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말을 빌리면, 어렸을 때 난 무슨일이 생기면 아빠에게 쪼르르 달려가는 일명 '아빠딸'이었다.
단칸방 하나가 딸린 강화도어 가게에 살았던 우리가족은 가난하다는 말이 전혀 신경쓰이지 않을 정도로 행복했다.
표현이 서툴렀던 엄마가 갓난아기였던 언니에게 '선아야, 너는 참 행복한 집에 태어났단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내가 태어났다. 행복은 더 해졌고 마지막으로 남동생이 태어났을 때 아빠는 만세를 외치며 친할머니가 아닌 외할머니께 제일먼저 전화를 했단다.
사랑이 넘치고 웃음이 가득하고 진짜 행복이 뭔지를 깨닫게 해줬던, 아빠와 함께한 금보다 귀한 그 시간은 남동생의 돌잔치를 하고 100일 정도 후에 영원히 가슴에 남길 추억이 되어버렸다.
그 날, 우리가 감기기운이 없었더라면. 아빠가 병원에 갈 시간이 있었더라면. 그래서 아빠가 정확하게 진찰을 받았더라면.
그렇게 아빠는 다음날, 모두가 잠든 새벽에 엄마의 옆에서 하늘나라로 갔다.
엄마는 평소 노래하는 걸 좋아해서 자장가를 스스로 부르며 자던 내가 한동안 노래를 부르지 않아 저 작은것도 아빠가 이제 없다는 걸 아나보다 하셨단다. 아빠가 없다는 걸 정확하게 인지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꽤나 어린나이에 그 사실을 알고 있던건 기억한다.
7살 겨울, 어린이집에서 아빠와 함께하는 수업을 한다고 했다. 당시 사업이 잘 돼서 늘 바빠 자주 보지도 못했었던 큰아빠는 우리아빠대신 그 수업에 오셨다. 수업은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왜 내가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했다. 큰아빠는 웃고 있었는데, 나는 그 얼굴이 싫었다. 하지만 감사하다고 해야만 했다. 그 순간이 내게는 감사해야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점차 아빠가 없다는 건 생각보다 큰 아픔이라는 걸 알게됐다.
또한 가끔은 감당안되는 눈물이고 그 눈물은 늘 가슴저림이 동반한다는 것도.
그리고, 떠난 아빠의 자리는 여전히 내게 남아있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