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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세피나 Aug 21. 2024

여름방학

집 밖을 나서자마자 후텁지근한 공기가 밀려왔다. 짐가방을 끌고 서울역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에 땀이 쭉 나는데 매일 드나들던 지하철 출입구가 공사 중이란다. 건너편으로 가려고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연신 속으로 '덥다 더워'를 돼 내고 있다. 지하철을 타러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길에는 땀구멍이 열려버렸는가 이마와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나만 이러고 더운 건가?' 그리곤 냉장고에 비우지 못하고 온 양배추와 어묵 한 봉지가 생각났다.


서울역에 도착해 동대구행 기차를 탔다. 동대구역에 도착해 동대구역터미널로 이동해 집으로 가는 버스표를 끊고 보니 출발 5분 전. 시작부터 연착이더니 이럴 줄 알았다며 급할 것이 있냐며 50분 후 출발하는 다음 버스를 타기로 했다. 더 이상 손님을 태울 계획이 없던 버스는 나를 동네 터미널 앞에 내려줬다. 엄마는 덥다며 택시를 타라고 했지만 고만고만한 동네에서 무슨 택시냐며 짐가방을 끌고 걸어서 집으로 향했다. 오후께 고향 동네는 한산했고, 길가에 있는 작은 텃밭에서 가지며, 콩이며 집집마다 자급자족하기 위한 작물들이 심겨져있었다. 보라색과 흰색으로 피어있는 도라지 꽃 사이에 아직은 피지 않은 꽃몽우리를 손으로 터트렸다. '뽁'소리를 내며 터지는 소리에 이제는 기억도 잘 안나는 어릴 적, 아빠의 고향 도라지밭에서 눈썰매를 타던 장면이 스쳤다. 청명한 하늘과 따가운 햇빛, 습기 없이 더운 날 그 자체로 기분이 좋았다. 서울을 벗어나 고향 집에서 여름방학을 보내기로 한 것은 잘 한 선택이라 나를 칭찬했다.


도시에서의 여름은 아침 9시 네모난 시멘트 건물에 들어가 6시가 되어 나오기까지 에어컨 바람 속에 하루가 지나고, 출퇴근 길에 부딪히는 사람의 열기 속을 지나 집으로 돌아온다. 바람 한 점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열대야로 밤새 잠을 뒤척이는 날들로 몇 주가 지나고 나면 어느새 가을이 쑥 하고 다가온다. 그렇게 한 계절이 지나고 보면 올해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하며 한 살을 먹고야 만다. 체감상 제주도보다 더 먼 동해안의 작은 동네까지 오려면 어떤 수단을 이용하던 매번 하루를 다 보낼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나는 여름만 오면 컴퓨터 앞에 앉아 이곳을 그리워했다.


최근에 친구와 대화를 나누면서 모든 것이 싱그러운 여름이 너무 좋아졌다던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우리가 늙어버려서 젊고 생기 있어 보이는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사실은 여름과 함께 나도 힘이 나는 것만 같아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동쪽으로 난 고향집 방 창문으로 눈이 부셔 서서 잠에서 깰 수야 밖에 없어 길고 긴 하루를 매일 보내겠지만, 여름 햇볕에 검게 그을려서 촌스럽기 그지 없어지겠지만, 이 여름방학이 끝나고 나면 나는 또 먹고사는 고민을 시작해야겠지만 지금 이런 하늘과 햇빛과 공기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가 생겨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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