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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안녕 Feb 08. 2022

통화(通話)

목소리로 데생하는 얼굴들

 

                            (*사실에 기반해도 모든 이름은 가명이다.)          


용임이다.     

숨소리까지 낮춘 내 주저함의 속도에 아랑곳없이 벨소리로 깔아 둔 노래는 어느새 후렴구에 이른다. 노랫말이 ‘지나간 것은 지나 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를 넘어설 즈음 결국 휴대폰을 쥔 왼쪽 엄지손가락에 힘을 준다.


“여보세요.”

    

엎드려 누운 채 긴 시간 노트북 영상을 보고 있었기에 목소리가 잠길 걸 알면서도, 애써 더 눅눅한 발성을 끌어올린다. 밤 열 시가 다 되어가니 자다 깬 척 해도 어색하지 않을 시간이다.


“여보세요? 은수야! 내다, 용임이. 내 용임이다. 반갑다, 친구야!”

    

나와는 정 반대의 옥타브로 뽑아내는 명랑한 목소리다.

     

“어... 용임아, 용임이구나. 오랜만이네. 어, 무슨 일 있나?”

     

“일은 무슨 일! 별일 없다. 니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지. 진짜 반갑다야. 근데 니 목소리가 이상타. 니가 아닌 것 같다. 목소리가 변했다야!”

     

역시 몇 달 전처럼 별 용건 없는 전화다.

     

“변하긴... 자다가 깼잖아. 너무 피곤해서 일찍 잠들었는데 니 전화 소리 땜에 깼거든. 난 또 무슨 큰일 생긴 줄 알고... 자다가 놀랐잖아.”

     

내 미간에 잡힌 짜증을 눈치챌 리야 없겠지만, 노골적으로 드러내긴 그래서 투정하듯 말끝을 올린다

      

“큰일은 무슨! 사는 게 맨 날 그렇지. 맨 날 맨 날 그렇다 아이가. 나는 잘 지낸다! 니도 잘 지내제?”

     

용임 특유의 거친 사포에 목울대가 긁힌 듯 카랑하게 갈라지는 목소리는 아예 리듬을 타며 신이 나 있다.

     

“으응... 나야 잘 지내지. 뭔 별 일... 근데 진짜 별일 없제? 자다 깨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불운한 소식이라도 던져주었다면 차라리 반가웠을까. 특별한 용건이 없을 거라 예상하고도 결국 수신 버튼을 누른 것은 뜻밖의 소식을 들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한 가닥 기대 때문이었다.

기대가 어긋나 실망한 때문인지, 늦은 밤의 안부전화가 달갑지 않다는 걸 내색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무어라도 큰일이 생기지 않는 한 굳이 전화를 주고받을 사이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나조차 정리되지 않은 의도가 담겨 말끝이 뾰족하게 치솟는다.

이쯤 되면 없는 큰일이라도 만들어내든지 용건만큼은 분명히 하자는 수작이 된다. 그런 내 속을 용임이 알아차릴 리 없다.

    

“허리 아파서 아까 침 맞고 왔다 아이가. 요즘 허리랑 어깨가 너무 아파 진짜 죽겠다.”

     

이런, 안 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둘 사이에 직접 통화라고는 몇 해 전이 처음이었을 테고, 몇 달 전에 이어 이제 세 번째 통화인데, 아무렇지 않게 몸 아픈 이야기로 주제가 건너뛰면, 이건 감당할 수 없다. 나이 먹어 생기는 자연스러운 몸의 증상에 대해 하소연을 하면서 곁을 주고 싶지 않다.

     

“으응... 나이 때문이지 뭐. 다 그렇지... 근데 니네 남... 니네 애들은 잘 크고...”

     

예의상 가족의 안부를 주고받으며 통화를 마무리하고 싶지만, 말을 꺼내는 순간 용임의 가족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음을 깨닫는다. 일찍 결혼했다는 건 아는데 이혼 소식을 들은 것도 같고, 기억이 뒤죽박죽이다. 아이들은 잘 크고 있냐고 해야 할지, 잘 살고 있냐고 물어야 할 나이가 된 건지 몰라 물음 끝이 우물거린다.

