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이리의 교사론
'교사'라는 직업 |
고리타분한 얘기를 하나 하자면, 라떼는 '스승은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도 있었다. 물론 우리 사회에 스며들어있는 유교 관념이 지금보다 완연했던,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이야기다. 그때는 부모들은 물론이고 지역 사회에서도 교사를 존경하는 분위기가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던 시절이기도 하다. 그래서 학교 안의 학생들도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예의와 경외감을 가지고 학교 생활을 하던 시기였다..... 아니,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
1970년대 이후 산업화 정책으로 우리나라의 경제가 급속하게 발달하던 시기의 '교사'는 직업으로서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다른 직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월급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교사'라는 직업은 사람들이 '(다른 것을 시도하다) 안되면 선생질이나 하지 뭐!'라거나 '여자 직업으로는 딱이야'라고 쉽게 내뱉는 그런 이율배반적인 인식이 깃든 직업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 자신이 오랫동안 교사를 해오는 과정에서 학교와 사회에서의 교사에 대한 인식은 완전히 전도되었다.
사회적으로는 전 세계의 모든 나라가 너 나할 것 없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고, 특히 코로나로 인해 미래가 더 불투명해진 요즈음, '교사'라는 직업은 과거에 비해 인기가 아주 높아졌다. 불안한 경제 흐름 속에서 다른 직업에 비해 '철밥통'이라고 불릴 만큼 안정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처럼 '안되면 선생질이나 하지'가 아니라, 이제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만큼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교사를 할 수 있는 시대다.
그러나 동시에 학교 안에서의 '교사'는 이전의 '스승'이라는 이미지는 사라지고 다만 '특정 교과를 가르치는 직업인'이라는 인식이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적어도 속마음이야 어쨌든, 겉으로는 예의와 경외감을 가지고 있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 학교 현장의 교사의 권위는 그저 힘없이 추락하고 있다.
가르치는 일은 보육이 아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사'는 중요하고 신성하며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직업이다. 그냥 단순히 '특정 교과를 가르치는 직업인'으로 치부해버리기에는 교사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너무 엄청나다.
교사는 아이를 돌보는 보모가 아니라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우리 모두가 진정한 교사가 되고, 진실을 선택하고 결정하고 규명할 권리를 위해
싸울 특권과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나 자신을 돌이켜보면 '교사'보다는 '보모'의 역할을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보다 돌보는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기 때문이다. 내가 가르치는 것보다 아이들을 돌보는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던 것은 물론 나의 선택도 있었지만, 학교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특성상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예를 들면,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의 급속한 진행, 청소년기 아이들의 특성, 꽉 짜인 빈틈없는 학교의 일과, 밀려오는 공문, 공기관이면 어디에나 있는 보수적인 일처리 등과 같은 환경 말이다.
교사로서 열심히 하려면, 저절로 '보모'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나 할까.... 내 생각이 그렇다는 말이다. 게다가 언제부터인가 사회가 학교에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보다 돌보는 것을 더 요구하고 있는 분위기... 이렇게 '교사'보다는 '보모'를 더 원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은 너무 과민한 반응일지도.
프레이리는 교사의 역할은 아이를 돌보는 '보모'가 아니라 '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의 '교사'는 '전문직으로서의 교사'를 의미하고 있다. 그는 교사를 '보모'의 지위로 격하시키는 것은 순진한 이데올로기적인 사고체계의 함정이 들어있어, 교사들의 투쟁 능력을 약화시키거나 고작 일상의 과업을 처리하는 데만 교사들이 몰두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프레이리에 의하면, 교사의 투쟁 능력은 말과 실천 간의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게임이나 이야기, 책 읽기를 통해 아이에서 어른까지 모든 학습자들을 고취하는 능력을 포함한다. 이를테면 말로는 사회적 약자를 옹호하면서 실천은 가진 자를 더 선호한다든가, 또 말로는 사회적인 여러 계층 간의 갈등을 부정하면서 실천은 어느 한쪽 편에 서 있는 것 등 말과 실천 간의 모순을 학생들이 파악하도록 도와주는 능력을 포함한다.
그래서 그는 교사들이 '보모'로 일상의 과업을 처리하는 데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말과 실천 간의 모순을 파악하여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있도록, 그리고 스스로 말과 실천 간의 일관성을 유지하도록 가르치는 '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기꺼이 가르치려는 이들 |
학생을 사랑하지 않고 교사가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가르치는 일을 사랑하지 않고 교사가 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교사의 월급이 그렇다고 엄청 많아진 것은 절대 아니다. 현재의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 다른 직종에 비해 그저 안정적이라는 것이 최대 장점이다. 그리고 얼핏 보면 하는 일도 좀 쉬워 보인다. '뭐 자기 전공과 관련된 교과에 대해 수업만 하면 되겠지..'
그러나 학교 안의 근무 조건은 열악하다. 그 안에서 근무해 보기 전에는 그 누구도 '교사가 어떤 일을 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교사로서 채 '준비'가 되지 못했을 경우, 그들이 자신보다 어린 나이의 학생들을 주로 상대하면서 어떻게 '자존감'을 부여잡고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아는 사람만 안다.
'요즘' 아이들이 홍역을 치르며 흔들리고 있는 것에는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학교 안에서 교사들을 하나의 '직업인'으로 바라보면서 존경심 또한 희석되고 있는 현상도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교사들은 그 안에서 단지 영문도 모르는 피해자로 허우적거릴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통찰'을 해야 한다.
프레이리는 『교사론 : 기꺼이 가르치려는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책의 제목을 일종의 선언이라고 하였다. 그가 말하고 있는 '기꺼이 가르치려는 이'라는 단어 속에는 '학습자이기도 한 교사의 과업이 즐거운 일인 동시에 엄중한 일'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교사의 과업은 진지함과 과학적, 신체적, 정서적, 감성적인 준비를 요구한다. 그래서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사랑은 물론이고 가르치는 일에 포함된 과정에 대한 사랑도 불러일으켜야 한다.
그래서 교사는 용기를 가져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 대한 냉철한 관찰과 통찰이 필요하고, 그러한 통찰에 대한 태도를 아이들에게도 가르쳐야 한다. 자신들이 어떤 환경에 서 있는지, 자신이 지금 어떤 마음의 상태인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하는 것들을 가르치고 깨닫게 하는 교사가 되어야 한다. 그저 아이들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역할이 강조되는 '보모'(이것은 부모의 역할이다)가 아니라, 가르치는 일의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교사'말이다. 혹 일정 부분 보모의 역할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바로 그 '가르치는 일'에 '교사'라는 직업의 본질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즐거운 일이면서도 동시에 엄중한 일이기 때문에 프레이리는 교사들을 가리켜 '기꺼이 가르치려는 이들'이라고 명명하고 있는 것이다.
가르치는 일은
사랑할 용기가 없다면,
포기하기 전에 수천 번 시도해보는 용기가 없다면
불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