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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 Mar 12. 2022

이번 주, 두 편의 연극 관람기

더 많은 실험을.. 해주세요

연극 무대라는 것은 아주 많은 것이 가능한 공간이라는 걸 나는 변방연극제를 통해 배웠다. 2019 서울변방연극제의 거의 모든 작품을 봤었다. 휴학 중이었다. 아마 연극 때문에 휴학을 했다. 그때 수강신청도 다 했고, 교수님들과 안면도 텄고, 몇몇 수업은 이미 과제에 필요한 조 편성도 이루어졌던 것 같다. 나는 휴학을 하고, 휴학을 한 다음에도 일본과 근현대 한국의 페미니즘에 대해 다룬 수업과 연극론을 가르치는 수업을 청강 느낌으로 수강했다. 그때쯤엔 아마 친구들도 다 바빴고, 취업 준비를 하는 친구도 있었고, 이미 학교를 떠난 친구도 있었다. 원래부터 혼자였지만 더 혼자된 기분으로 유령처럼 학교 강의실에 앉아 있다가 저녁에는 극장으로 갔다.


그때 변방연극제가 뭔지도 잘 모르고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극단이 예전에 이 연극제에서 공연을 했고, 그걸 시작으로 연극 활동을 확장해갔다는 것만을 이유로 연극제 자원활동 같은 것에 참여했다. 모든 작품을 볼 수 있었다. 그때 서울 곳곳에 많은 공연장이 있다는 것도 알았고 지금까지도 찾아다니는 극장 리스트가 그때 형성되었다. 그중에서도 미아리고개예술극장은 좋은 곳이다. 거기에서 본 공연 중에서 크게 실망스러운 적이 아직까지 없다. 공기가 서늘하고 동굴 같고, 커다란 무덤 안 같은 곳이다.


참여작들의 면면을 보면 아마 그건 연극보다는 전시와 무용과 토론회나 프리젠테이션 발표에 가까운 형식이었을지도 모른다. 무대 위에 흰 반팔과 속옷만 입고 의자에 결박된 사람이 그림처럼 고정된 장면, 커다란 비닐 튜브에 공기를 주입하고 그걸 칼로 가르면 하얀 연기가 나오면서 끝나는 극, 세 명의 무용수가 거칠게 숨을 쉬며 열심히 허공을 즈려밟다가 바깥과 통하는 문 하나를 열면서 극장이라는 공간이 순식간에 흩어지는 경험 그런 것이 몇 년째 내가 연극을 쫓아다니도록 만들었다. 여기 아니면 없는 이야기와 형식과 공기와 장면이 존재했으니까, 거기로 갔다.


지금 극장을 가면 다음으로 가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 여기, 내 이야기가 없고 내가 기다리는 것이 없음을 확인하고 황급히 밤거리를 나서면 어디로 가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것은 마치 촌스러운 은유처럼 내가 현재 당면한 질문과 맞닿아 연극을 보던 그 순간보다도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더 극적으로 만든다. 그리고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예매해둔 다른 공연들을 취소한다. 더 이상의 확인은 필요하지 않았다.


화요일에 본 공연은 원작 희곡을 읽고 갔다. 예매를 취소하고 싶어서 원작을 읽고 별로면 바로 취소해야지 하는 생각에 읽은 것이었다. 웬걸 희곡이 좋아서 취소를 할 수가 없었다. 무심코 기대감까지 생겨버렸다. 그리고 화요일 당일 저녁에 공연을 보면서 나는 내가 읽은 희곡마저 짓밟힌 기분이 되었다. 희곡의 대사와 형식으로서 그 자체로 빛을 내던 것이 점차로 실물의 무대와 배우에 의해 잡아먹히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극장 밖으로 나오고 싶었으나 30석이 채 안 되는 소규모 객석을 차지한 한 사람으로서 그런 잔인한 짓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목요일에 본 공연은 유명한 공연이었다. 유명한 극장의 유명한 사람들이 만든 연극. 그것은 메시지에 매달리고 기댄 나머지 아름다움이 사라져버린. 너무나 선명한 그 메시지만이 남고, 나머지는 다 흩날려 사라져버렸다. 화려한 옷과 무대와 얼굴과 조명과 대사와 그런 것들이 하나의 흐름을 만들지 못하고 겉돌았다. 그건 슬픈 일이었다. 왜냐하면 커다란 극장에서 몇 시간을 버틴 많은 관객들과 그 공연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와 자아를 조금씩 갈아 넣었을 사람들이 조금은 공허해져야 하니까. 공허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공연을 보는 내내 집에 갈 생각을 놓지 못했으므로 다 보고 나서 내 손에 남은 글자 하나 하나가 허전했다.


어렵다. 하지만 이건 어떤 증명이다. 새로운 무언가를 나는 원하고 있고, 그게 지금 손 뻗는 곳에 없고, 하지만 그 무언가가 대략 어떤 것인지 노력한다면 알 수 있으리라는 것. 그러므로 좀 더 명징한 눈으로 기준으로 판가름할 수 있다. 지금 이 작품이 그걸 가지고 있나, 가지고 있지 않은가. 지극히 주관적인 그 눈으로 나는 무언가 볼 수 있게 되었으므로 공허하고 허전한 마음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결론을 내고 싶다.


일단 지금은 연극보다도 희곡이 재미있다. 현대일본희곡집과 중국현대희곡총서를 읽고 체호프 희곡 전집,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이 책장에 꽂혀 있다. 최인훈의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가 수록된 한국현대희곡선도 도서관에서 빌려두었다. 텍스트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매력적이다. 무대를 보는 것보다 이게 무대화된다면 무엇이 가능할지 상상하는 편이 더 흥미진진하다. 텍스트가 가진 가능성을 들여다보기. 지금 내 시간은 여기에 도달해 있다.




2022.03.12. 토요일




정세영 <Shame Shame Shame>(2019 서울변방연극제)의 마지막 장면. 공간은 미아리고개예술극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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