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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트루 May 27. 2019

새 차 말고 세차요.

잘 관리한 자동차가 오래 잘 달려요.

"파리도 낙상하겠다."


엄마는 우리 자동차를 보더니 한마디 했다. 웃자고 한 소리지만 정말 그럴 듯했다. 새 차라고 해도 믿을 만큼 외관과 내관 모두 깨끗했다. 암 그래야지. 세차를 두 시간이나 했는데 당연히 깨끗해야지.
우리 엄마가 알면 기절할 소리다. 내가 세차를? 그것도 두 시간 동안?


세차장 위에 구름이 한가득하다. 날씨가 좋다는 건 세차하기 좋다는 뜻이다.


사실 난 '깨끗함'과는 좀 거리가 멀었다. 엄마가 내 방에 들어오면 십중팔구 하는 말은 똑같았다.
"방이 이게 뭐냐. 좀 치워라." 그럴 때마다 방 더럽게 쓰는 애들이 하는 변명은 왜 이리 다 똑같은지. 그럼 난 자신 있게 대답한다.
"이거 치운 거야." 그리고 덧붙인다. "다 나름의 질서가 있어."
아빠는 나와 내 여동생 방을 보며 배운 게 하나 있다고 말했다. 여자애들이 남자애들보다 더 더럽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지금 남편에게 결혼하기 전에 "얘 방 가봤어? 진짜 더러워. 알고 만나는 거야?"라고 묻곤 했으니.

방이야 더러워지면 치우면 되는데 문제는 조금 다른 데 있었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랄까.
물건을 함부로 대했다. 물건에 별 애정이 없으니 아무 데나 휙휙 놓게 되고 그러다 보니 금방 방이 더러워지곤 했다. 온종일 찾던 물건이 엉뚱하게 피아노 밑에서 발견되는 날엔 '이게 왜 여깄지? 굴러 들어갔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결국 물건이 필요할 때 쓰는 것보단 못 쓰게 돼서 버리는 물건이 더 많아졌다. 물건을 소중히 대하지 않고 애정도 없으니 빨리 더러워지는 건 물론 쉽게 닳아버리고 고장도 잘났다.

엄마가 갑자기 내 방 대청소라도 하는 날엔 마법사라도 된 것처럼 전에 찾다가 포기한 물건들을 다 찾아냈다. 그리고 생사를 살폈을 땐, 이미 운명했었다. 그러다 보니 샀던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고장이라도 나면 버리고 또 사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나름 방에 잘 둔 것 같은데 왜 이렇게들 고장이 나버리는 것인지. 내가 다 억울했다.
 

호기 좋게 산 자전거. 반짝 타고 관리를 하지 않아 공기압도 빠지고 브레이크도 녹슬었다.


그래도 결혼은 무사히 했다. 아빠가 내가 더러운 애라고 남편을 겁준 거에 비하면 말이다.
듣자하니 남편도 내가 정리정돈과 거리가 먼 걸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잘 가르치면 잘 따라 할 것 같아서 결혼했다고 하는데, 흠. 농담인데 진담 같다.


그리고 시댁에 갔는데 글쎄 신기한 걸 발견했다. 과거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아니면 드라마 소품실에서 가져온 것 마냥 딱 봐도 요즘 건 아닌 듯한 물건이 있었다. 다름 아닌 아주 오래된 김치냉장고가 베란다 한 편에 턱 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가족들 모두 하나둘 나이를 먹어가며 조금씩 얼굴도 바뀌는데, 김치냉장고만 시간이 멈춘 듯 새 것처럼 잘 작동되고 있었다. 심지어 외관도 너무 깨끗했다. 1999년도에 생산된 모델이니 언 20년이 다 되어간다. 가족들은 다 하나둘씩 늙어가고 조금씩 아픈 곳이 늘어나는데 이 녀석은 변한 거 하나 없이, 잔고장 하나 없이 제자리에서 자기 할 일만 하고 있다.

어머님 성격이 원래 깔끔하시거니와 물건 정리도 굉장히 잘하시는 분이시다. 남편이 누굴 닮았나 했더니 피는 못 속이나 보다. 집안 곳곳 물건에 대한 마음이 보인다. 서랍에도 일일이 칸을 나누어 물건을 놓으셨고 이름표를 붙여 쉽게 찾을 수 있게 해 놓으셨다. 덕분에 오래된 물건들도 각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아직 뭘 할 수 있는지 과감하게 드러낼 수 있는 곳이다.

