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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안녕 Mar 31. 2022

돌보는 몸들


나는 요양보호사였다. 그날, ‘뜨끔’에서 ‘찌릿’으로 관통하는 전기 신호를 받으며 절룩이기 전까지는.


“요양보호사를 하겠다고? 아서라, 넌 도리어 요양보호를 받아야 할 몸이야.”

사지도 멀쩡한데 이제 쉰을 넘어선 나를 돌봄을 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농담조로 만류하는 지인들의 반응이 전혀 예상 밖은 아니었다. 내가 남을 돌볼 만큼 ‘튼실한 몸’을 가졌다고 주장하기에는 그동안 자주 앓는 소리를 흘렸던 전력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비록 요 몇 년간 귀촌생활의 로망을 실현하느라 몸을 혹사하여 군데군데 트러블이 났지만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 않나. 그 일 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살살 하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더라. 알다시피 내가 집에 있으면 물불 안 가리고 텃밭과 정원 일에 온몸을 또 던지고 망가질 게 뻔하다. 하루 서너 시간만 딱 정해서 방문요양 일을 한다면 몸 관리에도 더 충실하게 될 거다. 향후 10년은 내 몸뚱어리 하나로 돈벌이를 할 수 있을 거야. 노인 돌보는 건 어쩌면 내 적성에 맞는 일일지도 몰라.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지금 돈을 벌고 싶어…….」

가족을 포함한 지인들을 납득시키기에 앞서 나 스스로 다짐하듯 주문처럼 이런 논리를 차곡차곡 덧붙이고 되뇌었다. 서둘러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교육원에 등록했다.

     

「누구는 하루에 서너 집 뛰고 200만 원 넘게 번다더라」 「본인이 하고 싶은 몇 시간만 일하고 꼬박꼬박 월급 받으니 농사일에 비해서 얼마나 편해」 「별 경력 없어도 여자들 하기에는 딱 맞는 일이야」 「칠순 노인도 한다더라. 조선족은 물론이고 다문화 가정 이주여성들도 한글 배워서 그 시험 치려고 할 정도니까 아무나 마음만 먹으면 다 따는 쉬운 자격증이래」

그즈음 시골마을에는 여자들이 죄다 요양보호사 일을 하는 바람에 정작 농사일할 인력이 없다는 탄식이 들려왔다. 농번기 때 일손을 구하지 못하는 농부들의 한숨은 이해할만했지만, 농사일에 비해 손쉽게 돈을 번다는 질투와 선망이 깔린 목소리들도 뒤섞여 있었다.

 

나도 교육을 받기 전까지는 혹하는 마음으로 들어온 말들이었다. 실제 마흔 명이 넘는 교육생 중에 내가 너 댓 번째로 어릴 만큼 평균 연령이 높았고, 한글을 더듬더듬 읽는 국제결혼한 이주 여성도 있었다. 아내가 몸이 약하니 자신의 노모를 직접 돌보고 싶어 교육을 받는다는 올해 환갑이라는 이만 유일한 남성이었다. 필기시험을 낙방해 세 번째 수강한다는 60대 후반의 여성은 보충수업도 받으며 필사적으로 공부했다. 대부분이 고졸 이하의 학력에 다수가 저소득층임을 하루 8시간씩 한 달 넘게 받는 교육과 2주간 실습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살면서 익혀 온 다른 기술(?)이 없어도 타인을 돌볼 체력만 있다면 생계를 꾸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자격증을 따기 위한 수업 분위기는 후끈했다.

 

하지만 요양보호사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나 부조리는 자격증을 따기도 전에 양성하는 교육원에서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매일 화장실을 포함해 강의실 청소를 조별로 시키고 수강생이 준비하고 차린 걸로 직원들 점심까지 해결하는 학원의 오래된 관행은 갑질이 분명했다. 중년 여성들의 노동을 봉사와 사명감으로 포장하여 착취했다. 「우리도 엄연히 교육비 다 내고 다니는 수강생인데 청소까지 시키나」 「학원 마치면 집에 가서 또 집안일해야 하는데 너무 피곤하다」 「교육생이 전부 남자래도 이런 청소를 시킬 건가!」하는 분개 어린 목소리들은 뒷담 수준으로만 머무를 뿐, 자격증 취득에 불이익이 생길까 염려하며 모두 시선을 낮추었다.

