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성을 쌓는 과정이라기보다 적성을 쫓아가는 여정
첫 글을 들어가기에 앞서 작가명이 이렇게 된 이유를 조금 풀어보자면, 한국어 감수 업무 특성상 '~해 주세요'를 사내 메신저에서 달고 사는데, 순간적으로 내가 협조좀부탁무새(비슷한 맥락으로 '팔껄/살껄무새'가 있다.) 그 자체가 아닌가 하는 심경이 들어 충동적으로 작가명을 입력했고, 때마침 수정 가능 횟수를 다 소진하였기 때문에 현재의 나는 속수무책으로 '주세요무새'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방금 읽으신 문장은 아주 긴 한 문장이다.
잘 읽혔는지?
- 여하튼 작가명 수정이 가능한 7월 20일 만을 기다리며, 그리고 필명 정하기라는 중요한 대목에서 진지하지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자 변론을 남기며 -
6월 춘천 팀워크샵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컬링도, VR 방탈출도 아니고 팀원들과 손흥민 카페에 앉아(손웅정 감독도 보았다.) '내 자식의 장래희망이란 것이 의미 있는가'를 주제로 한 대화였다. '15년 뒤에 멋진 00이 될 것이에요'라는 순수한 다짐이 유효하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해줄 것인지를 정하기에 앞서, 15년 후에도 그 직업이 유효할지를 생각해 볼 법한 시대이기 때문에.
최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컴퓨터공학과의 유례없는 인기와 더불어 빅테크 기업의 개발자 모셔오기 붐이 일었지만, 이제 모든 매체의 헤드라인에서 근미래 소멸 위험 직군 1위는 개발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가장 빠르게 타격 입을 것이라고 예측했던 크리에이티브 직군은 오히려 AI 아웃풋의 미묘한 불쾌감 덕분에 인간이 잘할 수 있는(하지만 유발 하라리는 이 믿음도 지적했다. 창의성은 보통 '있는 것들의 재구성'이기 때문이고, AI가 사실상 이 짓을 제일 잘한다.) 영역이라고 위안하고, 영업과 같은 대면 업무야 말로 대체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이유라고 들 하지만, 당장 매일 글로벌 테크 기업의 조직 개편 소식이 업데이트되는 판국에(6월 19일 MS가 내달 초 영업 부문의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할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실제로 지난 5월 제품 및 엔지니어링 부문 1만 명을 구조 조정했다.) 인간의 예측은 글쎄다.
그러니까 이제는 '안정적인' 직업이라는 게 있나. 그도 그럴 것이 전 업계에서 생성형 AI의 사용 여부 논의 단계는 우습게 제치고 이제는 ‘어디까지를 허용할 것인가?’를 논하고 있는 상황이다.
나는 대학에서 3 전공을 했다. (취업률 극악의) 국어국문학과 그리고 (보통 이 루트면 너 기자/PD 될 거야?라는 질문을 듣는다.) 신문방송학과 복수전공에 (마침 학점이 좋았고 엄마 아빠가 하래서) 교직이수까지 병행했다.
결과적으로? 아무 연관 없는 이커머스 유통 MD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지금은 몇 년 전만 해도 관심도 없던 IT회사에서 B2B 상품의 UX 라이팅 업무와 Localization 소스 언어를 담당하고 있다.
첫 번째 회사의 공채 연수에서 제조업의 성장 한계를 강조하며 미래는 유통이라고 외치던 강사님의 강연이 무색하게도(외려 물류가 답이었다.), 프리미엄 제품을 논외로 치면 유통사 네임밸류는 별 의미가 없다. 소비자 입장에서 어디서 사든 무슨 상관인데? 2~3일 후 배송도 짜치는 판국에. 5년 전 만해도 '유통가의 구멍가게' 취급받던 쿠팡이야말로 지금의 승자 아닌가.
내 말은 소위 말하는 '한 우물만 판 전문성'이 직업을 선택하는 데에 있어 그렇게 중요한가? 싶다. (전문직은 몰라요 난 직장인이다.)
