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빗 [16]

by WLS

분노의 대상에 대해 숭고해지고 싶은 마음에 뒤이어 처참하리만치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뒤따라오는 것은 내게 있어 참으로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나는 너처럼 야비하지도, 비겁하지도, 이기적이지도 않다는 마음으로 우아하게 상대를 무시하고 나의 삶을 살겠다는 의지 뒤에는 상대가 어쩔 도리가 없을 만큼 모든 것을 잃고 슬퍼하고 후회하도록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이 한번에 들었다. 미워하는 상대일수록 더욱 그랬다. 그래서 내가 그 자식에게 그런 마음을 품었었나 싶다.

대개는 나는 숭고의 길을 택했다. 구도자도 아니고, 순례자도 아니며, 종교인도 아니지만-요즘 세상에서는 멸종위기에 처한 존재들- 분노도 에너지가 드는 일이기에 나는 다소 간 나를 슬프게 만든 사람들을 미워하다가 금세 잊고 내 삶을 충실히 살고자 했다. 그런데 그 자식만큼은 그게 너무 어려웠다. 매일 보는 그 얼굴. 매일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을 법적 조치를 취할 수 없을 만큼만 기분 나쁘게 하고, 화나게 만드는 그 저질의 술수에 여럿이 모여 분노를 표출하기도 수차례였다. 그 자식의 혓바닥 놀림으로 부서를 이동하거나 이동 당한 사람, 뜻밖의 승진을 하거나 승진이 막힌 사람, 회사와 협업할 견실한 회사 하나를 차려서 나간 사람과 쫓겨나듯 회사를 그만 둔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그 자식은 정말이지 어느 비 오는 날 밤에 어두운 골목 끝에서 집단 구타를 당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적도 많고, 어느 햇살 좋은 날 특진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본의 아니게 그 사람의 타겟이 된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그 자식이 그렇게 사는 것이 문제였을까. 어느 날부터 그 자식은 나의 옷차림, 애인 유무, 집안 재산 등에 깊게 코를 대고 폐부 깊숙히 냄새를 맡더니 여기저기에 내가 부잣집 자제이며(사실) 우리 회사에는 그냥 취미 생활로 다니고 있고(반은 맞고 반은 틀림), 로봇 애인만 세 대를 가지고 있다(실제로는 한 대도 없음)는 등 허무맹랑한 소리를 회사 전체에 퍼뜨리고 다녔다. 그의 단점이 여럿이겠으나 한 가지 대단한 단점으로 흡연자도 아니면서 입냄새가 꽤나 고약했기에-그는 간헐적으로 난다고 생각하지만 그를 마주치는 대부분의 순간에서 나고 있었다- 나는 왠지 그 소문이 더 역겹고 더럽게 느껴졌다.

굳이 상대를 하는 것은 내가 살아왔던 기조와 달랐기에 무시를 하고 다녔더니 그 입냄새 나는 소문은 더욱 무성해지기만 했다. 그의 추종자 또는 생각 없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들은 어느새 내가 곧 우리 회사와 손잡고 강(强) AI를 뛰어 넘어 모든 주도권과 결정권이 AI로 넘어가는 전(全) AI 개발 회사를 차린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로봇과 결혼을 앞두고 있다고 들었다며 축하한다는 이야기도 나에게 하고 갔다. 그 사람들의 로봇들이 사실 확인을 하기에는 내 개인 정보라서 접근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렇게 AI가 초고도로 발달한 사회에서도 오히려 개인정보로 사실 확인이 어려우니 이런 가짜 소문들은 과거와 다름 없이 여전하고, 아니 오히려 더 빨리 커지고 만연해졌다.

거품 낀 소문이 정점을 찍고 살짝 내려오던 어느 날이었다. 카페테리아에 있는 음료 스테이션에서 아이스 스파이시 레몬 주스를 내리고 있을 때쯤이었다. 이 공간을 익숙해하면서도 낯설어하는 남성 한 명이 카페테리아로 들어서서는 공간을 쭉 둘러보더니 내가 내리는 음료를 쳐다보았다. 빨갛고 노랗고 투명한 얼음이 조화롭게 내려진 나의 스파이시 카라멜 레몬 주스.

"그거 맛있어요?"

"예?"

"그거. 음료 이름이 뭐예요?"

"스파이시 카라멜 레몬 주스요. 아이스."

"오, 우리 팀원도 그거 얘기하던데. 마시면 스트레스 풀린다고. 나도 한 잔 내려줄 수 있어요?"

"아, 네. 아이스로 드려요?"

"아이스가 맛있어요?"

"무조건요."

"그럼 아이스로 하나 부탁해요. 한번도 안 먹어 봐서 어떻게 만드는지도 몰라요."

