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역 앞에 차를 조금 멀리 주차해 놨었는데 무려 위스키 3병과 와인 3병을 셔틀 해야 하는 상황이라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차까지 뛰어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17살이 먹어 잔병치레가 많은 차가 다행히 시동이 걸린다.
앞 유리에 온몸을 부딪히며 여름이 왔음을 알려주는 벌레들을 뚫고 군산시 영화동에 있는 Jazz Club Muddy에 도착했다.
이미 공연이 시작해서 곡이 끝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입구 옆 모니터의 붉은 포스터와 함께 붉은 벽돌과 철제문 사이로 들려오는 기타와 드럼, 베이스 소리가 안에서 라이브 공연임을 알려준다.
모든 콘서트의 경험이 그러하듯 바로 이때가 기대치가 최고조로 올라가는 순간이다.
드디어 안쪽으로 들어가 무대 위에서 신나게 연주하고 있는 밴드와 그 음악에 맞춰 좌석을 가득 채운 채 몸을 흔들며 즐기고 있는 관객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뜨거운 것이 가슴에 차오른다. 뭐 내가 역류성 식도염이 있으니 그 증상일 수도 있겠지만 (가만... 흥분하면 위산 분비가 증가되던가? 작년에 강의했던 내용이 헷갈린다.) 이 공간이 드디어 살아났음에 대한 감탄이다.
오래전부터 이 공간을 되살리기 위해, 즉 Re/Turning하기 위해 노력해 왔던 사람들이 얼마 전 정리가 안된 이 공연장에 모여 언제 여길 오픈 하나 걱정 하던 때가 있었다. 꿈꾸던 것이 현실이 된 지금 이 순간 그 사람들이 공연장 여기저기에서 나보다 더 큰 격함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국내에 재즈 라이브를 하는 작은 공간들이 다수 있지만 Jazz Club Muddy는 그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공간이다. 처음부터 공연을 위한 공간으로 준비했고, 그것을 증명하려는 듯이 국내 최고의 재즈 보컬인 말로 밴드와 최고의 레코딩 엔지니어를 초빙해 라이브 녹음하는 것을 첫 행사로 잡은 것 같다.
뒤쪽 입구에서 들었던 소리나 앞에서 들었던 소리 모두 일관되게 훌륭한 사운드였다.
게다가 말로밴드의 공연이 아닌가!
보컬 말로는 아마도 국내 최고 수준의 스캣을 들려주는 가수일 것이다. 가끔 라이브를 잘하는 가수들을 마치 CD음원을 듣는 것처럼 잘한다고 평하는데, 오히려 말로는 라이브 무대에서의 소리가 퍼포먼스가 워낙 인상적이어서 CD로 접하면 실망할 수도 있다.
한참 입을 벌리고 공연을 듣고 있는데 이런..! 피아노 줄이 끊어졌다고 한다.
라이브 공연 중 기타나 베이스 같은 현악기 줄이 끊어지는 일은 종종 있지만 피아노 줄이 끊어지는 것은 처음 보는 광경이다. 그것도 새로 들여놓은 피아노의 첫 공연에서 말이다.
하필 미 음계를 담당하는 줄이 끊어졌다면서 "오늘 <미>쳐야 하는데 피아노 줄이 끊어져 <미>칠 수 없다"는 말로의 위트 있는 멘트로 모두들 뒤집어진다. 이 순간에 저런 멘트를 생각해 내다니 역시 improvisation에 강한 재즈 아티스트답다.
피아노 줄이 끊어진 채로 한두 곡을 했는데, 어디선가 거짓말처럼 조율사가 나타나 피아노를 수리하면서 잠시 인터미션을 가졌다. Jazz Club Muddy의 라이브 녹음 전설이 된다면 이 <미>치지 못하게 줄이 끊어졌던 사건이 길이 회자될 것 같다. 의도하지 않게 나중에 설을 풀 이야깃거리까지 만들어지다니, 이건 대박의 조짐이 분명하다.
피아노 줄 사건 때문에 더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말로밴드의 피아노 연주자인 이명건 피아니스트의 연주는 아주 훌륭했다. 발라드나 스윙감 있는 연주도 좋았지만 타격감이 아주 강해서 피아노 줄이 끊어질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재즈 피아니스트 하면 흔히 떠 올리는 빌 에반스나 키스 재릿보다는 브래드 멜다우와 맥코이타이너가 한 몸에 들어있는 연주자 같다고 할까?
오랜만의 공연을 한참 즐기다가 흥분을 좀 가라앉히고 듣다 보니 뭔가 애매하다. 왜 이렇게 느껴지나 갸우뚱 거리다가 보컬과 악기 소리가 미묘하게 위치밸런스가 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자리는 무대 바로 앞이었고 메인 스피커는 무대 위 천장에 달려있었다. 이 때문에 피아노나 드럼 베이스의 소리는 앞에서 수평으로 내게 다가오는데 보컬이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뒤에서는 이런 미묘한 느낌이 없었을 텐데 비교적 크지 않은 공간에서 앞에 앉았기 때문인 듯했다.
그럼에도 소리 자체는 워낙 훌륭해서 라이브를 즐기기에 아주 좋았다.과거 몇 차례 파라디소에서 야외 공연을 했었는데 야외 공연의 특성상 소리에 만족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오늘 Jazz Club Muddy 내에서는 밸런스 외에 소리의 질 측면에서는 아주 완벽했다.
말로의 공연에는 무대를 바라볼 때 오른쪽 앞자리가 좋다. 말로는 마이크를 오른손으로 잡고 왼손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며 노래할 때가 있다. 이 때 이 자리에 앉아있으면 마치 나를 가리키며 노래하는 것 같은데, 하마터면 하면서 나도 손가락으로 내얼굴을 가리키며 "나 말이예요?" 하고 물어볼 뻔 했다.
공연을 마치고 말로의 CD판매와 사인 행사가 있었다. 요즘처럼 CD대신 디지털 음원이나 유튜브로 음악을 듣는 시절에는 CD를 구입할 이유가 별로 없기 때문에 CD를 사서 사인을 받는 것은 일종의 의식으로 끝나게 된다. 이 의식은 좋은 음악을 들려준 연주자에 대해, 그리고 이 공연을 준비해 준 주최 측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기도 하다. 나도 준비를 많이 해서 강의를 열심히 했는데 Q&A에 아무 질문이 안 나와 멍 하니 서있게 되면내가 뻘쭘하기도하지만 좌장이 제일 힘들어한다.
2012년 파라디소 공연에서는 일부러 소장하고 있던 말로의 1집 CD를 들고 가 사인을 받았었다. 벌써 12년이 지났다니...
뒤풀이를 하는 동안 음악을 들으며 이제 마무리가 다 된 Jazz Club Muddy 내부를 살펴본다. 라이브 공연에 고급스러워진 귀가 일반 음원에 적응하는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창문 옆 벽에는 미술가 손석의 작품인 쳇 베이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지난 세기에 태어나 거의 생명력을 잃어가던 이 공간이 여러 사람들의 특별한 노력을 통해 되살아났다. 수년간의 치료를 통해 이제 겨우 재활이 끝난 상태이고 아직 다른 부분까지 완전히 제 기능을 할 만큼 회복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Jazz Club Muddy는 그 이름처럼 모든 사람이 빠져나오지 못하는 특별한 공간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늘 Muddy는 그것을 훌륭히 증명해 줬다.
뱅가드 클럽 라이브처럼 전설이 될 <말로밴드 Live at the Muddy> 앨범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