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이 교수의 필즈상 수상을 보면서, 나와 우리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본다
허준이 교수의 필즈상 수상은 경사다.
나도 공부를 하는 사람이고, 고교 시절에 한 번쯤은 순수과학 또는 수학자가 되고 싶은 생각도 해 본 사람이다.
내 기억에 국민학교부터 중3까지 학교 시험에서 단 한 개의 문제도 틀려본 적이 없었고, 학원이나 과외 교육 한 번 없이 학교의 방과 후 지도 약간을 받은 정도였는데, 중3 때 수학경시대회 대비반에 선발되어 공부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어려운 논술식 문제 7개인가 중에서 단 2개를 풀었다는 이유 만으로 그 반에 들어갔는데, 열세 반 중에서 선발된 단 7명 중의 한 명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그중에서 선행학습을 하지 않은 유일한 학생이었던 나는 결국 수학경시대회에는 나가보지도 못했다. 난생처음 보는 문제와 그런 문제를 풀기 위한 또 다른 해법을 공부하는데, 거의 자습으로 이루어진 그런 곳이었기 때문이다.
일곱 명 중에서 가장 수학을 못한 탓인지 종종 짝을 지어 운동을 할 때도 빠지곤 했다. 한 명은 음대 교수의 아들이었는데 못하는 게 없었고, 한 친구는 한겨레신문사 창립 등을 들었다며 이야기하곤 했으며, 대부분 두꺼운 사전(나중에 정석 수학임을 알았는데)을 들고 다녔다.
그런 책 하나 안 보고 그 반에 들어가 있던 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했어야 하나? 여하튼 나는 풀 수 없는 문제가 풀 수 있는 문제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집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서울대 재수를 하는 동네형을 만나 몇 문제 같이 풀었다. 이해력이 좋고 결국 수학을 잘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공부는 너무 싫었다. 2학년 1학기 때까지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자율학습 때에도 국사책 펴 놓고 졸곤 하였다. 일본 국립대학 입시 수학 문제는 정말 어려웠다. 그 책을 구해다가 하루에 한 문제 풀곤 했다.
수학을 좋아했으나 결국 입시 수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욱이 대학에 들어와서 대학 전공을 하는 동안 수학을 쓸 일이 별로 없었다. 1학년 때 미적분학을 배웠고, 2학년 때 부전공으로 응용해석을 배웠으나, 대학 생활 자체에 대해 고민하고 흥취가 없던 시절이라 힘들었다.
우리 애들에게 수학을 강조한다. 최근에는 생물을 연구하는 데도, 품종 개발 연구를 하는 데도 행렬과 선형대수학을 공부하라고 강조한다. 독학하느라 나도 잘 모르지만, 계량 유전학과 통계유전학, 생물정보학을 공부하는 데, 수학은 필수다.
융합학문을 하라고 한다. 그러다가 보니 온통 산업화, 실용화, 그리고 돈이 되는 것으로 수렴한다. 많은 것을 비빔밥을 만들지만, 대부분 단기적 성과에 맞춘 것이다. 기존의 깊이 있는 공부를 하는 사람이 정말 융합을 잘할 텐데, 정작 다른 전공의 전문가가 모이면 피상적인 대화를 하기 일쑤다.
깊이 있는 학문을 하려면 수학이 필수고, 수학적 사고가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우리 대학은 멍석을 잘 깔아놨을까? 초중고 심지어 사교육에서도 깊이 있는 수학을 접할 기회를 주는 것일까?
마찬가지로, 모든 학문의 깊이가 깊어지는 것을 잘 이해나하고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학문이 깊어지면 더 높은 경지에서 전문가들이 교류한다. 속된 말로, 노벨상 수상자끼리 교류할 테고, 각 분야 최고 수준 학문을 성취한 이들끼리 교류할 테고, 그렇고 그런 수준의 과학자끼리 교류할 테다. 융합은 각 계층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수준차가 크면 대화가 잘 안 된다.
우리는 어쩌면 기계적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누구도 잘 모르는 것에 대하여, 잘 모르는 방식으로 잘 모르는 것을 막연히 쌓아 올리는 것이다. 형태는 탑인데, 속은 빈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쉽게 무너져 버리는 바벨탑이 되어 버리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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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학교 1학년 때 만난 수학 선생님에 대한 좋은 기억이 있다. 당시 시험을 볼 때 답안지는 OMR이 나오기 전이어서, 각 문항별로 해당 번호의 네모칸에 연필로 색을 칠하는 것이었다. 답 위치에 맞추어 구멍을 낸 종이를 위에 대면, 까맣게 보이는 네모의 수를 세어 채점을 할 수 있었다.
선생님께서 내 것을 채점하다가, 객관식 답안의 검은 네모가 있어야 할 자리에 글씨가 쓰여 있는 것을 보셨단다. 그래서 나를 불렀다.
"중현아, 네가 진짜 100점이다. 보기 중에는 답이 정말 없더라. 그 생각을 소신 있게 쓴 네가 100점이고, 그렇게 계속 소신을 밝히고 살거라."
그 선생님은 수학이 어떤 학문인지를 정확하게 알려 주셨다고 생각했다. 난 당시 수학을 매우 좋아했는데, 그것은 거짓말을 안 하는 유일한 과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수학=정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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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위 과학자가 되었다. 기술자의 면모도 있다. 그런데, 나는 과학자 이전에 학자가 되겠다 했고, 학자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겠다 했다. 그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살다가 보니 양심을 많이 팔았다. 정직을 배신한 나에게 학문은 깊은 내면을 보여 주지 않았다. 깊이 있는 학문을 하려면, 나의 내면부터 정직하고 신뢰할 수 있어야 하며, 예측 가능해야 했다. 그러나, 계량된 업적과 점수를 맞추려면 너무나 힘들었다.
결과론적 공부에 길들여졌구나 하는 깨달음도 몰려오는 업적 관리 때문에 잊기 십상이었고, 숫자가 현금인 학계의 실정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잘 살고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정말 잘 사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종종 해 본다. 양심의 소리를 외면할 때도 종종 있었다. 어쩌면 삶은 외로워진 양심을 저녁마다 불러내 그 눈물을 닦아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사회나 명암이 있다. 과학도 수학도 명암이 있을 것이다. 얼마 전 MDPI 출판사에서 predatory journal 논쟁이 있었는데, 그것도 수학계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 일로 인하여, 그 출판사와 open access journal들이 도매급으로 의심을 받곤 한다. 아이러니다. 어린시절에 그런 수학 공교육을 받았던 사람 중에 필즈상 수상자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