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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기후와 취향을 위해 연구하는 미래 육종학자입니다

8월 11일 심포지엄을 준비하면서.

by 진중현


주말에 가만히 앉아 있을 시간이 별로 없었다. 원래 모내기를 두 군데에 한 번씩 하면 끝날 일이, 올해는 그렇지 않았다.


경기도농업기술원과 하는 협업 포장에 한 번, 해남은 자그마치 세 번 이상을 가야 했다. 새로운 포장을 만들어서도 그랬지만, 전 정부 시절 잃어버린 화성 농장의 온실을 서울의 비좁은 곳에서 모를 준비하니 어려웠고, 학생들도 새롭게 하는 일인 데다가, 5월의 저온 때문에 몸살을 앓은 모들이 활착을 못해 죽어 버렸다.


그렇게 엉켜버린 스케줄 때문에, 윤영식 대표가 고생하고 만든 간척지 염포장에서 늦게 심긴 모들은 모두 건조 피해나 우렁이 피해로 죽고 말았다. 그렇게 지나가면서 5-7월이 홀라당 날아가버렸다.


성장하는 학생들은 볼 수 있어 좋았으나, 작년까지 멈춰버렸던 연구실원들이 이제야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활발해졌다. 특히 우리 연구실에서 분자생물학을 지휘해 주시는 김성한 박사님과 랩맘(lab mom)으로서 모든 연구 관련 잡무와 작물 재배 및 육종 포장 설계를 도와주는 심지형 선생, 실무 육종을 지도해 주시는 정응기 박사님, 당진의 현장에서 밀크씨슬 재배와 관리, 분자육종을 함께하는 장수 박사, 우리 연구실의 정말 모든 행정처리와 회계 업무를 커버해 주시는 이영은 선생의 도움으로 연구실 셋업이 거의 마무리되었다.


그 사이, 학생들이 갑자기 성장하는 것이 보인다. 모내기를 마치고 벼들이 쑥 자라는 것처럼. 2023-4년에 닥쳤던 재앙 이후 복원되고는 있지만, 그 사이 너무나 많은 데이터와 재료 유실로 인하여 고생했었는데, 학부 연구원으로 조인해 준 이경서 학생과 방찬재 학생이 임지혁 학생과 함께 종자실을 복원하느라 정말 고생이 많았다. 또한 농장과 온실 시스템을 돌아갈 수 있도록 고생 많이 해 준 심지형 선생과 연구실 새내기들 고생이 많았다.


경기도농업기술원은 우리와 함께 기후에 강한 고품질 벼를 함께 연구하고 있는데, 작물팀 연구원들, 그리고 함께 해 주시는 경기도농업기술원장님과 연구국장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한편, 해남군수님과 농업기술센터 소장님 예하 직원분들, 그리고 이제 공생공사의 길을 가는 것 같은 땅끝황토 친환경영농법인 윤영식 대표와 그 직원분들에게 협업의 길을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하게 됩니다.


아직은 대놓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제 우리의 정체성을 정리하게 되었다. "우리는 기후와 취향을 위해 연구하는 미래 육종학자입니다"라는 문구를 8월 심포지엄 자료 맨 앞에 학생들이 농장에서 일하는 사진에 넣으면서 생각했다. 어떤 방법으로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위해 연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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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들어, 공저자 한 편 없는 연구실을 보면서 생각했다. 우리는 올해 무엇을 하였는가? 단절되었던 연구의 흐름을 복원하느라 보내었던 2023-4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으면서, 새로운 시각을 담았던 시간들.


우리나라 과학계와 대학 교육계는 여전히 양적 업적에 가혹하고, 새로운 시각을 갖는 협업이나 성장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욕 나오는) 환경에 처해 있고, 실무자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무책임한 시스템이지만, 이제 정신들 좀 차리고 우리가 얼마나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고 그것으로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지를 생각하면서 갈 것이다.


다행히도 많은 분들이 도와주시고 인정해 주셔서, 9월 1일에 홋카이도대학으로 방문교수의 자격으로 연구년을 1년간 다녀오게 된다. 이 기간 동안 벼와 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연구할 수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쌀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더 소득이 높아지고, 쌀밥과 그 가공품을 먹는 소비자가 더 많은 돈을 기꺼이 지불할 만한 상품이 개발되고, 결국 우리 기대치에 맞는 쌀산업이 어떻게 구축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정립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 중 하나다.


