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류의 정규앨범 <우리에게 여름은 짧다>를 차근차근 들어봅니다.
오늘이 지나고서야 몸에 배어 버린 진심 아닌 어린 투정 하나둘씩 꺼낼 때 그대여 울지 말아요 붉은 내 모습과 아무것도 아닌 일 그렇게 또 익숙해졌지
- 2번 트랙 [한여름 방정식]
우리는 올해 처음 보는 낯선 여름을 만나 미처 만나서 반갑다고 반겨주지도 못한 채 많이 미워했다. 미안한 마음에 여름에 관련된 앨범을 리뷰해보자 하고 무수히 많은 앨범들을 중구난방으로 들었는데, 이상하게 재생목록에 넣지도 않은 신인류의 음악이 떠올랐다. 여름을 서슬 퍼렇게 보낸 이들을 데워주는 신인류의 음악을 들어보자
신인류는 올해 6월, 활동을 마친다는 짧은 글과 함께 작별을 고했다. 그래도 그들이 남긴 여름은 반짝인다. 함께 그 여름을 다시 추억해보자.
✔ 혼자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
✔ 웰메이드 드라마 주인공을 한 번쯤 꿈꿔 본 사람
✔ 여름이 지겹도록 힘겨웠던 사람
01. 우리에게 여름은 짧다.
긴 여름 끝에 낙엽을 발견한 벅참이 느껴진다.
02. 한여름 방정식
나는 어쩐지 이런 노래를 들으면 드라마나 영화가 생각난다. 이번에 생각난 작품은 <아일랜드(2004)>인데, 자유롭고 신비로운 캐릭터로 설정됐던 이나영의 모습이 그려지면서, 그녀의 하얀색 발레아쥬 머리를 흩날리며 막 달려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후에 더 자세히 떠올랐는데, 이나영이 끝없이 달려가는 데에 비해 남편 현빈은 그를 잡지 않고 가만히 보고 있는 듯한 장면이 교차되는 것이다.) 신인류의 노래는 대체로 이런 식이다. 음악이 주인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아스라한 배경음악이 되어주어 어떤 인물과 상황들을 눈앞에 그려지게 한다. 청자를 상상하게 만드는 아티스트는 최고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음악의 위치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03. 파랗게 질려버렸어
이 노래는 ‘질리고 싶다’라고 외친다. 싫어서든, 겁을 먹어서든 더 이상 이전의 기세가 꺾여버려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하는 모습을 우리는 ‘질린다’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 상태를 소망하는 사람은 어떤 현재를 살고 있어서 질리고 싶다고 말하는 것일까.
어, 잠깐 그건 나이기도..
곡의 중간쯤 이런 가사가 나온다. ‘많은 걸 알아버렸어’ 가끔 너무 잘 아는 것보다 조금 멀리 떨어져 적당히 모르는 채로 사는 것이 편할 때가 있다. 많이 아는 사람은 그 이상 깨닫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낯선 이에게 매료되어 모든 것이 궁금하던 시절이 있었겠으나, 이제는 더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워지곤 한다. 사람의 기억은 그냥 흘려지지 않는다. 살짝 닿았던 기억도 나중에 보니 파랗게 멍으로 변해서 그때에는 약하게 눌러도 고통스럽다. 그때에는 이런 신음이 토해지는 것이다 이제 그만 파랗게 질리고 싶다. 이미 전부 질려버렸지만 더 질려버리고 싶다.
'밤새 누구를 불러도 더 이상 원할 것 없는 그런 관계를 갖고 싶어.' 시간은 무를 수 없어도, 마지막으로 작은 소망을 말해본다. 그리고, 리듬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을 마주했을 때에 춤을 추는 것을 선택해보면 어떨까. 질릴 때까지 몸을 흔들어보면 세상이 조금 쉬워진다.
+ 신인류는 이 곡을 합주할 때 가장 신난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고부터는 들을 때마다 더 기분이 좋아진다.
