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성장이 배 아팠던 이유

그게 왜 농업으로 연결된 생각에 이르렀는데...?

by 진중현
image.png https://v.daum.net/v/20260131060207902

이 기사를 보면서, 질투심도 생기고, 우리 분야에 대한 안타까움도 들고, 그러면서도 “그래, 당연하지”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어왔다.


이런 감정들이 한꺼번에 올라올 때, 나는 그 감정들을 ‘정리’하기보다, 오히려 하나씩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 연원을 더듬어 보는 편이다. 그러면 대개 개인적인 감정 같던 것이, 어느 순간 사회의 구조와 내가 속한 산업의 위치, 그리고 국가가 선택해 온 방향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우리가 말해 온 자유주의, 시장주의라는 관점은—좋든 싫든—이 나라가 어떤 나라가 되도록 만들어 왔는지를 꽤 명확하게 보여준다. 과거에 우리는 스스로를 “땅도 좁고 사람만 많은 나라”로 규정했고, 자원이 적으니 인적 자원을 키워서 기술과 실력으로 승부해야 한다고 말해 왔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나라가 지금의 한국이다. (이 문장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그 결정을 하던 시점에, 세계의 다수 국가는 농업국가였고, ‘부국강병’의 뒤에는 광활한 대지와 지리적 이점을 가진 제국이 있었다. 제국들의 경쟁은 결국 산업주의의 확장을 가져왔고, 우리가 그들을 마주친 시점에서 우리는 가난한 농업국가, 그들은 이미 발전된 산업국가였다. 이 경험은 한 문장으로 요약되기 쉬운데, “서양은 산업국가, 우리는 가난한 농업국가”라는 식의 인식이다. 그리고 그 인식은 곧, “농업은 가난한 사람들이 하는 것(혹은 농업을 하면 가난해진다)”이라는 문화적 상식으로 번져 버렸다.


근대화의 목표는 산업화였고, 지금 우리는 초산업화(혹은 탈산업화)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산업의 시대가 바뀌어도 농업은 여전히 산업 이전의 시선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지금도 정치권에서 ‘산업화’라는 말을 당당히 쓰는 장면을 보며, 우리는 어쩌면 아직 그 문장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세계를 호령하는 제국들은 평화의 시대에 속내와 이빨을 숨긴 채로도, 넓은 땅과 인구, 자연자원과 제국주의 시절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커다란 부’를 재분배하고 조정해 왔다. 그리고 새로운 도전자가 등장할 때마다 그들을 좌절시키는 방식으로 질서를 유지해 왔다. 내가 보기엔 그 상대국이 한때는 일본이었고, 그다음은 중국(혹은 BRICS로 대표되는 집합)이었다.


짧은 내 소견으로, 한국은 근세 이후 세계 정치경제에서 ‘주요한 결정자’로 나선 경험이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제국주의가 무엇인지, 제국이 산업을 어떻게 구성하는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최근 어떤 정치인의 발언을 들으며(그 의중이 무엇이든), 우리 정치권과 사회가 ‘그들’의 한 무리 안으로 들어섰다는 자신감을 과시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어떤 자신감은 때로 위험하고, 어떤 자신감은 때로 필요하다. 문제는 그 자신감이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가릴 수 있는가다.)


제국이 산업을 어떻게 구성하는가를 생각하면, 나는 자꾸 ‘무결성’과 ‘완결성’ 같은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관대할 수 있는 구조,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질서를 설계할 수 있는 구조 말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현대 최고의 제국은 미국이다. 그런데 그 미국이 관대함을 잃어가고 있다. 봐줄 수 없으니 협박을 하고 견제를 하고, 때로는 고립을 자처한다. 유럽과 다른 나라들도 반응하지만, 사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소위 ‘south’ 국가들은 국제경찰이 사라진 세계에서 더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자원은 부족하고 인구는 많으며, 산업주의적 무역경제 속에서 정치적 불안정이 쉽게 증폭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제국이 될 수 있을까. 제국이 되려면 결국 ‘무결성, 완결성’을 가져야 한다. 그를 위해서는 국방력과 외교적 주도권이 확보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부강해야 하며, 문화적 영향력까지 강해야 한다. 최근 한국 사회는 어떤 자신감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그 자신감이 ‘근거 있는 자신감’인지 ‘기분 좋은 착각’인지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


이런 맥락에서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의 반도체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단지 물질 ‘반도체’가 아니라, 세계 산업 생태계에서 정치경제적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는 자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액의 연봉과 보너스가 아깝지 않다는 논리도 성립한다. 그 산업의 사원들은, 과거 제국주의 시절 영웅적 군인의 서사를 부여받듯, 어떤 시대의 ‘필수 인력’이자 ‘국가의 자산’으로 호명될 수도 있다.