기후와 식량, 이런 수준의 접근은 여전히 공적 영역에 머물렀던 한계가 있다. 땅끝황토법인의 윤영식 대표와 4년째 협업을 하는데, 왜 그 법인이 더 부자가 되지 못할까, 그리고 그 선순환 구조의 모델이 다른 쌀 사업자들에게 전파되어 모두가 부자가 되지 못할까. 나는 중앙 정부 중심으로 모두에게 동일한 기술을 전파하는 것도 모두가 못살게 하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가둬놓은 쌀 시장에 고수준의 기술을 차별 없이 제공하면, 그 의도와 상관없이 생산자에게 실익이 없다. 그리고 시장이 작으니 개발유인이 없어 투자도 없고, 결국 공적 자금의 무한 투입이 진행된다. 경험자도 없으니 공무원들이 사업을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우선적으로 제한해서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어떤 특정 농민을 지지해서가 아니다. 서로 소통되고 결론에 접근하는 파트너십이 '경영적' 접근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퍼스트무버'에 특혜를 줘야 하고, 그 모델을 확산하도록 하는 것이 공공영역이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나라 농민들은 여전히 모든 것이 무상으로 지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소비자의 기대치가 높아 개방을 하면 몽땅 수입할 기세여서, 정부가 이 상태에서 개방을 하면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는 것이 현실적이어서 안타깝다.


그렇다면, 공공기관은 하루라도 빨리, 우리의 '발전된' 기술이 현재 농민들이 활용하여 국제경쟁력 있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첫째 이유는 시장을 협소하게 만들어 규모의 경제가 나올 수 없으며, 둘째 이유는 농업과 농촌, 농민을 통합해서 관리하니 빼도 박도 못하는 정책적 모순이 축적되어서다. 그 사이, 농업은 저소득, 농민은 고령화, 농촌은 공동화가 되었다. 나는 이 추세가 당연하고 유럽과 일본, 미국이 그랬듯이 별 뾰족한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진국이 겪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난 하나라도 구제하면 좋겠다. 96%나 되는 비농업 소비자가 국민의 대다수니, 국민 전체가 행복한 농업이 되면 좋겠다. 80%나 되는 식량을 수입하니 국내 생산보다 국제적 관점의 식량 수급 정책으로 전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98%나 되는 비농업 GDP를 견인하는 2%의 농업이 되어야 한다. 농업이 기반생명산업이라면, 오히려 빛나는 2%가 되어야 하지 않나. 농업이 빈약하니 농민과 농촌이 설 자리가 사라지는 것이다. 농민과 농촌 우선 정책이 재고되어야 한다.


국제벼연구소에서 벼의 생산성과 기후변화 적응 관련 벼 품종 연구만 줄곧 했었다. 논문을 최초로 낸 지 25년이 지났다. 쌀산업 현장을 처음으로 경험한 지 도 비슷한 세월이 흘렀다(중간에 연구 몰입 시기가 있었지만, 머릿속에서는 늘 '왜 그랬을까'라는 생각이 있었다). 심포지엄 준비를 하면서 10분만 시간을 할애한 것이 후회가 된다. 25년을 10분으로 줄이는 것이 너무 어렵다. 인문적으로 썰(?)을 푸는 시간은 제법 흐른 것 같다. 이제 어떻게(!)에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91년, 처음 대학을 입학했을 때, 난 선배들이 곱게 안보는 사람인 것을 알았다. 그 흔한 데모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김영삼이 문민대통령이 되었으니, 나는 데모보다 공부할 때가 아닌가 했다(물론, 내가 학교 다닐 때에도 면학 분위기도 아니고, 나도 마음을 못 잡았지만). 생각의 방향은 실무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명을 가져야 하는 세대 아닌가!


끝없는 모순을 느끼게 되었다. 나 스스로도 언행일치가 잘 안 되는 것을 자책하였다. 그러나, 세상의 모순이 그 원인 중 하나임도 알게 되었고, 그 와중에도 나 스스로를 달래가면서 공부해야만 했다. 공부 밖에 딱히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 시도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벼육종회사를 실패한 지도 20년이 넘었다. 그런데, 조유현 대표의 시드피아가 상당한 매출을 내면서, 드디어 우리나라 주요 쌀생산 품종이 된 것이 대단하다. 그다음이 필요하다. 그것이 무엇일까.