04. 꽃말
정박자가 갖는 힘이 있다. 그 힘은 정직한 음색을 만나면 더 크게 빛나는데, 이 노래가 특히 그렇다. 하나의 앨범 안에서도 많은 시도를 해내 보이고 있음을 단번에 알 수 있는 유쾌한 곡이다. 리듬 변주가 이 전곡과 이 트랙에서 연속적으로 시도되었는데, 그것이 과하지 않고 센스 있게 잘 묻어지다가 또 비워진다.
05. 그런 하늘
5번 트랙쯤 되니 어딘지 모르게 주변에 있을 것만 같은 목소리인 것 같아 가만가만 생각을 더듬어 본다. 신온유의 보컬을 들을수록 신기한 것이, 강수지 같으면서 하수빈 같으면서 또 엄청 세련되다.(다음 곡에서는 심지어 [여름 안에서]를 부른 '서연'의 음색도 들렸다.) 신온유의 콧소리는 90년대의 음악과 그때 그 드라마를 연상케 하는데 크게 한 몫하고 있다. 보물 같은 보컬이다.
06. 안식처
벌써 모든 트랙을 돌았다는 것이 무척 아쉬워진다. 마지막 트랙은 가장 여름답고, 대중적인 곡이다. (‘대중적’이라는 말은 이번에 쓰고 다시는 쓰지 않을 단어이다. 이 말은 너무 잔인해서 많은 아티스트를 맥없이 죽이고 부정하기 때문이다. 대신 쉽고, 노래가 잘 들리고, 따라 부르기 좋다고 표현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이렇게 표현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청량한 기타 루프, 서핑하듯 시원하게 퍼지는 신스 사운드, 그리고 맑아서 훤히 다 비치는 음색까지 잘 버무려져 기분 좋은 여름이 되었다. 이 곡은 어쩐지 듣고 있다 보면 눈물이 왈칵 나왔던 개인적인 감상을 고하고 싶다. 이렇게 맑은 음색으로 모든 것이 당신 편이라고 말해주는데 어떻게 뭉클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겨울보다 더 시린 여름을 보내고 있는 사람에게 넌지시 건네고만 싶다.
신인류의 기타리스트 이지훈은 이렇게 말했다. “회색은 무난하기도 하고 잘 띄지 않는 색인데, 개성이 있어서 좋아한다." 다소 묘한 발언이다. 이 리뷰의 초고를 끝낸 이후에 계속해서 일상을 살아가며 신인류를 음미하다 보니 그 ‘회색’은 신인류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쏟아져 나오는 음악시장 속에서 신인류는 엄밀히 말하면 튀는 부류는 아니다. 한두 번 들었을 때는 다소 무난해서 언뜻 당신이 언젠가 한 번쯤 들어봤지만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그들만의 개성이 있다. 무난함 또한 개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 되어주는 이들의 푸르른 색채에 동료로서 감사한 마음이 든다.
괜찮다면 신인류의 가치관은 ‘잔잔함’, ‘무자극’, ‘미지근함’이라고 붙여주고 싶다. 앨범 내내 그들은 ‘너무 뜨겁지 않아서 행복한 우리입니다’ 하고 잔잔히 웃는다. 어떤 사람을 떠올리는데 시냇물이나, 조약돌이나, 노을이나, 뭉게구름이 떠오른다면 그것은 꽤 사랑하고 있는 모습이지 않은가. 무난하게 매혹적인 것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필자는 이번 앨범으로 신인류에게 천천히 파랗게 물들었다.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음에도.
작가의 Pick ✔
파랗게 질려버렸어, 안식처
신인류의 유튜브 채널에 들어가 보면, 퀄리티 높은 영상들이 꽤 많다. 영상 하나하나 신인류의 색채 그대로 잔잔하고 따뜻하게 녹아들어 있다. 느리게 흘러가는 장면들에 그저 멍 때리듯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질 것이다. 이제는 함께하는 모습을 볼 수 없지만, 그래도 그들은 짧은 시간 많은 보물들을 선물해 주고 갔다. (신인류 유튜브 https://youtu.be/l482LSkZVp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