    

“안 그래도 우리 큰 딸 땜에 속상해 죽겠다. 오늘도 한 판 싸웠잖아, 진짜 가 땜에 어째야 될지 모른다니까. 사춘기라서 그렇긴 해도 진짜 속상하다니까!”

     

용임 곁에는 아무도 없는지 거칠 것 없이 내달린다. 진심으로 속상함이 배인 푸념이라 나는 조심스러워진다. 서둘러 끊기도 힘든 형세에다 기왕 연결되었으니 이젠 어쩔 수 없다. 오랜만에 소소한 고향소식이라도 용임이 아는 만큼 털어내게 해서 고향과 연결된 정보를 업데이트할 기회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 그래. 사춘기니까. 고등학생? 애들이 몇이랬지?”

     

“셋 아이가. 딸 둘에 아들 하나잖아. 초등학교 3학년짜리 아들이랑 중2랑 고2 딸이 있잖아.”

    

고향 친구들 중에서 제일 먼저 결혼했는데 나보다 늦게 아이들을 낳았나 보다. 그나마 성의 없이 저장해둔 고향 친구들의 결혼과 가족사에 대한 정보가 순식간에 헝클어진다.

     

“둘째는 안 그런데 첫째가 너무 말을 안 듣는다. 지난번에도 엄청 싸웠잖아.”

     

마치 어제까지 서로 이웃하며 돌본 아이인양 자신의 딸을 내 눈앞에 들이대는 것 같다. 어어, 뒷걸음질할 틈조차 주지 않고 용임의 말 줄기는 가속된다.

    

“가 땜에 하도 속상해서 그렇게 말 안 들으면 이 엄마가 콱 죽어버리겠다고 소리 질렀잖아. 이렇게 사느니 내가 집을 나가든지 죽는 게 낫겠다고 막 그랬다니까! 근데 지가 울면서 집을 나가버렸다니깐! 근데 있잖아, 가가 그때 죽을라 캤다 카더라.”

     

비탈을 요란하게 오르다가 느닷없는 내리막길에서 급히 기어를 바꾼 듯 목소리의 농도가 짙어진다.

     

“그 날 우리 큰 딸이 집 나가서는 차가 오는데 안 비키고 도로에 가만히 서있었대. 죽어뿔라꼬. 그때 옆에 있던 친구가 잡아땡겨서 살았다고. 그 친구가 울면서 우리 딸보고 그러더란다. 니가 죽으면 나는 어떻게 살라고 그러냐고, 죽지 말라고. 그래서 우리 딸이 마음을 바꿨다 카더라. 내가 죽으면 이렇게 슬퍼할 사람도 있구나 싶어서 살아야겠다고. 그래서 못 죽었다고.”

    

“어... 그랬구나. 그렇지...”

    

용임의 딸은 내게 그 존재를 처음으로 막 드러냄과 동시에 사라질 위기를 넘긴다. 사연의 질주는 고저를 넘나들며 경쾌하지만 응답할 감정의 포지션을 찾지 못한 나는 중얼거린다.

    

“사춘기니까, 그치... 사춘기니까.”

     

이러다가 밑도 끝도 없는 가족사가 하염없고 거침없이 엮여 나올 판이다. 대화의 주도권을 가로채야겠다는 판단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 두어 음계를 더 올린 용임의 목소리가 귀를 찌른다.

     

“우리 작은 딸은 안 그러는데 가는 도대체 왜 그런지 몰라. 작은 딸은 맨 날 엄마, 죽지 마. 엄마, 사랑해, 그러면서 지난번에는 내 생일 때 편지도 써주더라니깐. 진짜 감동 먹었잖아. 큰 딸이랑은 완전 다르다.”

    

“응... 으응... 그런 딸도 있지.”

     

나는 고개를 두 번 힘껏 끄덕인다. 물어오지 않는다면 굳이 내겐 아들 둘 뿐임을 알려주지 말아야겠다는 유치한 생각이 든다.

     

“아아들 키우기 힘들다. 내 팔자야. 진짜 힘들다.”