남성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내 음료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직전 음료' 버튼을 한 번 더 누르고는 음료가 제조되는 곁을 지키고 있었다. 특별히 구경할 거리가 있는 것 아니지만 컵에 얼음과 음료를 채워지는 모습만으로도 왠지 재밌고, 내가 일 하나를 처리하고 있다는 마음이 들어 좋기도 했다. 기다리던 와중 남성이 말을 걸어왔다.

"무슨 팀에서 일해요?"

"아, 저 R&D팀에서 일합니다."

"음료도 잘 뽑으시는데 우리 회사 핵심 팀에서 일하고 계시다니 엄청난데요?"

"아, 그런가요. 팀은 그래도 저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팀에서 일하시는데요?"

"저는 경영팀에서도 하고, 인사팀도 좀 하고, 마케팅도 좀 하고 그러고 있습니다."

"아, 플렉서블(flexible) 팀이 생겼다더니 그쪽에 계신가보네요. 거기가 더 핵심이잖아요. 회사 사정도 빤히 알고 있어야 하고."

"에이 그래도 R&D만 할까요? R&D 없으면 우리 다 길에 나앉아요. 로봇도 없이."

로봇도 없이 길바닥에 나앉는다니. 우리 시대에 가장 가난하고 피폐한 삶이다. 로봇 없이는 삶에서 어떤 케어도 받을 수 없고, 어떤 소통도, 관계도, 본인 인증도 할 수 없다. 과거 스마트폰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음료 스테이션을 보더니 고개를 살짝 까딱하며 가리켰다.

"다 됐네요."

그는 음료 스테이션에 다가와서는 음료를 꺼냈다. 한 모금 들이키더니 미간을 있는대로 찌푸린다.

"으아, 이게 뭐야. 맵고, 시고. 이게 왜 유행이에요?"

"로빗 인공지능이 현 시대 젊은 층의 니즈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만든 레시피니까?"

"역시 핵심 인재 맞다니까요."

"하하 그런 걸로 하죠."

"그래서 말인데, 마케팅 쪽도 같이 일 해볼 생각 있어요?"

"네?"

"여태까지 R&D하면서 우리 로빗들 팔 때 어떤 점을 부각해야 할지 만들면서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어차피 아버지 회사 들어가면 마케팅은 기본으로 알아야 할텐데."

"아버지 회사요?"

그 남자는 눈을 반짝이며 눈만 찡긋 거리고는 계속 나를 쳐다 보았다. 내 소문을 듣고 온 건가? 나는 순간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를 쳤다. 어쩌면 결계와도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벽. 나에 대해 소문으로 듣고 온, 진짜 내가 아닌 가짜 나를 알고 온 사람. 잔뜩 기대를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색안경을 제대로 끼고 온 건지 모를 이 사람. 다짜고짜 찾아와서는 이게 무슨 결례지?

"소문 듣고 왔어요."

이 당당함은 또 뭐야.

"그 소문 가짜도 많이 섞여있어요. 뭘 어디까지 어떻게 듣고 오셨는지는 몰라도 그런 소문에 기반해서 제안하시는 거라면 거절하겠습니다."

"소문만은 아닌데요."

"그럼요?"

"그 음료 레시피 만든 거 누구 아이디어였어요?"

"아."

"음료 레피시 젊은 층 공략해서 무료 베타 버전으로 미리 배포해보고, 로빗들이 각 사용자가 갈증을 느낄 때쯤 제안하는 말 출력하도록 한 사람은 누구고요? 저 다 알고 왔어요. 물론 소문이 좀 더 흥미를 돋구기는 했지만. 어차피 아버지 회사 물려받으려면 우리한테서 더 배우고 가야죠. 같이 하시죠."

누군데 저렇게 다 알고 있는 걸까. 내가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서는 쳐다보기만 하자 그 남자는 뭔가 실수했다는 듯 컵을 잡은 두 손 중에 한 손을 다시 뗐다 붙이며 박수 치는 듯한 모션을 보였다.

"아 맞다. 내 소개 안 했죠? 저 로빗 만든 사람. 로봇 로빗 말고, 회사 로빗. 얼굴을 안 밝히고 다녔더니 모를만도 하지."

"예, 회장님이시라고요?"

"아니, 그런 말은 너무 거창하고. 아무튼 그럼 같이 하는 걸로 알고 저는 우리 팀에 자리 하나 마련해놓고 있을게요."

"아니, 저."

"해보면 재밌을 거예요."

그는 빨대로 스파이시 레몬 주스를 쭉 들이키며 뒤돌아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갔다. 나는 멍하니 카페테리아의 테이블에 기대있다가, 꽤나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자식의 소문이 흥미로운 쪽으로 끌고 가기도 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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