그런데도 무엇인가 불안하다. 나만 그럴까. 사우디아라비아와 베네수엘라 같은 나라들을 떠올리면, 특정 자원에 대한 의존이 국가 운명을 어떻게 흔드는지 분명해진다. 특정 자원(혹은 특정 산업)에만 의존하는 국부의 한계는 명확하다. 왜냐하면 특정 자원은 특정 성격의 자본을 구축하고, 그 자본의 흐름은 단일해지기 쉽고, 그 자본이 유입된 사회는 양극화와 파편화가 조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가 저 기사를 보자마자 느낀 질투심의 연원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질투는 단지 “돈을 많이 받는다”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이익을 분배하는 집단 ‘안’에 내가(혹은 우리 분야가) 있지 못하다는 확신, 그 소외감에서 나온다. 물론 개미투자자로서 투자해서 이익을 공유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업이 이익을 실현하고 공유하는 방식은 정말 다양하다. 기술에 재투자할까, 주주에게 나눠줄까, 사원들에게 격려금을 줄까, 소비자에게 직접 보답할까, 사회복지에 지원할까, 아니면 늘 논란이 되는 이사진의 이익으로 구현될까. (제도와 법이 있다고 해도, 안정화된 시스템에서 ‘결정자의 이익’을 본질적으로 훼손하는 제도는 많지 않았다. 단지 그 분배의 양식이 정치적 상황에 의해 달라질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소외되었다고 느끼는가. 농산업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한 명의 학자로서 이런 감정이 드는 이유는 결국, 반도체 산업의 실익이 농산업으로 회귀하는 흐름이 없거나—있더라도 매우 약하다고—느끼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농산업은 이미 큰 이익을 구현하기 어려운 구조에 들어와 있다. 기상과 지리적 위치와 규모의 한계가 분명하고, 탈산업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며, 농업에 대한 이미지가 산업주의 이전의 층위에 고착되어 있는 한, 농업은 빠른 속도로 ‘사회복지사업화’될 것이라고 나는 거의 확신한다.


그리고 농산업을 좌지우지하는 가장 큰 주체는 정부다. 정부는 관료가 지배하는 조직이고, 그 조직이 추구하는 목표는 산업 주체들과 다를 수밖에 없다. 정부는 조정하고 조율한다. 그것을 통하여 국민 총이익을 크게 만들고, 소외되는 국민을 최소화하는 것이 최선일 수 있다. 그래서 정부는 ‘남는 것에서 떼어내고, 모자란 곳에 채워 넣는’ 역할을 꾸준히 수행한다.


따라서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정부가 농업을 ‘농산업’, 즉 산업으로 보는가, 아니면 ‘농촌과 농민’, 즉 복지의 대상으로 보는가. 내 짧은 소견으로는, 지금의 농정은 복지 정책이 중심이라고 거의 확신한다. 농업의 GDP 비중이 낮아지고(2% 미만), 이익을 실현하는 농기업은 제한적이며, 농촌 인구 구조 변화는 농업이 산업으로 성장할 기반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농산업을 발전시키는 길은, 기존의 것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타산업이 농산업을 성장시키도록 강제하든지—대략 이 두 갈래처럼 보이는데—둘 다 쉽지 않다. 국제 시장에서 한국 농업이 뻗어나가게 할 제도적 자물쇠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농업은 늘 타산업의 성장이라는 전제를 달고 자유무역의 빗장을 걸어왔고, 높은 관세율을 유지해 왔다. 한편 높은 식량 및 식품 소재 수입 의존은 국내 농식품 가공과 농자재 산업이 성장할 시장성을 위축시켜 왔다.


성장의 한계가 분명한 산업에 민간 기업이 투자할 논리가 잘 통할 리가 없다. 국내에 농업을 가둬 두는 농정의 한계다. 나라가 소위 ‘제국’을 지향한다면, 농업도 결국 개방되고 수출입이 활발한 상황에서 국제 수준으로 토지·자본·노동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 기반이 조성되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특정 산업을 국내 수준에만 묶어 놓으면, 결국 제국적 질서 속에서는 우리만 손해다. (이 말은 불편하지만, 현실의 경쟁은 대개 그 불편함 위에서 굴러간다.)


그래서 다시 묻게 된다. 우리는 어떤 미래를 선택해야 할까. 잘되는 산업에서 세금을 떼어 농산업에 나눠주는 것이 바람직하기만 한가. 농민이 생산하는 모든 것을 사 주고, 농촌에 산다고 돈을 주고, 농업인이 다른 일도 하게 해 주는 것이 전부인가. 보호는 결국 산업의 활력을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지는 않는가. 보호가 사라질 때, 그 산업의 근간인 생물자원 확보는 더 어려워지지 않는가.


제국은 완전하고 무결한 것을 추구한다—라는 생각은 어쩌면 나의 멋대로인 상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택은 늘 남는다. 우리는 큰 나라를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소박하게 적당히 살면 되는가. 그리고 농산업의 사활이 이런 거대한 국가적 결정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보통 사람들은 체감하기 어렵다. 그런데 기후변화 같은 환경 문제, 범죄 문제, 재난 문제처럼—실행은 정부와 사회가 하더라도—그 생각의 뿌리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있다. 우리는 그것을 ‘국민 의식’이라 부른다.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오죽하면, 한 두 세대는 “전쟁만 없어라” 하고 살았을까.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무엇인가를 쓴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