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시아에 도착해서, 이곳 쌀생산자협회 회장님이 주선하신 식사를 경험하게 되었다. 스페인 하면 역시 빠에야!
빠에야는 우리에게도 익숙한데, 샤프란으로 노란색을 띠는 '발렌시아' 빠에야가 가장 유명하다. 바로 그 본고장에 온 것이다. 발렌시아는 국립공원이 있는데, 호수와 그것을 둘러싼 방조제, 그 안쪽에 위치한 습지로 만들어진 벼 재배지로 구성되어, 일찍이 쌀로 요리를 하는 문화가 정착되었다.
쌀생산자협회 회장님은 요리 품평에도 대가이면서, 셰프들과 긴밀한 관계를 통하여, 생산자들이 소비자가 찾는 쌀을 지속적으로 관리하여 생산하도록 하는 분이다. 문 교수 말로는 '지리적 표시제'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Bomba라는 품종이 약 130년 된 빠에야 주요 품종이었는데, 이것은 요리 후에도 물성이 지속되어 밥모양이 유지되는 것으로, 아밀로스 함량이 21% 정도로 약간 높다. 그런데, 지금은 전체 쌀의 10% 이하의 생산되며, 이제는 생산성이 높은 새로운 신품종으로 대체되었고, 4인 정도가 먹을 때에도 적당한 품종이 되었다고 한다.
물성도 중요하지만, 국물을 잘 흡수하는 품종이 중요한데, 신품종인 Senia와 J.Sendra 등은 수량성과 함께 이러한 특성이 좀 더 좋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먹을라치면, 밥이 모양이 변형되기 때문에 그러한 면에서는 제한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스페인도 거의 완전히 직파법으로 벼를 생산하며, 단간 종에 도복이 강한 품종이 활용되는 것이다. 생산량이 높으니 당연히 가격이 낮아지는데, 이렇게 높아진 생산성으로 지역 특산 음식인 빠에야를 확산시킬 수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서울대가 개발하고, 해남땅끝황토친환경이 기른 '서농 21호' 백미를 전달했는데, 내가 이해하기로, 아밀로스 함량의 차이 정도를 제외하고는 벼와 쌀의 특성, 벼의 재배 시기 등 많은 면에서 유사성을 발견하였다. 덩달아 농진청이 개발하고 미실란이 상품화하는 '도담쌀'도 전달하였는데, 그들에게 고아밀로스 품종 현미를 전달하면서 설명하기 힘들었다. 일단 현미는 전혀 관심 밖인 듯 보였다.
빠에야에 쓰이는 두 개의 품종. 사진에서 먼저 보이는 것이 봄바, 뒤의 사진 세 개는 세니아로 만든 빠에야다.
봄바는 이탈리아에서 먹어본 리조토처럼 al dente 하다. 씹으면 단단하고 전분 느낌이 확실하고, 퍼짐성이 거의 없다. 빠에야는 본래 논에서 일하면서 함께 만들어먹던 음식, 또는 파티 음식으로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함께 먹은 음식이기에, 익힌 쌀이 퍼져버리면 안 되었다.
봄바는 전통 품종으로서, 이제는 빠에야에 쓰이는 쌀의 약 10% 정도에 사용된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 전통적 가치와 빠에야 본연의 맛과 느낌을 잘 살리기 때문에 인기가 많고 대접받는다.
발렌시아는 쌀로 특화된 지역으로, 빠에야를 먹는 날을 정해서 프로모션을 진행하고 있다. 빠에야도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계속 더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당연하다. 결국 빠에야 쌀도 생산성을 늘릴 수밖에 없다.
봄바는 키가 커서 잘 쓰러지고 병에도 약하고 수량도 적다. 그래서 단간종으로 만들고 다분얼 품종으로 개발한 것이 '세니아'인데, 이미 발렌시아 지역에 5개 정도의 세니아 계열 품종들이 있다. 꼭 느낌이 통일벼 같은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 품종들을 모두 '세니아'로 통칭하기 때문이다.
세니아는 4명 정도 먹는 빠에야에 사용되는데 무리가 없다고 한다. 어제 식당에서도 먹었던 것이 세니아로 만든 것이었다. 아마도 한 가족 또는 친구 몇 명과 먹을 기회가 더 많으니, 저 그릇(그릇 이름을 따라 '빠에야'라고 이름 지워졌다고 한다) 사이즈에서 견디는 시간은 큰 그릇에서의 시간에 머무는 시간보다 짧고, 그래서 세니아 정도의 퍼짐성만 가지고도 시장에서 인정할 수 있는 것 같다. 여기에 생산자들이 시장 확대 노력을 더 하려면, 세니아를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른 식당에서 먹어본 것이고, 추가된 재료들이 다르기 때문에 색이 달라 보이기도 하겠지만, 이 두 품종이 소스를 흡수하는 능력도 달라서 색이 달라졌다고 볼 수 있다. 봄바의 치자색이 훨씬 좋고 먹음직하다. 확대해 보면 모든 밥알이 모양이 깨진 것이 없다. 반면, 세니아는 중간중간 밥알이 터진 것이 보인다.
