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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트루 Jan 15. 2019

12시? 신데렐라야, 넌 나보다 낫다

통금, 겪어본 사람만이 아는 유일하게 지키고 싶지 않은 약속.

오후 10:00.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한 술자리. 가장 신날 시간, 난 그 누구보다 애가 타기 시작한다.

지하철과 버스의 막차 시간 그리고 집까지 뛰어갔을 때의 시간을 계산한다.


젠장. 이미 늦었다. 친구들에게 먼저 가야 된다고 말하자 별 대수롭지 않는다는 듯이 대답한다.


"도착하면 연락해, 김데렐라"


난 대학교 때부터 유명했다. 전액 장학금을 받아서도 아니고 특출 나게 예뻐서도 아니고 노래나 춤을 잘 춰서도 아니었다. 오직 단 하나, '통금'으로 유명했다.


대학교 1학년 땐, 오후 9시

대학교 2학년 땐, 오후 10시

대학교 3학년 땐, 오후 10:30분

대학교 4학년 땐, 오후 11시


시간이 점점 늘어가다가도 대학원 입학 후, 오후 11시 통금은 변함은 없었고 취업을 하고 회식이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늦어도 되지만 그 외에는 오후 11:00까지 귀가를 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낮술'이 많았다. 대학교 때는 다행히 원하는 과목을 원하는 시간에 들을 수 있었고 어린 마음에 최대한 수업을 앞당겨서

최대한 빨리 수업을 끝냈다. 아침 잠의 달콤함보단 술의 달콤함이 더 간절했던 나이, 낮술은 너무나도 매혹적이었고 덕분에 통금도 잘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취업을 하고 사회로 들어오니, 이게 웬걸. 낮술은커녕 낮잠도 잘 수 없으니. 칼퇴를 하고 빠르게 약속 장소에 도착해도 기본 8시다. 심지어 나의 집은 인천이었다. 서울에서 지하철로 넉넉잡고 2시간을 잡으면 답이 나오지 않는가?


통금. 대체 왜 생겼냐고 물어본다면 자신 있게 내가 뭘 잘못해서 생긴 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왕년에 좀 '놀아 본' 아빠의 단독 결정으로 생겼다. 밤에 여자와 남자가 돌아다니면 벌어지는 일들은 다 똑같다나 어쩐다나.


"여자가 밤에 돌아다니면 위험해."


별 이유가 없었다.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아빠는 통금을 정했다. 처음엔 딸만 둘인 아빠에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그렇다고 술을 먹고 집을 안 들어오기를 했나, 성적이 안 좋기를 했나, 그 다 겪는 흔한 사춘기도 없이 착하게 잘 살았는데 통금이라니.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아빠가 기분 좋게 술을 드시고 온 날에 옆에 착 붙어서 갖은 애교를 부려가며 설득해봐도 그는 끄떡없었다.


"통금은 절대 안 없애. 나중에 남자 친구들도 이건 지켜야 돼."


그리고 이 말은 곧 현실이 됐고 그동안 만났던 남자 친구들은 아주 무사히 나를 통금 시간에 맞춰 데려다주었다. (나중에 느낀 건데 단 한 번도 통금을 어긴 적 없이 데려다준 그 친구들도 참 착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연애할 때 한다는 심야영화 보러 가기, 해돋이 보러 가기, 야시장 가기 그리고 클럽 가기 등은 나와는 다른 세상의 일이었다. 남자 친구와 둘 만의 1박 2일 여행? 어림 반푼 어치도 없었다. 신혼여행이 나의 '첫 해외여행'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 흔한 심야영화 관람은 당연히 결혼 후에나 이루어졌고, 그때 마셨던 새벽 공기를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나는 장녀였고, 내가 생각해도 착한 딸이었다. 그래서 가족 간의 불화를 만들면서까지 통금을 어기고 놀고 싶진 않았다. 사실 그럴 배짱도 없었다. 한 가지 더 말해주자면, 일요일은 무조건 '가족의 날'로서 약속을 잡을 수 없었다. 그 날은 가족이 함께 아침, 점심 그리고 저녁을 같이 먹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집에서 어떻게 살지..?'


하지만 우리 집의 상황을 알게 되면 이해가 될 수도 있다. 아빠는 건축 현장에서 일을 하셨는데 숙소 생활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집에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가족끼리 그 흔한 주말을 즐기거나 밥을 같이 먹거나 여행을 간다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다. 


통금에 일요일 외출 금지까지 있다 보니 얻는 것보다 잃은 게 많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난 20대지만 더 젊었던 20살의 기억 속, 자유로웠던 적이 별로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위 사람들의 애정 어린 질타는 마치 내가 그저 온실 속의 화초라는 생각을 들게 했었다. 그래서 결혼을 하면 난 무조건 밖으로 나가 놀 생각이었다.

적어도 놀 때 시계는 보지 않으리라.


하지만 결혼 후, 크게 달라진 게 없다. 28년간 몸에 밴 나의 생활습관은 밤 12시만 넘어가도 잠이 쏟아졌고 무슨 이유인지 나가 노는 것도 귀찮았다. 그저 남편과 함께 심야영화 관람과 도깨비 야시장 투어, 부모님 허락 없이 여행을 가거나 외박을 할 수 있는데서 작은 스릴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점점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하고 보니, 안보이던 게 보이고 안 들리던 게 들리나 보다. 부모의 마음이 이해가 된달까. 통금으로 인해 나의 놀 권리를 빼앗겼다고 생각했던 건 늘 옆에서 지켜줄 수 없는 부모의 마음 때문이었고,

일요일 외출금지로 인해 자유를 빼앗겼다고 생각했던 건 더 늙기 전에 조금이라도 자식들과 함께 있고픈 부모의 마음임을 이제 알았다.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친정에 들린 날, 아빠는 나에게 말했다.


"아직도 아빠는 그 화환을 잊을 수가 없어. 그거 보면서 내가 좀 심했나? 싶더라."


너무 유명했던 나의 통금은 직장 내에서도 화제의 중심이었고 도마 위의 생선이었다. 물론 직장 동료들은 장난식으로 화환에 문구를 적어 보내긴 했는데 아빠랑 엄마는 내심 걸렸나 보다.


문제의 화환. 이보다 더 축하의 진심이 드러나는 화환이 어디있을까.


그러다 보니 엄마와 아빠는 나에게 종종 장난치듯 묻는다.


"너 통금 때문에 결혼했지??"


물론 아니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런 것도 같다.

절대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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