그렇게 저녁을 함께 먹는 날에 김치가 식탁 위에 올라오면 김치냉장고 이야기가 반찬으로 올라온다. 추억 한 입, 밥 한 입. 배가 부르다.

생각해보니 김치가 어머님 손맛인 줄 알았는데 김치냉장고 맛이었나. 뭐, 어머님 손으로 잘 관리한 김치냉장고에 넣으신 거니 어머님 손맛이 들어갔다고 해도 무방할 거다.
암, 추억이 팍팍 베인 김치가 맛 없을 리가 있나.


길에서 발견한 오래된 우체통. 정말 오래간만이다. 얘는 누가 관리해줄까 괜히 궁금해진다.


하나둘씩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물건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나의 삶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내가 잘못 대해 놓고 억울하게 그 물건과 이별하는 걸 슬퍼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건 없다.

가만 보면 물건이나 사람이나 비슷한 것 같다. 그 사람과의 관계를 오래 유지하고 싶다면 안부 전화를 걸고 가끔가다 밥 한 끼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물건도 마찬가지다. 오래 쓰고 싶은 물건은 가끔 전원도 켜보고 고장 난 곳은 없는지 살펴보고 슬쩍 눈길도 줘야 한다. 그렇게 물건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순간, 주변 모든 것들에 대한 마음가짐도 점차 달라질 것이다.


물건이 넘쳐나는 시대다. 더 새롭고 더 매력적인 물건들이 여기저기서 뿜어져 나온다. 그럴 때마다 우린 다 살 수 없다. 물론 누군가는 호사롭게 다 살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다. 굳이 마구잡이식 소비를 장려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나바다 운동이라도 하자는 게 아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부터 소중히 생각해야 앞으로 들여올 새것들도 당신과 오래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물건을 사기 위해 내가 겪었던 그 날의 설렘과 내 것이 되었을 때의 기쁨, 사용하면서 느꼈던 만족 그 모든 감정이 순간의 찰나가 아닌 무수히 많은 날의 연장이길 바라는 마음이다.

 

하물며 자동차도 그렇다. 처음 자동차를 뽑았을 때의 그 설렘과 막 핸들을 잡고 액셀을 밟았던 그 날의 벅찬 감동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그리고 점차 자동차 안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더러워진다. 제때 치우지 못한 쓰레기와 먼지는 자동차에 쌓이는 것 뿐만 아니라 당신의 기억 위에도 소복이 쌓인다. 그리고 처음 그 날의 감정과 기억들을 불러일으키는 걸 방해한다. 한 때 설렘을 안고 탔던 자동차는 이제 더러운 실내를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을 안고 타게 되는 거다.


조금 과장해서 단순한 소모품이 아니라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기저귀 갈듯이 엔진 오일도 갈아주고 공기압도 체크해보고 정성스럽게 목욕재계도 해줘 봐라. 그러면 어느새 단순한 자동차를 넘어 애정이 생긴다. 아마 어느샌가 자동차에 당신만의 특별한 애칭을 만들어 줬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난 있다. 알려주기 부끄러우니 패스)

그렇게 잘 관리한 자동차가 도로 위도 훨씬 잘 달린다. 마치 당신의 앞날처럼 말이다.


세차 후, 자동차에 하늘이 담겨있다. 오늘도 왠지 기분 좋은 드라이브를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오늘 날씨는 어떤가 확인해본다. 그리고 햇빛 좋은 주말엔 남편과 어김없이 세차를 하러 간다. 놀러 가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조금 참고 세차를 다 하고 놀러 가면 굉장히 뿌듯하다. 그러고 먹는 밥은 또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

이 녀석, 우리를 얼마나 태우고 다녔는지 3년 반 만에 벌써 7만 9천 킬로를 달렸다.


앞으로도 잘 관리 해줄 테니 더 달려보자. 우리 함께 봐야 할 곳, 가야 할 곳이 너무 많단다.

그런 의미로 "사장님, 가득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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