     

신세한탄은 수십 년 동안 무정하게 쌓아둔 나와 용임 사이의 장벽을 헐어내자고 조르는 것 같다. 늦기 전에 화제를 전환해야겠다는 생각에 다급해진다.

    

“친구들하고는 연락되나? 동네에는 애들이 누가 살지? 경숙이랑, 정애랑 또...”

     

“장규도 있잖아.”

     

“아, 맞다. 그러면 그 셋만 남았던가? 다들 잘 살제?”

     

“모른다. 나도 들은 게 있어야지. 내가 전화하면 친구들이 잘 안 받는다. 연락되는 친구가 하나도 없다. 저 저번에 호태만 겨우 받길래 한 번 통화했잖아.”

     

사연대로라면 응당 묻어나야 할 섭섭함 따위는 없는 듯 여전히 명랑하다. 그렇지, 그게 용임이니까.     

용임의 전화를 기껍게 받을 친구가 있을 리 만무함을, 모르는 건 본인뿐이다. 지난 몇 해 동안 내가 일부러 받지 않았던 두어 번의 경우나, 혹은 용임에게 걸려온 몇 번의 전화를 어쩌다 보니 받지 못했다고 멋쩍게 고백하던 다른 친구의 예를 굳이 들지 않아도 용임은 고향 친구들 사이에 그런 존재였다. 

    

언젠가 발신자 확인을 못하고 엉겁결에 용임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건성으로 안부를 나누고는 바쁜 척하며 나중에 통화하자는 허랑한 약속을 던지고 끊은 게 몇 달 전 일이다. 용임이 나를 특별히 여겨서가 아니라 그냥 모든 친구들에게 스스럼없이 전화를 다 돌려본다는 걸 안다.

     

“호태랑도 잠깐뿐이 못했다. 아아들이 연락이 잘 돼야 말이제. 내가 수원에서 한참 살다가 다시 내려왔다 아이가. 그니까 동네 소식을 우째 알겠노.”

    

“아, 글체...”

     

수원에서 살았다는 건 금시초문이다. 고향에서 쭉 살고 있을 거라 지레짐작했는데 지금은 또 다른 곳에서 산다는 정보까지 한꺼번에 달려들지만 나는 아는 척을 한다. 괜히 사연이 복잡해질지도 모를 거주지의 이력을 되짚고 싶지 않다.

     

“아참, 장규 딸내미 결혼한다카는 거 들었제? 이번 주 토욜이라카던데 니 올 거가?”

     

결혼할 나이의 딸이 있다니. 어쩌면 곧 이어서 할아버지 소리까지 듣게 될 장규를 떠올리니 낯선 친숙감에 피식 웃음이 난다. 남자아이였지만 열 살 이전까지는 집이 가까워 경숙이 다음으로 잘 어울려 놀았던 친구다. 그렇다고 고향의 예식장까지 찾아갈 의례적인 의무감은 일지 않는다. 서로의 현존 여부가 영향을 끼칠 만큼 연결된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 앞으로도 부모의 부고만큼은 부의금 전달이나 문상의 고려대상이지만 다른 관혼상제를 챙길 생각은 없다.

    

“그렇구나. 벌써 그럴 나이가 됐네.”

     

문득 용임이 아예 용건 없이 전화한 건 아니었구나 싶어 머쓱해진다.

     

“맞나, 글체? 우리가 그럴 나이가 됐다니깐.”

     

수 십 년을 얼굴 마주한 적 없는 우리가 ‘우리’라는 일렬종대로 서서 발맞춰 나이 먹어 간다 하니 뜨악하다. ‘우리’라는 말과 함께 엮어낸, 세월의 무상함에 대한 공감은 더더욱 낯설다.

     

용임은 내가 결혼식에 참석할 것인지를 재차 물어온다. 나는 하필 그날 중요한 일이 있어 못 간다고 재빨리 못 박아 말하지만 이내 미안한 마음이 든다. 혼주인 장규가 아닌 용임을 향한... 그러면서 용임의 참석 여부는 물으려다 만다.     

자신은 결혼식에 가야겠지만 사정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며, 내가 묻지 않아도 준비된 대답이 돌아온다. 며칠 전에 경숙이랑 정애의 권사 안수식 참석차 오랜만에 고향마을 교회에 갔다가 우연히 장규 소식을 듣게 된 터라, 아직은 참석 여부를 못 정했다는 것이다.

