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트루 Mar 02. 2019

<드래곤 길들이기3>익숙함을 떠나 새로움을 마주하는 법

그렇게 소년은 어른이 된다.



*엄청난 스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2019년 1월 30일, 드디어 그 녀석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날. 

예상했던 대로 난 눈물을 참지 못한다. 

그렇게 난 스크린 속 그 녀석에게 안녕을 빌며 상영관을 빠져나온다.



3부작의 막을 내리다


‘좋은 영화는 그만큼 힘이 있다.’ 몇 편의 시리즈를 상영하며 마지막 편까지 몇 년이 걸린다고 해도 그걸 기다리는 관객이 있다. 관객은 그 영화의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고 영화는 영원히 가슴속에 남으며 누군가의 인생을 흔들어 놓을 정도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렇게 각자 저마다에게는 한 편의 영화가 있으며 나의 경우, 내 가슴속에는 '드래곤' 한 마리가 살아 있었다.


2010년 5월  <드래곤 길들이기>를 시작으로 2014년 7월에 <드래곤 길들이기 2> , 2019년 1월  <드래곤 길들이기 3>을 끝으로 9년이란 대단원의 마무리를 지었다.


<드래곤 길들이기 3>는 그렇게 9년 동안 이 시리즈와 헤어질 마음의 준비가 안된 팬들에게 야속할 정도로 인사를 정중하고 깨끗하게 했다. 개인적으론 군더더기 없었으며 9년에 걸친 시리즈를 완성한 그 자체만으로도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고 본다. 물론 마지막 시리즈였던 만큼 아쉬운 부분이 가장 많은 작품이지만, 제 아무리 아쉬운 들 어떠하랴. 이미 나는 무한한 박수를 보냈고 그들은 박수 칠 때 잘 떠났다. 

내가 이 영화를 9년 동안 기다리고 마주하며 주인공들과 함께 어른이 됐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영화가 단순히 드래곤과 모험이란 내러티브 그 이상의 무언가를 전한다면 당신도 이 영화를 정주행 할 생각이 있겠는가?  


위대한 성장 서사


<드래곤 길들이기 3>를 보고 나오며 우는 나에게 말한다. 

“다 큰 어른이 애니메이션이나 보고 우냐.” 


영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 생각하지도 못한 전개로 흘러가는 것을 직감하며 등장인물들과의 이별을 마주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인간과 드래곤이 영원히 공존할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커다란 스크린 속에서 마주한 이별의 순간에 너무나도 가슴이 먹먹했다. 내년이면 앞자리가 ‘3’으로 바뀌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난 아직도 애니메이션을 챙겨 본다. 애니메이션과 어른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건 애들이나 보는 거라고. 

하지만 등장인물이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서술 방식과 표현 방법의 정도에서 차이가 날 뿐, 일반 성인 영화와 별 반 다르지 않다. 애니메이션은 말 그대로 만화 ‘영화’이며 아이들이나 볼 법한 만화 영화에도 웬만한 성인 영화 못지않은 사랑, 이별, 배신, 절망, 희망 등 삶의 필수 요소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적어도 그 영화가 주는 질문과 교훈은 절대로 유치하지 않다. 그리고 절대 가볍지도 않다. 오히려 애니메이션이라는 이면에 숨겨진 메시지를 곱씹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리고 대표적으로 <드래곤 길들이기>가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다.


<드래곤 길들이기>를 보고 나서 첫 번째 반응은 '진짜 재밌네', 한 번 더 보고 반응은 '이거 애니메이션 맞아..?' 


9년이란 긴 대장정에 걸맞게 주인공 히컵과 투슬리스는 점차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바이킹 족장 스토이크의 아들인 히컵은 장차 그 뒤를 이을 운명이지만 자신과는 맞지 않는 자리라고 생각하며 거부한다. 바이킹 족은 늘 드래곤과의 전쟁을 벼루고 있는데 히컵은 이러한 전쟁에 선두로 나설 힘을 갖고 있기는커녕 생각 조차 없다. 힘보다는 지식을 지양하며 오직 잡다한 발명에만 몰두하는 히컵은 그렇게 바이킹 무리에서 도태된다. 그러다 숲 속에서 우연히 만난 투슬리스는 어딘가 그와 비슷하다. 드래곤이지만 혼자서 하늘을 날 수 없어 무리에서 도태된 투슬리스는 마치 히컵과 닮았고 그 둘은 점차 서로를 이해하며 마음을 열고 교감한다. 바이킹 족과 원수지간인 드래곤, 그 아슬아슬하고 비밀스러운 둘 만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한쪽 꼬리가 없는 투슬리스를 위해 히컵은 그의 안장과 연결하여 꼬리를 만들어주고 그의 등에 올라타 함께 비행 연습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 하늘을 날게 된 둘은 행복과 자유를 맛본다. 그렇게 시작된 히컵과 투슬리스의 위험천만한 모험과 아름다운 우정은 바이킹 족의 마음을 돌리며 그들이 살고 있는 버크 섬을 드래곤과 함께 사는 지상낙원으로 바꾼다. 회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교묘해지고 악랄해지는 악당인 드래곤 헌터들에 맞서 싸우고, 잃어버린 히컵의 엄마 발카를 찾아 가족애를 느끼며 함께 악당도 물리친다. 그리고 <드래곤 길들이기 2>에서 그의 아빠이자 바이킹 족의 족장인 스토이크가 죽게 됨으로써 진정한 리더와 화합에 대해 깨우치기 시작한다. 1편은 히컵과 투슬리스의 만남으로 다른 종족 간의 화합과 우정을, 2편은 진정한 리더와 그 자격에 대한 고찰 마지막 3편은 히컵과 투슬리스의 마지막 여정을 통한 헤어짐의 미학을 통해 히컵과 투슬리스가 결국 어떻게 '성장'하는지 보여준다.


