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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전 Aug 18. 2021

삶을 즐겁게 만드는 자질

프레이리의 교사론

| 그때 그 아이: 삶이 즐겁지 않았던,


  어느 해 3월 첫 주, 역사 수업의 첫 시간이었다. 첫 수업은 으레 역사의 개요와 일 년의 수업에 대한 소개로 가볍게 보낸다. 아이들도, 나도, 처음부터 열공모드로 들어가기는 조금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서로를 탐색하면서 워밍업 시간을 가진다고나 할까. 자리 하나가 비어있었지만, 담임선생님과 상담 중이라고 반장이 말했다.


  우리가 역사를 알지 못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쉽게 설명하기란 어렵다. 역사 과목을 재미있게 생각하는 아이들도 더러 있지만, 수업 시간의 역사는 늘 지루하고 자신들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는 무미건조한 과목으로 여기는 아이들도 적지 않다. 슬픈 일이지만, 역사 교사인 나 자신도 추억 속에 남아있는 역사 수업 시간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첫날은 자신들의 역사를 돌이켜 보게 하면서 과거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곤 했다. 그날도 낯선 아이들을 바라보며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학년이 바뀌어 처음 짝이 된 친구를 잘 모를 때, 그 친구에게서 자신이 겪었던 경험담을 듣게 되면, 친구를 조금씩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현재의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 '과거의 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그때, 갑자기 교실 뒷문이 "드르륵,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수업을 멈추고, 아이들과 나는 일제히 뒷문을 바라보았다. 한 아이가 성큼성큼 뒷문으로 걸어와 자기 자리로 가더니 가방을  휙 둘러메고는 다시 뒷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큰 소리로 뒷문을 "쾅~" 닫고는 사라졌다.


  아이들과 나는 서로 쳐다보며 잠시 멍하다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나 무시당한 거 맞지?" 

  아이들 속에서 약간의 웃음소리가 났다. 나는 순간 저 아이가 학교를 뛰쳐나갈 것 같은 생각에 반사적으로 교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 반은 1반이었고, 그 사이 아이는 2, 3, 4, 5반을 가로지르는 긴 복도를 지나 계단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냅다 뛰어가서 그 아이의 팔을 덥석 잡았다. 

  "아이 씨팔! 이 팔 놓아요. 난 학교 안 다닐 거예요." 

  "그래. 알았다. 일단 들어가자." 

  "이따위 학교 안 다녀요. 씨팔. 우리 엄마 아빠를 왜 들먹거려요~ 이거 놓으라고요. 씨팔"


  아이는 연방 씨팔을 되뇌며 저항을 했지만 한국의 아줌마들이 자랑하는 강력한 팔뚝을 가지고 있던 나는 그 아이를 끌고, 다른 반에서 창문 너머 호기심 어린 눈으로 힐끗힐끗 쳐다보는 긴 복도를 다시 지나 1반 교실로 돌아왔다. 교실로 돌아와서도 씩씩거리며 분을 삭이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고 있는 아이를 붙들고 있는 채로 반장에게 담임을 모셔오도록 하고, 잠시 뒤에 담임이 와서 미안하다고 말을 하고는 아이를 상담실로 데리고 갔다.


  그 소란이 끝나고 난 뒤, 다시 수업을 해야 했지만, 잠시 아이들과 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아이들은 가만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방금 전의 해프닝에 대해 뭐라고 말을 해야 했다. 어쨌거나 교사인 내가 있는 자리에서 그것도 수업 시간에 온갖 욕설을 내뱉지 않았는가. 나는 말을 시작했다.


  "여러분도 놀랐겠지만, 선생님도 사실 좀 당황했습니다."

  "......"

  "선생님은... 저 아이를 모릅니다. 지금 여러분들을 모르는 것처럼. 그래서 저 아이의 행동이 어떻다고 말하기는 좀 어렵네요. 사실 저 아이가 과거 어릴 적부터 어떤 환경에서 지내왔는지, 어떤 경험을 했는지 혹은 지금 현재 개인적으로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아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 행동을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

  "그리고 선생님은 그 아이가 뱉은 욕설이 선생님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을 향한 것도 아닙니다. 그 아이는 이유가 무엇이든 온몸에 분노가 가득 차 있고 그 분노로 인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욕설이 튀어나왔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뭔가 이유가 있겠죠.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아마 그 아이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도 그런 생각으로 그 아이를 이해했으면 좋겠네요."

  "네..." 

  누군가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이렇게 어떤 사람의 과거를 안다는 것은 현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고, 또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과거로 이루어진 역사를 왜 배워야 하는지 알겠죠? 그럼~ 다시 수업을 계속하도록 합시다~"

  아이들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


| 교사의 자질과 전문성


  교사의 ‘자질’과 ‘전문성’은 많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소재이다. ‘자질’이라면 인성의 의미가 많이 포함되어있고 ‘전문성’이라면 뭔가 지식 또는 방법 그리고 기술적인 면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교사들이 지녀야 할 전문성에 대한 주제로 쓰인 많은 논문들에서는 ‘전문성’의 의미 속에 '지식'이나 '방법적인 기술' 부분의 크게 자리하고 있으며,  ‘인성’의 부분은 그다지 부각되고 있지는 않다.