 

나는 그들과 하나였다가 때로는 거리두기를 자처했다. 대학공부도 했겠다 나이도 젊은 축에 드니 저들만큼 애써 공부하지 않아도 합격은 할 것이며, 저들만큼 이 일로 생계에 매달리는 처지가 아니라는 오만함 때문이었다. 학원에 대표로 문제제기도 하고 다문화 이주여성의 수업도 짬짬이 챙겨주며 나는 그들과 온도차를 유지하려 들었다. 이 정도 일쯤은 거뜬하게 하리라는, 돌봄 노동을 단순노동으로 만만히 보는 착각에만 그치지 않고 ‘돌봄’에 무형의 위상과 가치를 덧입혀 사명감과 자긍심을 가지려는 환상마저 품었다. 일을 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구불구불한 겨울 산길을 오가며 도시에서 교육과 실습을 마친 후 시험을 치르고 몇 달 뒤 봄날에 자격증을 취득했다. 마침 집 근처 재가요양보호센터가 있어서 자격증을 받은 당일부터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초기에는 주 5일에 하루 2시간짜리 일을 선택했다. 당분간 노동시간을 늘리지 않겠노라며, 일을 더 맡아달라는 센터 측의 요청을 몇 차례 거절하기도 했다. 나는 생계가 절박해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나 스스로에게 다져두고 싶었다. 그렇게 여유 부리며 선택지가 많은 사람인양 굴던 내 뜻은 머잖아 꺾였다. 

첫 돌봄 대상자가 한 달 채 지나지 않아 낙상으로 입원하였으니 당분간 대기해 달라는 전화를 출근 직전에 받고는 보름 가까이 손을 놓고 기다려야 했다. 그러는 동안 당연히 벌이는 한 푼도 없었다. 나는 결국 일거리를 늘려야 했다. 이런 잦은 돌발 상황과 고질적인 불안정한 수입구조를 개인의 힘으로 대비하거나 막을 방도는 애초에 없었다. 나는 어느새 돌봄 대상자가 셋으로 늘어나 해가 져서 퇴근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어느 집 요양보호사는 노인이 치매기가 있으니까 통장 돈을 다 빼갔다더라」 「아랫집 요양보호사는 음식 솜씨가 형편없고 무뚝뚝해서 영 마음에 안 드는데도 참고 있다더라」 「누구 네는 별로 하는 일도 없이 와서 있다 가니까 자식 돈 나가는 거 아까워서 관두라 했다더라」 「저번 요양보호사는 떡도 갖고 와서 나 먹으라 하고 맨 날 이것저것 가져왔었다」 「빈 땅을 놀릴 수도 없고 요양보호사가 조금만 도와서 밭일해주면 나 먹을 건 그럭저럭 해결될 텐데, 그걸 못 하게 하니 원...」 「예전 요양보호사는 청소도 잘하고 어른들한테도 잘해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입 모아 칭찬했는데 자기 사정으로 관둬서 다들 아쉬워했다」

한두 다리만 건너도 친인척이거나 고향 사람들인 시골마을 특성상 대상자들이나 그 이웃들이 요양보호사를 향해 요구하고 통제하려는 산발적인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려왔다. 그 순간에 나는 약자였고 소수자가 되어 발치에 그어진 금 앞에 서 있는 기분이 들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책잡히지 않으려고 원칙을 지키는 범위에서 성실하게 일했다. 거의 안간힘까지 써가며 다정함과 친절함을 몸에 두르며 도덕적으로도 우월하길 바랐다. 


옛 농가주택 구조는 수시로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로봇무릎을 요구했고, 좁은 욕실에서 노인의 목욕을 돕고 나면 허리가 잠깐씩 끊어질 듯 아팠다. 무거운 물건을 옮기거나 대상자의 몸을 보조하다 보면 허리는 물론 어깨와 팔꿈치가 쑤셔댔다. 기본적인 일상생활 지원을 끝내면 정서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침대 맡에 앉아 그림책과 성경책을 읽어주거나, 수십 번 더한 옛이야기를 꺼내 처음인양 들으며 대상자의 정서를 돌보는 데 쏟아부었다. 굳은 몸을 스트레칭하며 휴식하려면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일거리를 던져주거나 손 놓고 있는 걸 봐줄 수 없어하는 대상자나 가족의 날 선 시선도 감내해야 했다.