     

“다른 일도 아니고 그런 중요한 일에는 내가 아무리 바빠도 당연히 직접 가서 축하해줘야 안 되겠나. 다른 일도 아니고!”

    

고향 친구들 권사 안수식에 관한 말이다. 이 의식의 참여는 반드시 고향 땅을 밟아야만 했던 불가피한 사명이었음을 되새김질하듯 꾹꾹 눌러 두어 번 더 말한다. 개신교에서는 친구 자녀의 결혼식보다 더 중요한 예식으로 여기나 보다 싶어 나도 덤덤하게 끄덕여준다. 듣고 보니 경숙과 정애의 권사 안수 소식은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걸 문득 기억해낸다.

    

한 마을에서 나고 자라 국민학교를 함께 입학하고 졸업한 열두 명의 고향 친구들이 소식을 서로 주고받기 시작한 것은 4년 전쯤이다. 한 친구의 아버지상은 20여 년 동안 소원했던 관계가 무색하게 고향 친구들을 일사천리로 소집시켰다. 그 계기로 소통을 지속하자는 누군가의 제안에 따라 고향 친구 sns 밴드가 만들어졌다.

    

처음 몇 달은 적극적인 친구 두엇의 활약으로 그럭저럭 커뮤니티에 활기가 돌았다. 그러다 점점 바뀌는 계절 초입마다 의식을 치르듯 안부 인사를 나누었고, 계절 사이 공백은 한 친구의 열성으로 인해 sns에 떠도는 ‘좋은 글귀’로 채워졌다.

     

나는 자동 공지로 뜨는 친구들의 생일 알림에 형식적인 축하 댓글을 두어해 달아 주며 느슨한 끈을 잡고 있었지만 용임은 달랐다. 용임은 모든 게시물에 눈에 띄게 틀린 맞춤법으로 장식한 댓글을 꼬박꼬박 달았고, 명절 때면 늘 친구들이 보고 싶다고, 만나자고 홀로 외쳤다.

     

건조하게 달리던 댓글도 차츰 말라가며 규칙적으로 명언을 퍼 나르던 친구의 장기 부재마저 눈치 채지 못할 즈음 용임이 전면에 등장했다. 게시물 업데이트 담당을 자신의 보직으로 삼은 것이다. 보이스 피싱을 조심하라거나 정부 방침으로 새롭게 바뀌는 법규에 대한 주의 요망이 대부분인 글들. 그런 글들은 매번 비슷하게 차가운 형식으로 경고를 날렸고, 용임은 친구들을 위해 절박하게 실어 올렸다. 어떤 응답도 없었지만 용임은 개의치 않고 스스로 차지한 역할에 성실했다.

    

“내가 마을에 갈 일이 뭐 있겠니. 그때 교회 갔다가도 축하만 해주고 금방 도로 왔다 아이가. 근데 그날 누가 그카데, 고모가 마이 아프다꼬. 내 보고 한번 가서 만나보라꼬. 내가 만다꼬 가노! 내가 갈 일이 뭐 있노. 안 글나? 내사 안 간다카고 그냥 왔다.”

     

목소리는 새되지만 볼륨을 더 높이지 않고 또박또박 끊어 말하니 사투리가 명징하게 들린다.

     

“아... 고모가... 그치... 니네 고모... 연세가 많으시겠지.”

     

용임이 고모 손에서 자란 아이였다는 사실이 이제야 생각난다. 용임은 우리 고향 친구 중 유일하게 부모 모두가 없는 아이였다.

     

“마이 아프다 하는 데, 내가 와 가야 되노! 내가 맺힌 게 얼마나 많은지 니도 알잖아? 내가 얼마나 서럽게 살았나.”

     

“그치, 그렇지. 니가 고생이... 힘들게 살았지.”

    

아는 척 얼른 맞장구는 쳤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고모네 얹혀살면서 구박을 많이 받는다더라는 친구들의 어린 목소리가 어렴풋이 맴돈다.