  교육이 사회변혁을 위한 궁극적인 수단은 아니지만, 교육이 없으면 사회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프레이리는 교육이란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방법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교육은 직접 세계의 변화를 목적으로 하지는 않지만 세계를 읽고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인간을 만들어가는 행위인 것이다.


  한동안 하워드 가드너의 ‘체인징 마인드’라는 책을 읽고 자극을 받아, 교사를 인간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직업으로 생각하며 내가 교사임이 너무 기쁘게 느껴졌던 적도 있었다. 게다가 프레이리의 또 다른 관점에 의하면 교사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 직업으로써 궁극적으로 사회를,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직업이기도 하다니!


  그런 만큼 교사의 전문성을 단지 어떤 관점이나 지식만을 의미하거나 방법 또는 기술을 뜻하는 것으로만 여기기에는 사회와 세계에 대한 교사들의 의미가 너무 크게 느껴진다. 그래서 프레이리가 말하고 있는 진보적인 교사의 자질들이 깊게 다가온다. 교사의 전문성 안에는 ‘반드시’ 교사의 올바른 자질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프레이리는 교사가 지녀야 할 자질을 여러 가지 들고 있다. 용기, 자기 확신, 자기와 타인에 대한 존중을 필요로 하는 ‘겸손’, 싸우고, 고발하고, 선언할 권리와 의무를 믿는 사람들의 ‘무장된 사랑’, 싸우고 사랑할 수 있는 ‘용기’, 서로 다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는 미덕으로서의 ‘관용’, 자유로운 선택을 그만두어야 할 만큼 어려운 ‘결단력’, 그 외 안정감과 자신감, 인내와 조급함, 말의 절제, 삶을 즐겁게 만드는 자질 등.....


  그가 주장하는 교사의 자질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디에서나 적극적인 삶의 자세가 묻어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을 프레이리는 ‘인간은 사회 참여적 동물이다’라고 주장할 것만 같다. 아니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것은 ‘인간은 사회 참여적 동물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가 마지막에 교사의 자질로 내세운 ‘삶을 즐겁게 만드는 자질’은 감동적이다. 얼핏 낭만적으로 받아들이기 쉽게 느껴지는 이 문구 안에는 내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별로 경험하지 못했던 ‘어떤 것’-절실한 투쟁?-이 내포되어 있었다. 


  프레이리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 즉 “삶은 유능한 자들만이 만들어내는 것이고 민중들은 다만 그 목숨을 연명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거부한다. 그는 모든 사람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에 개입하여 삶을 계획하고 꾸려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어진 삶을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터를 가꾸고 자기 식의 삶을 사는 경험을 하는 것, 이 삶을 위해서는 권리를 위한 치열한 투쟁도 벌여야 하고, 두려움과 용기를 넘나드는 적극적인 자기 경험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삶은 안락함을 바라는 삶이 아니라 기쁨과 슬픔의 변증법이 살아있는 기쁨을 내포한다.


그래서 삶을 즐겁게 만드는 자질이란, 내게 주어진 이 삶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행하다면, 나의 삶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것을 바꾸기 위해서,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용감히 맞서 싸우는 노력도 불사할 수 있는 자질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 참여 정신은 언제나 소시민으로 살아왔던 나를 한껏 작아지게 만드는 것들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순되게도 그런 정신을 교사인 내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삶을 즐겁게 만드는 자질에 관한 프레이리의 글을 읽는 순간, 맥락 없이 왜 그 아이가 문득 생각이 났을까.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아직 어린 나이였음에도 제법 삶의 무게를 지고 사는 아이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아이도 자신의 삶을 즐겁게 만드는 당당한 의지를 가졌으면 좋았을 걸. 많은 이들의 응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으로 말이다. 누군가 가르쳐주었더라면. 그리고 그 누군가가 바로 교사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 에필로그

  그다음 날 그 아이가 교무실로 나를 찾아왔다. 담임선생님이 보낸 것이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나는 나를 찾아와 죄송하다고 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아이와 나와는 이해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때 그 시간에 자신의 교실에서 우연히 내가 수업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내게 화가 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 아이의 행동과 나를 별개로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 알겠다. 수업시간에 갑자기 들어와 그런 행동을 보인 건 잘못된 것이지. 네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아무렇게나 욱하는 성질은 조금 고쳤으면 좋겠구나. 그래도 이렇게 사과를 하러 오다니 기특하다. 앞으로 수업시간에 잘해보자꾸나"

  하지만, 얼마 후 나는 그 아이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 그때 일이 생각나곤 한다. 그 아이의 팔을 잡고 연방 "씨팔" 소리를 들으며, 복도를 걷던 순간이 말이다. 그 아이는 화가 나기도 했지만, 자신을 따라와 잡아끄는 나에게 어쩌면 못 이기는 척 돌아왔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생각보다 괜찮은 자신의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아니 그렇게 살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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