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버릴 때 무엇을 얻게 될까?

by 진중현


방금 아내와 이야기를 끝냈다. 아내가 공부하는데 정말 열심히 가속페달을 밟는 것 같아서, 50대 나이가 그러다 큰일 날까 봐 걱정이 들어해 줄 말이 필요했다.


"나는 아버지, 선생님, 그리고 나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 같아."


그게 아마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그때, 처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책을 읽다가 머릿속에 남았던 이야기를 내 나름대로 풀어낸 말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때에는 '극복'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사실은 '놓는다'라는 말이 맞다는 것을 얼마 전에, 그게 '나'에게 해당되는 순간이 와서야 알았잖아?"


사고의 역주행이 되었다. 아버지와 선생님을 극복한다는 말은 아버지든 은사님이든 사회에서 밉든 곱든 만나는 사람들에게 어떻든 핑계 대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50이 넘어서야, 더 이상 아무도 핑계 댈 사람과 환경이 없는 상황이 되자 그 말의 진의를 알게 된 것 같다.


우리는 '철들었다'는 말을 한다. 부모 보기에 아이가 친구나 형제 탓을 안 하고 올곳이 자기반성을 하면 철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아이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보고야 진짜로 철이 들기 '시작한다'.


부모님이 어떤 사람이든 아무 상관이 없으려면, 사회경제적으로 완전한 독립이 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학교에서 은사님이 나에게 아무 상관이 없으려면, 독립적인 지위와 명성을 획득해야 한다. 또는 별도의 독립적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그러나, 탓이 사라지고 나면 비로소 철이 '드는 줄 안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대소사에 흥분하고 현혹되고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깨닫는다.


"사람은 참 여러 번 철이 들어. 비로소 나를 내려놓는 순간이 될 때, 본래의 관계들을 다 놓을 줄 알더라고."


그런데, 나를 완전히 놓는 것은 죽을 때다. 죽지 않고서야 그게 가능한가?


소위, '죽기밖에 더 하겠느냐'라는 마음으로 하는 열정을 말하곤 한다. 우리말에도 남아 있다. '... 하느라 죽겠다.' 그 말은 '... 하느라 내가 나를 놓치겠다.'라는 말과 같다.


그러나, 진정으로 나를 내려놓아야 할 순간이 많음을 느끼고, 그것이 더 가치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족한 체력과 시간이 나로 하여금 더 소중한 것에 집중하도록 하고, 그래서 효율보다 맥락을 중시하게 된다.


나이가 들어도 잊히지 않는 것은 그렇게 면면히 흘러내려온 기억과 의 식의 흐름이고, 그것은 수년만에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개인에게는 수십 년, 전통에서 수백 년의 꾸준한 기록과 축적이 개인에게 평화를 줄 수 있는 논리적 근거이기도 하다.


매일 정리하고 청소하고 그러느라 마음의 평안을 찾지 못하는 이유도 그것이리라. 그러나, 아내에게 물었다.


"당신은 벌써 밀크씨슬을 식물 관점에서 연구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것 같아. 세계적으로 그런 연구자가 몇이나 있나? 그리고, 아마, 영채, 바질, 엉겅퀴, 식방풍도 있잖아."


"여유를 가져. 알고 싶은 게 많아서 그 꿈 때문에 계속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잖아. 알아주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복이지."


스스로가 통제할 수밖에 없고, 스스로를 스스로가 책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한다는 말이 거짓인 것은 철이 덜 들어서 그렇다는 것 정도는 이 글을 읽은 사람이면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부간에 종종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는 것이 있기에, 또 가족도 그럴 수 있는 부분이 있기에, 애증이 남곤 한다. 그래서, '나를 버린다'는 것은 여전히 조심스럽고 어려운 말이다.


하지만, 마지막 그 순간에 가장 현명한 판단이 있겠지. '나를 버리는' 경험의 크기와 비중이 커지고, 결국 그것이 전부가 되는 순간, 나에게 주어지는 무엇인가가 또 있을까.


어쩌면, 누구에게나 가장 큰 질문이겠지.


(아무도 답을 못했고, 아무도 알려 주지 못하는 것을 보아, 그게 아주 소중하거나 강압을 받아 폭로를 못하거나 둘 중 하나다. - 그게 각각 '천당'과 '지옥'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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