에게도 엄청난 도전을 심어준다. 녹음실에서 주먹을 쥐고 그녀만의 몸짓으로 리듬을 타며 부르는 모습이 그려진다. 실제로 그녀는 그렇게 불렀을 것이라 확신한다.

3분부터 반복되는 루프 ‘너의 편’부터는 2000년대 초반의 향수를 지독하게 불러일으킨다. 더해서 3분 27초쯤 나오는 브레이크도 참 예스럽고 촌스럽다. 빈티지라는 단어에 차마 담을 수 없는 촌스런 귀여움이 이 곳에 있다.

이 노래는 전체적으로 내가 옛날에 좋아했던 피비스 ‘예감’(2003)이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기타 스트로크가 지기장장- 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달리는 노래 중 기분 좋지 않은 노래는 없다. 어디론가 멀리 활주하고 싶은 욕망이 일면서 다음 트랙으로 넘어간다.


피비스


03. 사랑은 그래, 바다처럼

물고기에 비유되는 인생사는 항상 우리를 뭉클하게 만든다. 신해철의 그 물고기 노래처럼.

고기에 나의 삶을 빗대게 되는 이유가 그 바다의 깊음 때문일까, 아니면 처절하게 헤엄치는 그 모양새 때문일까. 클래식기타의 나일론줄이 내는 그 나른함 사이로 한영애의 올라간 입꼬리가 보인다. 어쩐지 이 앨범은 듣고 있으면 그녀가 녹음하고 있는 얼굴이 그려지는 신기한 일이 머릿속에서 벌어지는데, 삶의 복잡함 속에서 한영애의 미소 한 소절이면 현실의 분주함이 모두 다 괜찮아진다. 야, 심각해지지 말자. 나는 이 노래를 다 듣고 중얼거렸다.


04. 샤키포

완전 골때린다. 사이렌 같은 신스 사운드가 시작되는 순간 정말 7-80년대 만화영화를 보던 때로 회귀하는 것 같다. ‘태양을 향해서- 경계를 향해서-’ 가사와 함께 상행하는 멜로디 라인은 마치 태권브이 주제곡처럼 힘이 솟아오를 때를 연상시키다가, 샤키포! 샤키포! 외치는 순간 기분좋은 웃음이 터지면서 실제로 마법처럼 힘이 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앨범을 완청하고 인터뷰를 찾아보니 ‘샤키포’는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올 거야. 기적은 일어 날거야’라는 의미의 주문이라고 그녀가 직접 이야기 했다. '샤키포’라는 세상 낯선 단어를 저렇게 맛깔스럽게 발음할 수 있는 사람은 한영애밖에 없을 것이다. 한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맥 없이 툭 끊겨버리는 엔딩이다. 마치 어릴적 살던 고향에서 깨어나 갑자기 현실로 회귀한 느낌이 든다.  


샤키포! 하고 날라가도 손색이 없다.


05. 하루하루

빗소리 같은 브러쉬가 노래 뒷편에 깔려 있다. 그 질감이 다소 거칠게 느껴져서, 처음 듣기에는 많이 따가웠다. 생각 외로 한영애와 가장 잘 어울리는 악기는 코러스 보컬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우우’하는 여성 코러스를 사용한 것이 참 마음에 드는데 마치 고된 하루를 막 끝낸 풍경이 연상되며 그러한 줄거리에 어울린다. 퇴근하고 들른 라이브펍에 이런 목소리로 한영애가 노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그보다 더 뜨거운 위로가 있을까. 우리는 사랑할 수 없는 두려운 내일을 결코 미워하지도 못하며 오늘을 보낸다. '제발 나아져라 내 인생!' 하루하루 그렇게 푸념하고 애원하다보면 인생이 아니라 내가 나아져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노래는 ‘생을 변주한다’로 끝난다.


06. 바람

두번째부터 들었을 때는 인트로만 들어도 눈물이 났다. 노래에 비해 다소 무거운 베이스 킥과 브러시 밸런스가 마치 걷는 모양을 연상시키는데, 내 귀에는 꼭 같이 걷자는 소리처럼 들린다.