불쑥 용임의 지난 삶에 호기심이 인다. 순전히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들을 수 있다는 불순한 관심을 용임은 우정 어린 공감으로 받는다 해도 내가 미안해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고모 아재가 죽고 나서 고모가 집이랑 땅 다 팔아서 사업하는 자기 남동생한테 줬잖아. 그 동생이 쫄딱 망해서 돈 다 날렸다 아이가. 근데 내가 와 가보노! 자기 남동생한테 땅 판 돈 다 줬는데.”

     

그나마 머릿속 희미하게 그려내던 용임의 혈연관계도와 가계도가 엉키기 시작한다. 고모의 남동생이면 용임의 삼촌일 텐데 ‘자기 동생’이라고 표현하다니. 불현듯, 고모가 친고모도 아니고, ‘어디서 데려와 키우게 된 고아’라는 어린 친구들의 뒷말이 한 줄 문장이 되어 이마를 쫙 가로지른다.  

   

“그랬구나. 돈을 다 남동생한테 줬구나.”

     

고생은 니가 했는데 라는 말을 덧붙여주고 싶었지만 자칫 용임의 삶을 깊숙이 이해하는 뜻으로 들릴까 봐 멈춘다.

     

“그래 놓고는 영양실조 걸려 병원에 한참 입원했었다 카대. 나라에서 쪼매 나오는 돈도 싹싹 끌어 모아가 자기 남동생 빚 갚으라꼬 다 줬단다. 먹을 거 안 먹으면서 돈 갖다 바치니까 자기는 바짝 말라서 죽을 뻔한 기지.”     

다소 분통에 찬 고발 목소리가 이어지는 동안 내 머릿속은 비현실적인 이미지들로 스토리가 엮인다.

     

“내가 얼마나 고생했노. 알제? 진짜 말로는 다 못할 정도다.”

     

“맞아, 너 일 많이 했지. 근데 솔직히 국민학교 때 니랑 논 기억은 별로 없다.”

     

“내가 놀 시간이 어딨노? 점심시간 때도 집 가깝다고 도시락 안 사가고 집에 밥 먹으러 가서는 일만 하다가 왔다 아이가. 맨 날 그랬다. 내가 놀 시간이 어디 있었겠노!”

     

“진짜? 아... 너무 했네.”

     

내뱉고 나서야 처음으로 내 맞장구에 진심이 담겼음을 그 여운으로 확인한다.

    

“하도 힘들고 잠도 모자라고 해서 하루는 새벽에 일하러 닭장에 들어갔다가 안쪽에서 문 잠그고 그냥 자버렸잖아. 난 몰라 카면서 그냥 잠들어버렸다니깐.”

     

용임은 마치 통쾌한 복수라도 한 듯 웃음을 터뜨린다.

    

“오죽 힘들었으면..."

     

당황스럽기도 하고 점점 대꾸할 마땅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고향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양계를 하거나 돼지를 먹였다. 마을의 모든 아이들은 고사리손에 적합한 노동으로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었고, 부모를 도와 제 몫의 일을 매일 규칙적으로 했다. 예외가 없었으니 서로를 비교할 처지도 아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곧바로 닭장에 들어가 달걀을 걷거나 달걀 선별작업을 도와야 하는 두어 시간의 노동은 내게도 일상이었다. 매번 피하고 싶고 짜증 나는 일이었지만 혹독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용임은 ‘우리’의 범주 밖에 있던 아이였다.

     

“맨 날 맨 날 일만 하고. 처음 생리 시작했을 때는 내가 뭘 알아야지. 배는 아프고, 피는 나고, 무섭기도 하고. 그래서 일을 안 했거든. 그날 맞았잖아. 고모 아재한테 맞기도 많이 맞고 살았지.”

    

“그래. 고생 많았다. 난 몰랐다. 진짜 몰랐다.”

    

“일이 많아도 참말 많았다. 사는 게 와 이런가 몰라. 며칠 전에도 시동생이 아파서 병원에 갔다 왔다 아이가. 시댁 식구들은 도움이 하나도 안 된다.”