그럼에도 내가 돌보는 이들은 몸의 조건만으로도 약자의 처지였다. 때로는 내가 금의 반대편에 서있기도 했던 것이다. 대상자나 그 가족들과 언성 높여 말다툼을 한 적도 있었고, 그들이 내 눈치를 살피기도 했다. 반면 동료 요양보호사의 직업윤리나 지침에 어긋난 행동을 목격하고도 못 본 척하기도 했으며, 나를 고용한 센터의 불합리나 무리한 영업 방식에 침묵할 때도 많았다. 나와 내 돌봄을 받는 이들 누구도 절대적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강자가 아니었다. 노화와 질병 같은 유한한 삶에 따른 본질적 문제나 가난과 소외 같은 거대한 사회적 문제 속에 우리는 함께 약자로 묶였다.

      

돌봄 노동을 하려면 돌볼 수 있는 건강한 마음도 필요했다. 노화와 질병이 배설하는 고통과 슬픔, 가난과 소외가 생산하는 불편과 우울이 겹겹으로 둘러싸인 근무 환경은 돌보는 내 마음과 정서마저 축냈다. 

 ‘죽고 싶다’, ‘제발 자다가 그대로 눈을 감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머리맡에 놓인 약 먹듯 하는 노인들의 한탄을 듣는 데는 좀처럼 이력이 생기지 않았다. 낫처럼 고부라진 허리로 한쪽 팔과 다리를 끌면서도 밭에 호미질을 하다 고꾸라지는 노인의 고집을 말릴 수 없어 지켜보며 무력감에 휘청거렸다. 치매를 핑계로 보름치 약을 털어 삼키고는 휴지통을 붙잡고 토악질하며, 그냥 죽게 내버려달라는 홀로 사는 노인의 마른 등을 두드리노라면 우울이 바이러스처럼 전염되어 내게로 스며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생에 대한 허무감과 싸우느라 어스름처럼 마음이 가라앉았다.

몇 년의 요양보호사 경력을 가진 한 지인은 ‘힘을 빼고 살살 하라’고 종종 충고해주었지만 나는 반년이 지나도록 도무지 힘을 뺀다는 말의 의미를 내 몸과 마음에 적용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다 그날이 왔다. 뇌졸중으로 수해 째 침대에서 자리보전하며 100킬로그램이 넘는 몸이 된 한 대상자는 보조하는 남편이 외출한 사이 내게 몸을 돌려 뉘어 달라 청해왔다. 수급 시간을 막 넘겼음에도 거절하지 못해 홀로 돕다가 결국 나는 허리께에서 불길한 신호를 느꼈다. 곧이어 교회 차에 실려 일요예배 가는 게 유일한 나들이인 한 방에 사는 자매 노인들을 돌보러 가서야 이 일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노인들의 무거운 이불을 바깥에 들고나가 번갈아 털다가 오른쪽 팔다리를 가르는 전기 자극을 느꼈다. 그날 퇴근길에 서비스 기록 제출을 위해 센터 문을 절룩거리며 들어서다가 남을 돌보는 일을 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는 걸 번뜩 알아차렸다.

     

9개월간의 요양보호사 생활은 끝났다. 일을 그만두고 한 해 동안, 정형외과와 한의원과 운동센터를 돌아다니며 내 몸을 돌보는 데 집중했다. 나는 그렇게 일을 그만둘 수도 있는 처지였다. 허리 통증으로 더 나빠질 것이 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만으로 퇴사할 수 있고, 일 년에 걸쳐 자신의 몸만 돌볼 수 있는 형편을 가졌다. 하지만 동료 방문요양보호사의 노동 현실은 내 개인적인 특수성의 기준이 잣대가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요양보호사를 하면서 생긴 만성 통증이나 관계에서 오는 심각한 스트레스 같은 관련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일을 놓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을 나는 보아왔다. 

요즘도 어쩌다 예전 동료들을 마주치면 안부를 묻는 그들에게 나는 연기자처럼 허리를 붙잡고 금세 아픈 시늉을 한다. 미안함 때문이다. 돌봄이 필요한 몸과 스스로를 돌보는 몸 사이 그어진 경계를 찾느라 당황한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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