이 두 품종 중 어느 것이 더 우수하다고 말할 수 없다. 모두 소비자가 선택하고 시장의 요청에 부응하여 활용되기 때문이다.
우리 쌀을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지지받는 벼를 외국 출신이다, 너무 오랫동안 쌀 산업을 정체시킨다는 등등의 이유로 비판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혹시 품종 자체를 계속적으로 다양화하는 수단이 목적을 뒤집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발렌시아의 보통 사람은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쌀을 먹는데, 아마도 빠에야로 먹을 것이다. 대부분 고기와 빵을 비롯한 다양한 식품을 소비하는 것이 현대의 우리와 닮았다. 이런 시장에서도 쌀이 계속 사랑받고 있는 것이 오히려 대견할 정도다.
빠에야에 즐겨 사용되는 쌀은 이곳의 흙, 물, 심지어 말라리아와의 싸움 등 자연, 지리, 역사와도 관련되어 결정된 것으로 생각된다. 쌀을 먹기 시작한 것이 7-8세기 정도부터인데, 풍토를 보면 밀과 고기가 먼저였을 것 같다. 쌀은 다른 형태의 식품(우리로서는 현대적 식품)이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 출발하였고, 그 다양한 식품군 내에서 성공적으로 안착되어 무시 못할 위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 주요한 이유는 생산성보다는 맛, 그리고 우수한 식품원료로서의 가치 아니었을까 한다.
1803년, 유럽의 산업혁명으로 동력이 만들어지자, 거의 30여 년 만에 정미기를 개발하고, 1895년에 벼 나락부터 완전립 구분까지 거의 모든 체계를 하나의 시스템에 담을 수 있는 체계가 구축되어 특허까지 받아내었다. 수확 후 관리체계의 확립은 소비자의 취향과 직결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정 공장장은 돈과 권력에 관계된 파워풀한 자리였다는 설명이 그런 생각에 힘을 보태었다. 철저하게 소비자가 먹기 좋아하는 쌀을 제공하는데 목표를 두었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여기에서 어떤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는 1900년 초의 스페인처럼 식문화가 다양한 시대, 서구화된 식문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쌀 소비를 촉진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쌀 소비량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어쩌면 이미 도시민과 10대는 일주일에 세 번 정도만 밥을 먹고 있을 것 같다.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우리가 생각하는 맛있는 밥의 기준이 무엇일까? 연구실에서 학자들이 주장하는 미질의 기준이 소비자의 입맛을 반영하지 못하고, 여전히 전통적인 생각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이 맛있다고 하는 밥은 도대체 뭘까? 사람들이 더 맛있게 밥을 먹게 하려면 어떤 기준으로 쌀을 찾아내어야 할까.
품종을 개발하는 사람으로서, 현대의 전통적 육종을 계속 고수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해 봤다. 근대의 우리나라 벼 육종은 생산성을 높여 국민들을 먹여 살리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현대의 벼 육종은 그럴 수 없다. 먹을 것이 많고 다양하다. 식량위기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오히려 쌀 의존도를 낮추고 다양한 식품을 소비하게 하는 것이 더 안전할 수도 있다.
시장에서 살아남는 식재료는 다양성과 균일성, 안정성을 전달해야 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육종가적 마인드와 동일한데, 그것이 꼭 새로 품종으로 개발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기존의 품종들이 우선적으로 적정한 지표를 통하여 활용 가능한 형태의 데이터로 프로필화 되어야 한다. 소통은 공통의 언어와 데이터로 교류가 가능하다.
시장에서 어떤 형태로 쌀을 원할까, 이제는 주요한 식재료로써의 쌀이 되어야 한다. 훌륭한 식품과 요리를 만들어 주는 쌀. 그 쌀의 주요 지표는 뭘까.
내 눈에 봄바와 세니아 쌀 구분이 잘 안 되었다. 두 쌀의 외관은 소비자의 관심에 정확하게 일치하였겠지? 쌀 품위와 고유의 미질 기준을 유지하면서 위기를 극복하는 육종법이 핵심이다. 가령, 분자마커 활용 정밀여교배 육종 및 세대촉진 등이다.
생산성, 기후변화 관련 형질 등 외관 이상의 것은 정부뿐만 아니라, 훌륭한 생산자 조합의 리더가 철학을 가지고 진행하면서 이끌어내어 주며, 그것을 훌륭한 기술을 활용하여 구현하는 과학자의 끈기도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