드림웍스, 틀을 깨다


이러한 '성장'이라는 패러다임은 <드래곤 길들이기>에서는 단순히 주인공이 악당을 물리치고 평화를 가져온다는 고리타분한 설정에 국한되지 않는다. 드림웍스는 <드래곤 길들이기>를 통해 불완전한 주인공이 새로운 의미의 완전함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관객들에게 매우 신선하게 제시한다.

1편에서 주인공 히컵은 투슬리스와 함께 싸우다 화염 속으로 떨어져 한쪽 다리를 잃는다. '주인공의 다리 절단.' 웬만한 애니메이션에선 주인공의 신체 불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한쪽 발에 의족을 차고 등장하는 주인공 히컵의 모습은 가히 새로운 충격이었다.  


의족을 찬 주인공. 투슬리스와 똑같이 불완전한 존재가 되었으나 이는 새로운 완전함을 향한 도약이다.


디즈니의 <업>처럼 점점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을 단순히 공주나 왕자, 이쁘고 귀여운 캐릭터에서 벗어나 백발의 노인으로 설정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한다고 하지만 주인공이 그것도 극 중 결말에서 다리를 잃게 되는 건 애니메이션 기존의 틀을 깼다고 본다. 물론 이 조차도 속편을 위한 감독의 큰 그림이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적잖이 충격을 받을 뻔했다. 그리고 우리는 대체 왜 드림웍스는 주인공을 한쪽 발이 불편한, 한쪽 발이 없는 불완전한 사람으로 남겼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또 하나의 불완전함을 가졌던 투슬리스가 히컵을 만나 서로 어떠한 시너지를 내뿜고 어떠한 과정을 통해 그 둘이 완전함을 지향하게 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 과정을 잘 이해해야 <드래곤 길들이기 3>에서 결국 히컵과 투슬리스가 '헤어짐'이라는 얼마나 중대한 결정을 내렸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함과 불완전함, 그 미묘한 사이


1편에서 히컵은 다리 한쪽을 잃고 불완전하다. 투슬리스 또한 꼬리 한쪽이 없어 혼자선 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하지만 불완전한 인간과 불완전한 드래곤의 만남과 화합은 결국 완전함을 향해 도약할 수 있는 하나의 발판을 마련하고 둘은 함께 비상한다. 서로 교감을 통해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나가며 바이킹 족과 드래곤이 어울릴 수 있다는 비전을 제시하며 새로운 이상향을 제시한다. 이렇게 그 둘은 점차 완전해지며 완전체를 이뤘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게 1편, 2편 심지어 3편까지도 히컵은 평화를 중시하는 새로운 타입의 족장으로 거듭나고 발전하며 성장한다. 투슬리스와 함께 새로운 비행 훈련을 하며 새로운 무기도 발명하고 마을과 드래곤들의 평화를 위해 고군분투한다. 보통의 애니메이션이라면 이렇게 주인공, 사람의 성장과 내면에 집중하지만 <드래곤 길들이기 3>에서는 투슬리스에게도 집중한다.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투슬리스의 성장과 자유. 왜 투슬리스가 평생 히컵과 함께 하늘을 날며 바이킹들과 함께 살거라 단언했을까? 투슬리스를 노리는 드래곤 헌터들에게만 벗어나면 그는 자유로운 걸까? 과연 히컵과 투슬리스는 정말 완전한 존재이자 완전한 관계를 이룬 걸까?


마지막 시리즈인 <드래곤 길들이기 3>에서는 여태까지 주를 이뤘던 애니메이션 속 악당과의 싸움을 통한 권선징악이라는 교훈에서 벗어나 좀 더 한 차원 높은 질문을 던진다. 온전히 히컵과 투슬리스 둘 사이의 관계와 갈등. 그 갈등을 넘어 진정한 공존의 의미와 헤어짐에 대한 미학을 생각하게 하며 진정한 우정과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제시한다. 