이커머스만 봐도 그렇다. '한 곳에서 다 사세요'를 강조하던 시절 종합몰 MD가 대세였지만, 오늘의 집, 컬리, 무신사 같은 버티컬 플랫폼이 강자로 떠오르더니 이제는 ('바잉 안 하는 게 MD야?'라는 전통적 사고방식의 영향도 있겠지만) 자사몰이나 큐레이션 기반의 유니크한 편집샵 MD 커리어가 더 스토리 있고 특색 있다고 여겨진다. 실제로 유통 대기업에서 29CM로 이직했던 건 나름의 도전이었는데 이런 판단에서였다. 같은 팀이던 과장님은 '멍청아, 가만있어도 승진할 걸 왜 고생하러 가냐'라고 면박을 주셨지만 결과적으로 아주 잘 한 선택이었다.
약 8년 간의 커머스 경력에서 IT, 그리고 UX 라이팅이라는 (이전까진 듣도 보도 못한) 업으로 전환한 이유는 'IT가 미래다'라고 믿어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인문학, 그러니까 언어나 텍스트에서 미래 성장의 가능성을 보았는가? 이것은 과연 내가 경제 인구로 남아 있는 동안 기대할 수나 있는 것인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지난해 10월 10일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이전 이후, 인문학에 혁신적이고 대대적인 정부 차원의 지원이나 예산 투자가 이루어졌는가? 없었다. 2030대에서 시작된 텍스트힙(texthip)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평가할 수 있지만, 노벨 문학상은 한국 문학이 아닌 한강이 해낸 수준이다. 백 년 묵은 망령처럼 구호로만 맴도는 '인문학 붐은 온다'가 이제는 '인문학 붐, 올 때도 됐다'로 바뀌어야 하는 것 같다. 그만큼 근본적으로 한국인의 독서권이 보장되지 않으면 여하튼 활자 시장의 답은 없다.
그래서 결국 선택의 기준은 이 업의 성장 가능성이든 뭐든을 제치고, 내 성질이다. 웬만하면 다른 분야에서는 좋게 좋게 넘어가고자 하는 귀찮음에서 비롯한 유함과는 다르게 어긋난 활자나 텍스트만 보이면 따지고 드려는 성미가 발현되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 이 불편함이 관련 실무자끼리의 커뮤니케이션으로 '원활하게' 협의가 되면 소위 말해 기분이 째진다. 문과대 특유의 지적 허영심이겠지. 인문학 전공생들은 보통 지적 가오로 살아간다.
직군을 변경하고 만족하느냐? 지금까지는 그렇다. 싫어하는 건 죽어도 안하고, 앞에 나서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내향형임에도 수십명 앞에서 '제가 한 것 좀 보세요'라는 홍보 및 자랑 목적의 발표를 진행한 것을 보면 꽤 열심히 했고 나름대로 잘 적응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내 성질이 견디는만큼 이 직군을 열심히 파 볼 생각이다. 못 견디는 수준에서 유지해봤자 얻는 건 지병임을 뼈저리게 겪어 보았기 때문에. 마침 한국에 도입된 지 얼마 안되어서 새롭고, 뭘 하라고 시키는 사람이 없어서 더 좋다. 그니까 스스로 내가 찾아서 해야하는데, 그게 싫지 않다. 프로세스를 정비하는 과정도 흥미롭다.
나한테 커리어는 그 순간의 만족이면 된다. 어떠한 목표치를 정해두고 달려봤자 세상은 또 변한다. 그래서 내 식으로 커리어를 정의하자면 '텍스트 전문가' 뭐 이런게 아니라, '내 성질머리를 달래기 위해 일하고 공부하는 사람'정도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항상 변덕을 염두해둬야지, 당장 오늘 저녁의 마음도 모르니까)다.
조금의 사회성을 발휘하여 말하자면,
모름지기 '라이터'라는 직군에 종사하는 한국인이라면, 모국어를 명확하게 잘 쓰는게 모두에게 좋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