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이리의 교사론
|세계 읽기와 글 읽기
나는 ‘읽기’와 ‘쓰기’ 교육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이유가 좀 어이없지만, 내가 역사 교사였기 때문이다. ‘읽기’와 ‘쓰기’ 교육은 취학 전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을 위한 기초 교육이라 생각하였고, 초등학교 고학년 이후에는 대부분 글자를 읽고 쓸 수 있으므로 ‘읽기’와 ‘쓰기’ 교육보다는 더 중요한 교과에 치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문해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인식도 단지 글자 자체를 읽지 못하는 문맹 퇴치 프로그램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프레이리는 '읽기'와 '쓰기'는 아동뿐만 아니라 교사들에게도 꼭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읽는다는 것은
읽은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찾는 일이며
새로운 이해를 창조하는 일이다.
어? 음... 그렇지. 읽는다는 것은 읽은 것의 내용을 이해한다는 것이지... '읽기'와 '쓰기'를 단순히 1차원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나의 무지함에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은연중에 무엇이든 읽으면 당연히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마치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내 설명을 들으면 당연히 모두 알게 될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나도 많은 책들을 읽었고, 또 읽고 있지만 지금도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고 그냥 글자만 읽고 지나가는 적이 적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읽기’와 ‘쓰기’ 교육은 교사인 내게도 필요한 것이다. 아이들에게 세계 읽기와 올바른 글 읽기를 안내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사인 나 자신이 ‘읽기’와 ‘쓰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실행해야 한다. 또한 역사 수업 시간에서도 '읽기'와 '쓰기' 교육은 중요하고 또 필요한 것이다.
읽기를 가르친다는 것은
참여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해하고 서로 의사소통하는
이른바 이해를 둘러싼 창조적인 경험이다.
프레이리는 ‘읽기’와 ‘쓰기’ 교육을 위해서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감각적인 경험에서 시작해, 학교 언어에서 얻어지는 일반화로, 그리고 다시 만져볼 수 있을 만큼의 구체적인” 주변 일상으로 쉽게 옮겨가는 연습이 꼭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읽기를 가르친다는 것은 '텍스트 읽기'를 통해 그 텍스트와 상호작용하고 나아가 자기 자신 그리고 동료들과 의사소통하면서, 비로소 자신들의 일상을 이해하고 그 일상을 다시 창조하는 놀라운 과정이 될 수도 있다.
| 하나의 텍스트로서의 교실 읽기
교실 읽기는 마치 문자의 의미를 풀어 이해해야 하는 텍스트 읽기와 같다.
교사는 하나의 텍스트로서 교실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에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교실을 텍스트처럼 읽을 수 있다니! 너무나 신선하게 그 의미들이 다가왔다.
그러나 사실, 경력이 쌓일수록 교사들은 본능적으로 교실을 읽을 수 있다. 지금껏 담임을 하면서 학급을 운영할 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시간은 ‘매일 들어가던 아침 자습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 아이들과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나는 아이들의 동태와 근황을 파악하였다. 아이들이 무얼 하는지, 기분이 어떤지, 태도와 표정만으로 짐작이 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아이들에 대한 생활지도가 가능했다. 점심시간, 청소시간, 아이들과 무심하게 나누는 농담 한 마디, 장난스러운 동작 하나하나가 모두 아이들을 파악하는 계기가 된다. 물론 내가 아이들을 유심히 관찰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저절로 알게 된 학급운영의 노하우일 게다.
프레이리에 의하면 그것이 바로 ‘교실 읽기’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교사인 내가 교실에서 아이들을 바라볼 때 ‘교실을 읽으려고 의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교사가 되어 수년간의 경험을 쌓은 뒤, 저절로 교실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앞서 교실 읽기에 대해 내가 알고 있었더라면, 좀 더 일찍 더 나은 학급 운영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이유로, 프레이리 또한 초임 교사들의 경험과 관련하여, 학생들의 교실을 '읽을 수' 있도록 교사들을 준비시켜야 한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경험으로 교실의 분위기를 읽는 것은 체계적이지 않다. 그런 점에서 체계적으로 ‘인식’하면서 하나의 텍스트처럼 교실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 안에서 내가 교육할 대상인 학생들과 보다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교실 읽기는 마치 문자의 의미를 풀어 이해해야 하는 텍스트 읽기와 같다는 프레이리의 말에 경청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맥락, 즉 그들의 예절, 취향, 교사와 동료를 부르는 방식, 그리고 자기들끼리 싸움과 놀이를 관리하는 규칙 등 모든 것이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임을 이해해야 한다. 더구나 나와 관계를 맺는 이 '교실이라는 세계'는 매년 구성원이 바뀌고 있지 않은가. 교실을 새롭게 이해한다는 것은 이전에 이해했던 '교실이라는 세계'를 새롭게 재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교사라는 직업이 전문직으로 종종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로, 교사 고유의 수업이나 학급경영의 노하우가 전수되지 않는다는 것을 들기도 한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교실을 공개하지 않는 현장의 풍토는 교사들의 많은 경험들을 오로지 개인의 경험으로 사라지게 하고, 초임교사들은 또다시 처음부터 맨손으로 시작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사들의 '쓰기' 즉, 교실 읽기를 ‘기록’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교실은 교사들에게 하나의 세계이며, 교실 안에서 겪는 수많은 경험들은 바로 교사들의 일상이다. 교사로서의 '교실 읽기'는 바로 그들의 '세계 읽기'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교사들의 수업이나 학급 운영의 경험들이 '교실 읽기'와 '쓰기'를 통하여 기록되거나 녹화되어 그 노하우가 임상적으로 쌓이고 연구되고 축적될 때, 바로 그 경험들이 교사들의 성장을 도우며 나아가 교사의 전문성 또한 뚜렷해질 수 있을 것이다.
마치 하나의 텍스트처럼
교실을 '읽기' 위한 지적 훈련 가운데 한 가지 좋은 연습법은
교사들이 매일 기록하는 습관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의무에서가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학생들의 행동반응, 학생들의 말과 그 의미,
그리고 애정 어린 동작 혹은 거부 동작을
매일 기록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