늘 히컵을 태우고 전쟁을 나가거나 비행을 하던 투슬리스. 그는 정말 자유로울까?


<드래곤 길들이기>의 감독 딘 데블로이스는 마지막 시리즈를 통해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서로 의존하던 대상이 있었는데, 그 상대가 사라진다면 당신은 어떤 존재가 되는가? 

나를 정의하기 위해 필요하던 존재가 사라진다면, 당신은 여전히 가치 있으며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간인가?

당신이 무심코 본 애니메이션에 이러한 질문들이 숨어져 있을 거라고 생각이나 해봤는가?


관계


흔히 알고 있는 '친구'는 기본적으로 대등한 존재이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공평한 관계. <드래곤 길들이기 3>에서는 그 '관계'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을 던진다.

<드래곤 길들이기 3>에서 투슬리스는 자신과 똑같은 종족을 발견한다. 오직 자신만 남았을 거라 생각했던 투슬리스는 색깔만 다른 '라이트 퓨어리'의 등장으로 자신의 '자유'와 '존재'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히컵과 투슬리스는 점차 다른 이상향으로 인해 갈등에 휩싸인다. 


라이트 퓨어리의 등장. 투슬리스는 히컵이 아닌 다른 세상을 발견한다.


서로가 서로를 길들이며 둘에게 익숙했던 히컵과 투슬리스 앞에 나타난 라이트 퓨어리는 뜻밖의 챌린지였다. 오히려 <드래곤 길들이기 3>에 나오는 악당인 '그림멜'의 악한 영향력이 다소 약하게 느껴졌던 이유도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편에서 히컵과 투슬리스의 진정한 갈등은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그 둘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투슬리스는 라이트 퓨어리를 통해 히컵이 아닌 자신의 종족과 함께 꿈꾸는 미래를 깨닫게 된다. 히컵 또한 이를 통해 깨닫는다. 투슬리스도 만의 자유가 필요하며 언제까지나 같이 없음을. 그리고 자신이 투슬리스에게 많이 의존했음을. 그렇기에 보내주기 힘듦을.


잘 생각해보면 <드래곤 길들이기 3>의 시작은 2편의 시작과는 조금 달랐다. 여전히 드래곤과 바이킹 족은 평화롭기는 하지만 버크 섬은 말 그대로 넘쳐나는 드래곤들을 감당하지 못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이로 인해 바이킹 족은 서식지를 잃을 위기에 처하고 사람들도 이러한 위기를 느끼지만 히컵은 이를 외면한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드래곤들을 구해 버크 섬에 데려오기 일쑤이다. 하지만 그렇게 모여드는 드래곤들이 있다면 이들을 잡으려는 드래곤 헌터들도 존재하는 법. 드래곤들이 바이킹족과 함께 영원히 사는 이상,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1,2,3편을 통틀어 악당들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버크 섬의 드래곤들을 쟁취하기 위해 전쟁을 하는 것. 


그런 히컵에게 악당과 더불어 투슬리스를 보내줘야 한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들다. 그 이유는 투슬리스에 대한 우정과 헤어짐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만 사실 투슬리스 없이 히컵 그 자신도 아직 불완전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투슬리스 없이는 전쟁에서 절대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투슬리스 등에 안장을 채워 비행을 하고 전쟁을 하는 순간, 그 둘은 사실 미묘하게 대등한 관계라고 보기 힘들어진다. 투슬리스는 히컵을 만나고 오직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며 비행한다. 히컵 없이는 혼자 날 수 없기에 그는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이자 히컵과 대등한 관계라고 볼 수 없다.

이미 이러한 사실을 <드래곤 길들이기 3>가 시작할 때부터 인간과 드래곤이 함께 사는 것임 힘듬을 보여주면서 히컵과 투슬리스의 이별을 예고했다고 볼 수 있다. 버크섬이 드래곤들을 감당하기 어려워진 것은 진정한 공존의 의미와 헤어짐의 미학을 이야기할 차례가 되었다는 것이다.


헤어짐의 미학


2편에서부터 이미 투슬리스는 누구나 다 아는 드래곤의 왕이자 알파이다. 그에겐 히컵처럼 그가 책임져야 할 부족이 있다. 그리고 히컵은 그것을 결국에는 받아들인다. 투슬리스에게는 라이트 퓨어리와 드래곤들이 있고 그만의 세상이 있음을 받아들인다. 악당 그림멜을 결국 무찌르고 되찾은 평화 속에서 히컵과 투슬리스는 진정한 평화를 선택한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순수하고 평화로운 드래곤들만의 세상, 히든 월드.


