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는 우리 엄마의 모습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남편과 아이들이 회사와 학교로 떠나면 청소를 하고 시장에서 장을 보고 돌아와 저녁상을 준비하는 일반적인 엄마의 모습과는 굉장히 거리가 멀었다.
엄마는 장바구니 대신 서류가방을 들었고 단화 대신 하이힐을 신었다. 한껏 단장을 하고 준비를 다 마친 엄마는 잘 갔다 오라는 인사와 함께 높은 구두로 잘만 뛰면서 부리나케 나갔다. 그 뒷모습을 오래 보지 못하게 할머니는 나와 내 동생을 불러서 유치원에 갈 준비를 도와주셨다.
유치원 때부터 하원은 역시나 엄마가 아니고 할머니께서 해주셨다. 삼삼오오 친구들이 엄마 손을 잡고 집으로 갈 때, 나는 우둘투둘한 할머니의 손을 잡고 살짝은 우둘투둘한 마음으로 할머니 댁에 갔던 기억이 있다.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는 그 어렴풋한 기억의 끝자락 속, 소풍날에도 내 돗자리에 엄마는 없었다. 할머니가 그 누구보다 환한 얼굴로 우리를 반겨주셨고, 직접 싸 오신 도시락을 열어 보이시며 손녀가 다른 마음이라도 먹을까 봐 얼른 내 입 안에 김밥을 넣어 먹여주셨다.
지금도 우리 엄마는 아직까지 일반적인 엄마이자 할머니의 모습과는 거리다 멀다. 세월이 훌쩍 지나 그녀의 딸이 또 딸을 낳아 할머니가 된 지금도 그녀는 출근을 하고 있다.
그 작은 모닝에 보조석부터 뒷좌석까지 꽉 찬 수업 자료들과 지난 엄마의 노고들이 담겨 앉을자리조차 없었다. 운전용 낮은 신발과 갈아 신을 하이힐부터 차마 버릴 시간조차 없어 쌓여있는 커피들이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닝은 점차 살려달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엄마 대신에 길바닥에 주저앉았고, 정비소에 가는 일이 많아졌다.
나는 그 앞에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아직도 일하는데, 지금 나는 경차 한 대도 부담스러운 현실이다.
모닝은 고장 나도 부서지진 않았다. 엄마는 여전히 수업 자료를 챙기고, 여전히 단화와 하이힐을 번갈아 신는다.
누군가를 만나고, 누군가의 내일을 준비한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엄마의 인생이 단순한 출퇴근이 아니었다는 걸.
다 큰 자식들을 위해 억지로 버티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감당해 온 삶에 대한 자부심과 너무 오래된 습관처럼 몸에 밴 리듬, 그리고 누군가를 가르치고 있다는 긍지였다.
"언제까지 일할 거야?"
힘들다고 말하는 엄마에게 매번 물었지만, 그 대답도 매번 똑같았다.
"한 2,3년만 더 해보고."
그 말은 매년 반복됐고, 더 이상 줄어들지 않는 그녀만의 시간표였다.
모닝은 여전히 가끔씩 말썽을 부리지만, 엄마는 오늘도 그 작고 단단한 모닝에 올라타 아무렇지 않게 하루를 밀고 나간다.
그래서 나도 오늘도 뻔한 마음으로 엄마를 응원한다.
작지만 큰 소리로 ‘부웅’ 하고 출발하는 모닝 뒤로 나는 조용히 이야기한다.
"엄마, 안전 운전해요."
들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쩌면 백미러로 이런 나를 봤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