     

어린 용임의 세계가 윤곽도 잡히기 전에 다시 겅중 뛰어 성인이 된 용임의 또 다른 세계로 전개되니 낯설다 못해 생뚱맞다. 용임이 나와 다를 바 없이 평범한 가족관계로 사회체계 속에 편입해 있다는 사실에 잠시 어리둥절해진 것이다.

    

“어... 애들 아빠는 잘 계시고?”

     

“뭐, 맨 날 그냥 그렇지 뭐.”

     

용임은 시퉁하게 답했지만 하소연이 흘러갈 또 다른 물꼬를 튼 듯, 간암으로 죽은 남편의 큰형과 이혼한 둘째 형과 늦은 나이에도 장가를 안 갔다는 시동생에 대해 줄줄이 사연을 쏟아낸다. 복잡하고 애옥한 시가 형편을 혀를 차 대면서도 남 말하듯 말하니 나도 흘려들으면서 조금 전에 품었던 어린 용임에 대한 안쓰러움이 싱거워져 가는 걸 느낀다.

     

어느새 나는 ‘아’나, ‘어’ 같은 짧은 감탄사나 ‘그래’, ‘그렇지’처럼 건성건성 대꾸를 하면서 하품소리도 여과 없이 보낸다. 예상치 못한 긴 통화에 누워있는 내 온몸에서 갖은 통증이 일기 시작한다.

용임은 폰 건너편의 내 반응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혼자 떠들면서 간간이 한숨을 쉬거나 느닷없이 깔깔 웃는다.

    

어릴 적부터 늘 경우에 맞지 않은 웃음을 매달고 말하던 용임이다. 어른들이 모지라비라고 대놓고 나무라거나 비웃어도 눈을 크게 뜨지 않았고, 또래는 물론 한참 동생뻘 아이들조차 적당히 무시하거나 멸시하면서도 용임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그러니까 용임은, 눈치가 없는 아이일 거라 ‘우리’는 믿었던 것 같다.

     

폰을 쥔 손아귀도 얼얼하고 허리도 시큰거려 수시로 몸을 바꾼다. 내 신경은 통증의 신호에 날카로워질수록 휴대폰 너머와는 점점 더 멀어진다. 용임의 이야기를 따라잡을 수 없는 지경이다.

     

불쑥 등장한 장성한 아들 이야기는 결혼을 두 번 했다는 걸 채 깨닫기도 전에, 전 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말하는 건지, 전 남편의 전처 자식 이야기인지, 현재 남편의 전처 자식 이야기인지 도무지 판별할 수 없도록 암호가 되어 떴다가 사라진다.

     

더구나 결혼 후 자신의 삶에 대해 내가 기본 정보를 알고 있을 거라 믿어서인지 시간을 마구잡이로 뒤섞거나 듬성듬성 이를 뺀 채 들이붓듯 하는 바람에 각박한 사연들은 무게를 갖지 못하고 폰에서 새어나간다. 용임으로서는 여전히, 앞으로도 눈치 채지 못할 일방통행일 것이다.

     

중, 고등학교 시절 고향친구들이 명절날 모여 화투를 치거나 수다를 떨 때도 빈말이 분명했을 전갈조차 받지 못한 채, 그 부재를 알아차림도 없었던 우리들, 그 사이에 자신은 늘 존재했던 용임...

     

허리 통증을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나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이제 그만 자자고, 다음에 이야기 나누자고 말한다. 용임은 반음계는 더 올라간 옥타브로 ‘그래, 그래! 알았다!’며 다음에 또 통화하자고 발랄한 작별 인사를 한다.

 

통화는 끝났다.

몸을 일으키려 하지만 굳은 허리는 아득한 곳에서부터 비명을 지른다. 다시는 이런 자세로는 통화하지 말아야지 후회와 통증으로 아랫입술을 물며 간신히 몸을 추스른다.

휴대폰의 통화 시간을 확인해 본다. 한 시간을 넘겼다. 문득, 그 ‘다음’이라는 시간에 용임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면 나는 단박에 수신 버튼을 누르게 될까 궁금해진다.     


어쩌면 오늘처럼,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그대 가슴에 깊이 묻어 버리고, 지난 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즈음까지는 숨소리마저 낮추며 흘려보낼 테지.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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