서울대 문정훈 교수는 나에게 '소비자 중심 사고'를 전달해 준 친구다. 소비자와 생산자의 연계는 말이 쉽지, 그건 그냥 구호에 그칠 확률이 높은 단어다. 그렇게 나에게도 25년이 흘렀다. 수많은 쌀 사업자들이 과거의 문제를 반복한다. 그것이 보기 싫어서 네이버 블로그를 남겨 놓고, 페이스북에도 글을 쓰다가, 브런치를 시작했고, 남재작 박사의 '농업 짓다'에도 출연해 보고 그랬다. 사람들의 평균적 이해도가 낮다고 생각해서 아이들 책도 써 봤다.


소비자가 변하는 정도가 아니라, 일반 시민(나는 '국민'이라는 수동적 단어를 싫어한다)의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쌀 생산자/도정업자/유통업자의 수준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가에 쌀을 소득보전 이상의 가치로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사업자가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야기를 화두로 던질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짧다. 그리고, 여전히 세상은 보수적이다. 자기가 살던 대로 살아도 잘 사는 것이 '태평성대'라고 생각하는 중화적이고 조선시대적 인물들이 대부분인 한국이다.


그러나, 세상은 이미 혁신과 변화가 디폴트값으로 변하였다. 얼마나 보수적인지 만사에 불만이고 이에 대하여 정치적 세력이 되어 반항하고 있다. 농업이 가장 더디고 늦다. 온 세상이 다 받아들이고 나서야 그때 겨우 회의를 시작할 태세다. 하지만 그조차 얼마 남지 않았다. 농촌에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먹는 쌀과 식량들이 얼마의 공공재원이 투입되어야 유지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이 지속가능한 경영 전략이 맞는가. 우리는 농업과 식량에 있어서 국제적인 '갈라파고스'가 되었다. (과거형이다. 이미 그렇다).


농대를 가도 농업을 할 사람이 없다. 농대를 졸업해도 농창업을 하면 안 좋은 경험 투성이다. 농대를 가는 것은 그 대학 이름을 얻기에 '가성비'가 좋아서다. 그래서 대학도 소위 '비인기학과'들끼리 '자유전공'의 이름으로 통합이 대세다. 그 안에 큰 비중이 농대다. 모두가 잘 알면서도 쉬쉬하는 사이, 시간이 많이 흘렀다.


2025년이 되어, 여전히 SCI 논문 개수를 카운팅 하면서, 내가 한 일이 아무것도 없네... 하는 자괴감이 스쳐갔다. 농업(아니, 공학, 의학도 비슷하지 않을까?)을 공부하는 연구자가 논문 개수가 없다고 한 일이 없다고 평가받으니, 억울하기도 하고 또 이러다가 안될 것도 같아서, 상념이라도 기록해 놓는다. 언젠가 과학기술의 책임 있는 분들도 우리나라 기반생명 산업 발전을 위한 학문과 연구 발전을 위해서도 바꿀 것이 많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일개 사립대의 교수가 서울에서 농학 연구하느라 별소리를 다 듣고 별 짓을 다 했다. 그러나, 그 사이 다른 분야의 생각과 시각을 배웠다. 이제 농학은 별도의 학문도 아니다. '실사구시'란 '문제의 발견'에서 출발하고, 결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학문이다. 도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보는 시각, 즉, 철학과 관점이 중요한 것이다. 도구와 아이디어를 사용하므로, 농학이나 공학이나 차이가 없다. 그것의 궁극점은 약학, 의학과 닿아 있다. 건강과 직결되니까, 동시에 생물학, 지구과학, 물리학, 화학과 같은 기초과학과 도구를 함께 활용한다.


일본에서 돌아와 나는 다른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중년의 농업과학자가 아닌 과학자, 아니 학자, 아니 그냥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내가 대학 2학년 은사님을 처음 뵙고, '왜 육종을 공부하려는가'에 대한 대답의 일부이다. '육종학자가 되기 전에 농학자가, 농학자 전에 학자가, 학자 전에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말을 잘못했다. '전에'라는 단어는 '후에'라고 말했어야 했다. 아니... 어쩌면 맞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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