바람처럼 달빛처럼 그대로 변하지 않는 사랑을 기다리는 당신에게 이 위로를 바친다.


07. 안부

“좌알 지내고 있나효!” 아 첫소절에서 또 웃음이 터졌다. 한영애의 창법에서 묻어나오는 위트는 늘 기분 좋다. 지금껏 사랑하고, 미워하는 인생의 회전목마를 징글징글하게 올라탔다면, 이제는 내려와서 다시 그것들을 귀엽게 바라보자. 결국엔 다 똑같이 생긴 말이 똑같이 오르락내리락 하며 똑같은 곳을 뱅뱅 돌고있다.


08. 크레이지 카사노바

어딘지 모르게 더 도발적인 [담배가게 아가씨] 분위기가 난다. 시트콤 주제곡으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짜임새 좋고, 유머러스하고 당차다. 상상해보라 거침없이 하이킥의 가족들이 단체로 길을 마구잡이로 달리는데 이 노래가 나오는 것이다 “위!험!천만한 광기!~” 김병욱 감독이 한영애의 팬이기를 바란다. 이 노래가 마음에 든다면, 반드시 코뿔소(1988)을 들어볼 것. 당신은 분명 그녀의 2집 또한 좋아할 것이다.


1집에서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부족하다고 했던 한영애는 2집에서 부터 작사를 하기 시작했다.


09. 부르지 않은 노래

정규앨범에서 쉬어가는 노래로 적당하다. 물론 만든 가수의 입장에서는 어느 곡 하나 공을 들이지 않은 곡이 없는 것이 분명하나, 그들 또한 앨범을 구상할 때 ‘쉬어가는 곡’은 꼭 넣어놓는다. 잔잔히 한번 무릎을 접고 쉬게 해주는 간이역 같은 노래다. 아무 생각 없이 마음에 쭉 스며드는 것을 느낄 것.


10. 그림 하나

한영애는 자신의 목소리가 없는 음악을 ‘그림 하나’라는 이름을 붙혀서 마지막 곡으로 배치했다. 그 이유가 너무 궁금해서 찾아봤더니 ‘그 곡은 내가 컴퓨터 음악 프로그램을 배워서 처음으로 만든 곡이다. 프로그램을 배우고 나서 다루는 법을 잊어버릴까봐 얼른 만든 곡이다.’라고 인터뷰에서 답한 것을 볼수 있었다     

그 이후에 다시 앨범 자켓을 들여다보니 오른쪽 얼굴은 마치 컴퓨터 화면에 렉이 걸린 것처럼 크랙을 표현했다. [바람], [안부],[부르지 않은 노래]에서 느낄 수 있는 따뜻한 그녀의 미소와 함께 동시에 표현한 것 또한 앨범 색을 나타내려고 한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앨범 전체적으로 사운드나 짜임새가 탄탄하게 구성되거나 밸런스를 잘 맞춘 음악이라고는 보기에는 조금 어려울 수 있는 부분이 있으나, 요즘 세대의 음악과는 달라서 빚어지는 작은 차찰들이 더더욱 한영애답습니다. 이전에 한영애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던 젊은 청자들에게도 '한영애는 이런 사람이다' 하고 이 앨범을 내밀어도 손색이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젊은 세대에게 세련된 음악은 아닐 수 있지만, 이 시대에 ‘세련’ 라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촌스럽지 않은가 하는 원론적인 물음이 제게는 있습니다. 한영애는 반드시 첫 감상의 촌스러운 느낌을 참아내고 계속 들었을 때 오는 깊은 울림이 있습니다.  


작가의 Pick   

너의 편, 바람, 크레이지 카사노바

 

여전히 그녀는 한영애
마녀가 빌런이기를 포기하고 나같은 인생꼬마들을 보호하기 위해 빗자루를 들었다.
"샤키포! 샤키포! 다 행복해지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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