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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정신의 복원

오염된 지식에 대한 고민

by 진중현


세상을 문제의식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을 '시대정신'이라고 한다. 누가 나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너는 '문제'라는 말을 많이 쓰는구나. 왜 모든 것에 '문제'라고 하지? 저 봐, 또 문제라고 하잖아"


굉장히 모욕감을 느꼈다. 그것도 제법 공부 좀 했다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나는 그 사람을 직관하지는 않을 것 같다.


지식을 쌓고 학위를 가지고 지성을 가진 사람은 무조건 세상의 덕을 입은 것이다. 학자에게 자유를 준 이유는 생각을 게으르지 말라고 세상이 배려한 것이다.


그런데, 지식인들과 학자들조차 휴식과 쉼의 수준을 넘어, 나태하고 게으르다. 생각을 멈춘 자는 지식인이 아니다.


나 또한 이 말을 하는 데 있어서 조심스럽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아서가 아니라, 나의 무능함 때문에 생각에 한계가 있으며, 수많은 잘못 와 오류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말과 글이 갖는 한계 때문에 생각의 교류가 명쾌하고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지식인은 그 삶에 빚은 지었기 때문에 그것을 갚고 사는 것이다. 육체의 노동을 면제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를 깨닫는 순간이 있다. 그것에 감사함을 잊은 지식인이 세상을 얼마나 망가뜨리는지를 보라.


그런데, 지식인이 아닌 지식의 경력을 쌓는 자들이 세상을 망가뜨릴 수 있는 이유는 보통 사람이 지식인을 무시하고 경멸하거나 적어도 지식인을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필요 없다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 교만하다. 누구는 아주 많이 교만하다. 그래서 끊임없이 비교하고 줄 세우고 그 와중에 모두가 멍청하다 욕하며, 자존감 없는 삶을 사는 까닭에 멍청이에게 힘을 준다. 그리고 믿는다. '쟤는 멍청이니까 힘을 줘도 별 것 못할 것이다. 우리가 힘을 쓰자.'


그 꼴을 보고도 말을 바꿔 가며 사는 사람들은 진짜의 눈을 보지 못한다. 진짜를 만나기를 즐겨하고, 그들의 삶을 동경하며, 문제를 발견하고 그에 대해 솔선수범하는 것이라면, 그 삶이 어떠해도 상관없다.


지식이 무엇인가. 지식인은 자칫 '지식이 많은 사람'처럼 여겨지나, 실은 '지식을 창출하고 구하는 자'라고 하는 편이 낫다. 이미 지나가 버린 지식은 가치가 없으며, 그 골동품을 모은 뇌는 박물관에 가깝다.


우리는 '문제의 세상'에 살고 있다. 모두가 문제가 많다고 한다. 사실, 문제는 늘 있었지만, 우리 보통 사람들의 인지 능력이 향상되어 문제가 더 많이 보이는 것이다. 문제를 발견하되 그것에 대한 '시대정신'이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증폭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시대정신을 지식인들이 해결해 줄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식인은 문제해결자가 아니라 '발제자'다. 그 발제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자는 우리 모두 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문제를 발견하고 그 문제에 대해 적잖이 고민했기 때문이다.


20세기말의 번아웃을 지나 눈을 뜰 때이다. 용렬한 말과 법 해석의 장난에서 시간을 참으로 많이나 버렸다. 행정은 좋으나 관료주의는 나쁘며, 공평은 좋으나 포퓰리즘은 나쁘다. 우리는 참 많은 것들을 변형하고 왜곡했다. 거짓 행정과 정치는 '키워드'로 살다가, '키워드 정치인'으로 망했다.


이제 좀 달라져야 하지 않은가? 나는 다시 고대의 언어들을 끌어오고자 한다.


'시대정신', '농업과 환경', '지속가능성', '종자의 중요성' 등 시골 촌부도 알아먹을 만한 단어로 이야기했으면 한다. 그놈의 전자정보학 전공자나 상경계열 전공자나 알아먹을 단어로 너무 '씨부리지' 말자. 적절한 자리에 정확한 ('적확한') 단어를 써서, 누구나 알게 이야기하자.


농업은 오래된 듯 새롭고, 식량은 없는 듯 매우 중요하다. 환경은 늘 옆에 있지만 시끄러워졌다. 그런데, 그것들은 다 그 자리에 있었다. 우리가 변했고 우리의 인지 범위가 달라졌고, 우리의 요구(또는 욕심)가 변한 것이다.


혼자 나대고 까불다가 지쳐 쓰러져 자는 꼬마처럼, 과거의 것들보다 더 풍요로운데 더 어려졌다. 꼭 자식 하나둘 낳아 엄청난 투자를 했더니, 그 자식이 부모를 돌아보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지속가능한 농업도 환경도 심지어 세대 지속에도 실패하고 있다.


어떻게 다시 복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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