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비가 오면 괜히 사람도 눅눅해진다

by 김트루

비 오는 날,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해 편의점에서 새 우산을 사는 것만큼 분통 터지는 일이 또 있을까. 그날이 딱 그런 날이었다. 갑자기 내린 비로 모두 뛰어가기 바빴다.


집에 거의 다 와간다던 남편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창밖에 비가 내리는 걸 보고 급하게 우산을 들고 일단 뛰쳐나갔다. 저 멀리 보이는 남편은 우산을 사지 않았다. 그저 근처 버스 정류장에 앉아 언제 그칠지 모르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뛴 걸음만큼이나 심장이 요동쳤다. 뛰느라 숨이 찬 건지, 그를 발견한 안도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아이, 뭐 하러 나왔어. 비 그치면 가지 뭐.”
“밤 12시가 다 돼 가도록 안 오는데 뭐 하러 나왔냐니! 얼른 우산 쓰고 가자.”


남편은 마지못해 일어났고, 우리는 함께 걸었다.
가는 내내 그는 볼멘소리를 중얼거렸다.


“뭐 하러 나왔어, 내가 알아서 들어가면 되지. 비도 이렇게 많이 오는데.”
“비가 많이 오니까 데리러 나온 거지. 얼른 가자.”


거세게 내리는 빗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말없이 걷다가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을 때, 그가 또 한마디 던졌다.


“뭐 하러 나왔어, 진짜.”
“아, 그냥 고맙다고 한마디 하면 안 돼? 기껏 데리러 나왔잖아.”


비처럼 거친 말이 내 입에서 쏟아졌다.
남편은 순간 술기운을 추스르듯 허리를 세우고 똑바로 걷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바로 후회가 밀려왔다.


“미안해. 그냥, 너 괜히 젖을까 봐..”
“아냐. 나도 미안. 내가 좀 예민했어.”


우리는 말없이 다시 걷는다.
큰 우산 아래, 둘이 걷기엔 충분히 넓지만 어깨와 마음이 부딪히지 않도록 서로 애쓴다.

축축한 공기 탓인지, 둘 사이의 침묵도 눅눅하게 들러붙는다. 이런 날, 괜히 마음이 더 예민해진다. 별일도 아닌데 툭, 하고 감정이 새어 나온다. 그래서 나는 비가 싫다.


집에 도착한 남편은 소파에 쓰러지듯 눕는다. 나는 말없이 이불을 깔고 그를 눕힌다. 유달리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인다. 잠깐 환해진 방 안, 그 틈으로 남편의 지친 얼굴이 보인다.

나는 말없이 조심스럽게 이불을 덮어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오늘도 저 빗속을 헤치고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웃고 참으며 겨우 하루를 버텨냈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그 자리가 얼마나 피곤하고, 웃음이 얼마나 버거운 자리일까.

그걸 내가 왜 자꾸 잊고 사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비가 유난히도 밉고 마음이 아리다.


tempImagemLIaer.heic


keyword
이전 08화두 집 살림하는 아빠를 응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