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를 두려워하는 게 실수입니다.
월요일 출근길,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몸이 피곤하다. 축 늘어진 몸을 간신히 다독이며 도착한 회사.
팀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다. 멀리서 대리님이 살짝 굳은 표정으로 다가온다.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된 걸 느낀다.
“저번 주에 교재 수정본 마지막 검토자가 트루 씨인가요?”
“아 네, 뭐 문제 있나요?”
“음, 큰따옴표 하나가 빠져서요.”
큰따옴표 하나가 없다. 있어야 할 게 빠져버렸다. 별거 아닌 거 같지만 학생들이 보는 교재를 만드는 우리 입장에서는 절대로 별일이 아니다. 컴플레인을 걸어올 학부모들의 목소리가 이미 귀에 들리는 듯하다. 급하게 바로 담당 인쇄소에 전화를 걸어 진행 과정을 물어본다.
마음속으로 수십 번 '제발'을 외친다. 이미 백 부 정도 인쇄했다는 말에 순간 사고가 정지된다. 화장실로 가 변기 위에 앉아 얼굴을 감싸 안고 한숨을 푹 쉰다.
여기, 월요일이 싫은 이유 하나 더 추가요.
다행히 맘씨 좋으신 인쇄소 사장님의 은혜로 추가금을 내지 않고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전화로 계속 사과드리며 감사하다고 말하는 나에게 사장님은 별일 아니라며 나를 위로한다.
“일하다 바쁘면 그럴 수 있죠. 다행히 몇 부 안 되는걸요. 앞으로 더 주의하면 돼요. 이런 일 종종 있어요.” 특유의 덤덤한 목소리로 건네는 위로가 오전 내내 졸아있던 나를 녹여준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실수하는 내가 너무나도 싫었다. 사실 단 한 번도 내가 완벽주의자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본 적도 없었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내 주변에는 온통 따뜻한 사람들뿐이었고 그 누구도 실수에 대해 인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회생활은 많이 달랐다. 실수하면 따뜻하게 안아주고 보듬어주는 사람들보단 훈계하고 지적하며 눈치를 주는 사람들 투성이었다. 신입사원 시절, 실수를 하면 그저 너털웃음을 지으며 넘어가 준다. 하지만 어떻게 실수를 한 번만 하겠는가. 이 직업이 처음인데 당연히 또 실수할 수밖에 없다.
실수를 한 날은 도저히 일에 집중이 안 됐다. 내가 저지른 실수를 처리하는 걸 보면서 혹시나 나의 월급이 감봉되진 않을지, 인사팀에서 날 해고하진 않을지 등 오만가지 생각에 빠졌다.
매일 출근길과 살얼음길을 동시에 걸었다. 미끄러지면 정말 끝이라고, 마치 절벽 끝에 서 있는 것처럼 나를 몰아갔다.
실수라도 하는 날엔, 잠들 때까지 나를 책망했다.
놓친 영화 장면을 다시 볼 때처럼 침대에 누워서 아주 상세하게 실수를 되감기를 했다. '아 그때 그렇게 할걸, 그렇게 하지 말걸' 후회와 자책으로 온 방이 꽉 차서 창문을 열어 환기라도 시켜야 할 것 같았다. 안 그러면 충분히 질식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수는 실패라고 생각했고 나는 나 자신을 점점 더 몰아갔다. 업무를 하면서도 필요 이상으로 체크를 했다. 그런데도 오탈자 하나라도 발견할 땐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동시에 화가 났다. 병원에서 거북목 진단을 받은 후에도 다시는 실수 따위 안 하려고 더욱 박차를 가해 모니터 속으로 들어갔다.
완벽주의 자세를 가지고 일을 하는 건 좋다. 문제는 그 완벽주의로 인해 단 한 번의 실수만으로도 마치 내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거다. 감정적으로 정신적으로 나에게 벌을 준다. 실수는 아마추어나 하는 거라고.
점점 나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일만 열심히 하는 사람이 되었다. 직장을 통해 돈을 버는 건 당연하고, 배우고 성장하여 커리어를 쌓아 더 나은 사람이 되길 원했다. 하지만 그런 이상적인 목표는 이 사회에선 정말 이상한 목표였다.
나는 만족과 성장을 위한 일이 아닌 '일을 위한 일'을 하고 있었다.
더 최악인 건 남의 실수에도 인색해져 버렸다는 것이다. 우리 팀에 후임이 들어와 내가 하던 업무를 인수인계했다. 처음에는 후임의 실수를 최대한 감싸주는 선임이 되리라 결심했다. 내가 그랬듯이 입사하고 얼마 안 되어서는 당연히 실수할 수 있으니깐.