드래곤들과 인간의 진정한 화합과 공존 그리고 평화. 그것은 버크 섬이 아닌 다른 곳에 있음을 확신한다. 바로 "히든 월드." 인간의 세상에선 발견할 수 없는 미지의 드래곤만의 세상. 그곳으로 히컵은 투슬리스와 드래곤들을 보내기로 결심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가 끝끝내 피하려 했던 '이별'을 마주한다. 그리고 투슬리스에게 더 이상 자신이 없는 세상에서도 혼자서도 날 수 있는 꼬리를 선물한다.


그런 투슬리스를 떠나보내며 히컵은 말한다.

"아직 세상은 드래곤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있어."라고.


히컵은 자신이 투슬리스 없이는 불완전하다고 생각하기에 그를 붙잡고 싶어 하던 마음을 친구라는 대등한 관계에서 다시 돌아본다. 그리고 투슬리스와의 진정한 친구라는 관계와 공존의 의미를 되새긴다. 어느 한쪽의 희생은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 히컵의 시선에서만 날던 투슬리스는 이제 그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살기 시작했고 그러한 투슬리스의 행복과 안녕을 진심으로 빌어줄 때 히컵 또한 완전한 인격체로 성장한 것이다. 

그들에게 헤어짐은 완전한 이별이 아니다. 새로운 출발이자 진정한 관계의 시작인 것이다.


그렇게 투슬리스와 드래곤들은 떠나게 되고 인간들에겐 전설의 존재로 남게 된다. 익숙함을 떠나 새로움을 마주하는 힘. <드래곤 길들이기 3>에서 히컵과 투슬리스는 비로소 그것을 깨달았으며 불완전에서 완전함으로 성장하고 진정한 친구로 거듭났다.

가야 할 때를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과 보내줄 때를 알고 보내주는 이의 뒷모습이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히컵과 투슬리스의 이별. 그 이별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보여준다.


누구나 가슴속에 드래곤 한 마리씩은 있다


<드래곤 길들이기 3>는 전작들에 비해 악당과의 전쟁 씬이라던가 긴장감 그 자체는 다소 떨어진다. 하지만 그만큼 주인공들의 내면에 집중하게 만든 내러티브는 이들의 우정과 관계 그 자체에 깊은 울림을 선사하는 데 훌륭한 역할을 한다.  

애니메이션은 교훈의 주제가 뚜렷하고 단순하다. 그렇기에 오히려 그로 인해 잊고 살았던 것을 간단하고 명료하게 알려준다. <드래곤 길들이기 3>는 간단명료하게 '관계'와 '헤어짐'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영원한 공존과 진정한 관계에 대한 서사시.


누구나 가슴속에 드래곤 한 마리씩은 있다. 그 드래곤은 서로 의존하던 상대이다. 그 상대가 사라진다면 당신은 어떤 존재가 되는가? 사람일 수도 있고, 사람 이외의 다른 것일 수도 있는 삶의 이러한 요소는 사실 '나'라는 사람을 정의 내리기 위해서 우리가 움켜잡았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만일 나를 둘러싼 그것들이 사라진다면? 당신은 여전히 가치 있으며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인가?

결국, 이것이 나라는 존재를 정의 내리는 것이라는 믿음에 처절하게 손에 쥐고 놓지 않는 대신에, 놓아주는 것에는 대단한 힘과 성숙함, 그리고 깨달음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그것을 깨닫고 필요로 하는 것들과 필요로 하는 사람들 없이도 삶을 마주하고 미지의 세계로 들어갈 용기를 갖는 것. 헤어짐의 미학을 깨닫고 스스로 성장하며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그것에서 매우 훌륭한 내러티브가 있으며 이것이 <드래곤 길들이기 3>에서 나타나는 매우 중요한 스토리 구조가 되는 것이다. 

이걸 깨닫는다면 당신은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 있다. 지금 당신 주위에 있는 관계는 얼마나 대등하고 그 관계가 어떻게 지속되며 얼마나 의존적인가? 그리고 그 관계를 형성한 상대가 없다면 당신은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 당신은 변화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는가?


그리고 당신은 대답할 수 있게 된다. '헤어짐'도 관계의 한 부분이라고. 헤어짐은 영원한 이별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을 위한 도약일 수 있다고 말이다.  <드래곤 길들이기 3>는 이렇게 ‘관계’에 대한 내러티브를 보여줬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작품이다. 단순히 그들의 헤어짐에 슬퍼해 울었던 나에게 이 영화는 새로운 대답과 위로를 던져주었다. 헤어짐은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고. 번데기에서 나와 스스로 나비가 될 수 있는 기회라고. 그리고 내 가슴속에 드래곤은 언제나 영원할 거라고. 그러니 당당히 서로를 마주하고 각자의 안녕을 빌어주자고.




매거진의 이전글 Frankenstein,네가 알던 괴물이 아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