근데 5개월이 다 되어 가도록 했던 실수를 반복한다. 자신이 담당하는 세일즈 품목의 가격도 헷갈려 일을 두 번 처리하게 했다. 후임의 실수는 곧 내 실수가 되고 우리 팀의 실수는 회사의 실수가 된다. 이제는 후임의 실수를 다독여주며 배움의 기회를 주고 싶기보단 아예 실수를 차단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후임에겐 정말 최소한의 업무만 넘겨줬다. 나머지는 그냥 모두 내가 처리했다. 차라리 내가 해서 실수를 줄이고 완벽하게 일을 끝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게 나와 후임, 회사 모두에게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서로 윈윈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결국 아무도 승리하지 못했다. 나의 일은 일대로 늘고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대로 늘었다. 무리한 업무는 감기몸살과 편두통을 불러왔고 결국 병원에서 링거를 꽂고 이틀을 꼬박 쉬는 지경까지 가고 말았다. 업무에 복귀하는 날, 후임이 해놓은 일을 보고 아찔했다. 나름 열심히 해보려고 한 거 같은데 마감 기한을 늘려서라도 다시 해야 했다.
결국 모두 지는 게임을 한 거다.
이대로는 악순환일 것 같아 결국 후임을 옆에 앉혀놓고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시 가르쳐줬다. 천천히 친절하게 잘 가르쳐주니 곧잘 따라온다. 실수를 완벽히 차단하고 과정보단 결과만 우선시한 나의 이기적인 꼼수가 후임의 배울 기회를 뺏어버린 거다. 무엇이든지 실수도 좀 해봐야 스스로 깨우치고 알아가는 데 말이다. 물론 이미 실수를 많이 하긴 했지만 이렇게 열심히 배우려고 하는데. 그제야 아차 싶었다. 여차여차 프로젝트를 마치고 기념으로 저녁을 같이 먹는데 후임이 나에게 힘겹게 털어놓았다.
"죄송해요. 사실은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어요. 실수가 잦았던 건 인정하고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디서부터 배우고 어떻게 다시 신임을 얻어야 할지 몰라서 막막했어요. 다들 바쁜데 일일이 붙잡고 물어보기도 그렇고. 집에 가면 그냥 멍하니 앉아있는 날이 많았어요."
딱 1년 전의 나였다. 침대에 누워 내가 한 실수를 계속 되감기를 하며 나를 책망하던 그때의 나였다.
괜스레 미안하고 측은한 마음에 음료 한 잔까지 사줬다. 사과가 100% 잔뜩 들어간 음료로 말이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라는 속담이 있다. 늘 하던 일, 잘하던 일이라도 간혹 실수할 수 있으니 자만하지 말고 겸허히 노력하며 받아들이라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세상에서 가장 나무 잘 타기로 소문난 원숭이도 떨어진다는데, 타잔도 아닌 내가 어떻게 한 번을 안 떨어지겠냐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예전에 TV에서 동물농장을 보았는데 원숭이 한 마리가 나무를 타다 떨어졌다. 그러자 다른 원숭이가 엄청 소리를 지르면서 밑으로 내려오더라. 마치 괜찮냐고, 어디 다친 데는 없냐고 물어보는 거 같던데 갑자기 그게 생각난다.
원숭이도 실수로 떨어지면 소리를 지르면서 위로해주는 마당에 원숭이보다 더 낫다고 주장하는 인간이 왜 이리 실수와 위로에 인색한 건지. 차라리 실수해서 겁먹고 자책하며 나와 상대를 미워하는 시간에 위로하고 다독여주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게 우리가 같이 성장하고 더 맘 편히 잘 사는 길이라는 걸 모두가 알면 좋을 텐데.
인간은 완벽하지 않은 존재다. 비난하는 건 아니지만, 한 번 생각해보길 바란다. 당신이 완벽했다면 신이지 인간일까? 감히 지구에서 살고 있을까? 그러니 우리 이제 인간은 완벽하지 않은 존재이고 실수를 통해 끊임없이 배워가는 존재라는 걸 인정하자.
물론 인간적으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 실수는 실수로 인정받지 못하고 비난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타인에게 치명적으로 피해가 가지 않는 자신의 실수는 자신이 먼저 너그럽게 포용하면서 '아 역시 나는 인간이야'라고 넘어가 보자.
실수를 통해 배울 점을 찾아가는 과정과 그 실수에 대해 묵묵히 책임을 질 줄 아는 자세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우리는 실수를 단 한 번도 안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수를 딱 한 번만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자려고 누운 침대에서 오늘 있었던 실수를 되감기 하고 괜히 이불을 차며 분풀이하지 말자. 오히려 잠만 안 오고 악몽만 꾸게 될 확률이 높을 테니까. 아무리 해 봤던 일이라도, 잘하는 일이라도 분명 실수할 수 있으니 자만하지도 말고 겸허히 노력하는 자세만 잊지 말자. 그리고 마음속으로 되뇌어 보자. 실수를 두려워하는 게 실수라고.
그래도 실수가 두렵다고요?
아니,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