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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 Jun 24. 2023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2021)

고레에다 히로카즈 / 이지수 옮김


-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


(22) 웅덩이. 웅덩이가 생기면 사람은 처음으로 물을 의식한다. 그 의식이 쌓여 비로소 '앎'으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25) 나는 사람들이 '국가'나 '국익'이라는 '큰 이야기'로 회수되어 가는 상황 속에서 영화감독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큰 이야기'에 맞서 그 이야기를 상대화할 다양한 '작은 이야기'를 계속 내놓는 것이며,



- 감독은 책임질 수 있을까


(39) '답'은 아직 찾지 못했고, 그런 것을 찾으며 만들고 있는 것도 물론 아니지만, 분명 이후의 작업을 통해 '아... 그랬구나' 하는 발견이 또다시 계속되겠지요.


(44) 저는 '다큐멘터리'란 처음부터 목적이 뚜렷한 프로파간다와는 달리, (취재) 대상과의 관계 지속과 그 변화를 동시 진행으로 기록해나가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애초 의도했던 방향과는 완전히 반대쪽에 있는 결론에 이르고 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이 재미이며, 어려움이며, 자유로움이며, 다큐멘터리가 지닌 '위험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자유로운 '정신'은 극영화를 만들 때도 잊지 않고 싶습니다.



- 모놀로그와 다이얼로그


(57)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만들 때도 생각했지만, 제 경우는 취재 대상에게 제 쪽에서 무슨 행동을 취해 상대의 상처를 후벼 파기보다 '듣는' 자세로 그저 곁에 있는 경우가 많은 듯합니다. 상대가 말하고 싶어질 때까지 기다립니다. 귀로서 거기에 존재합니다. 어디까지나 수동태, 리액션이죠. (...) 처음에는 이 방식에 대해 그런 수동적인 자세로는 작품을 못 만든다고 비판받은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말하기'보다 '듣기'가 훨씬 어려운 행위라는 것을 최근 들어 깨달았습니다. 듣는 사람이 존재함으로써, 만약 상대가 없었다면 혼잣말(모놀로그) 혹은 말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이 대화(다이얼로그)가 됩니다. "아......" 하는 맞장구 하나로 풍성한 커뮤니케이션으로 변합니다.



- 자기 내면의 정의


(65) 저널리스트가 규범으로 삼고 따르는 것은 공동체의 도덕이나 국익이 아니라 더욱 큰 '윤리'이며 자기 내면의 '정의'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를 '공공성'이라 부릅니다.



- 복수에 대한 생각


(75) 어제 시부야의 시어터 코쿤에서 노다 히데키 씨의 <오일>이라는 연극을 봤습니다.


(76) 만약 아시아를 향한 시선, 즉 '아시아에 대한 가해자인 일본'이라는 시선이 중층적으로 도입되었다면, 그 후에 그려진 '복수심'이라는 감정은 보다 복잡하고 성숙해지지 않았을까 합니다.



- 각본


(156) 미숙한 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번 지진에 관해서는 더 시간을 들여 제 나름의 방식으로 묘사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이번 지진이 저에게 무엇이었는지 말이나 영상으로 정착시키기보다 혼돈한 상태 그대로 품고 있고 싶습니다.


(158) 제가 직접적으로 지진을 주제로 영화를 만들 것인가 하면, 아마 안 만들겠지요. 그러나 앞으로 현대를 묘사할 경우에는 당연히 그런 일상에 대한 의식 변화를 작품에 반영하는 수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 나를 만든 영화 66편


(179) TV 일을 할 때 영화를 찍고 싶어서 매우 질투하면서도 동경했던 작품들이 있어요. 20대 마지막부터 30대 무렵까지 봤던 작품들 가운데 크게 영향을 받았던 건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들이죠. 그 중에서도 <연연풍진>을 가장 좋아합니다.



- "영화를 하고 있기에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고레에다 히로카즈X정성일)


(238) 제가 세대를 나누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고 그러다 보면 꼭 잘못 이해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굳이 일본에서 제 세대를 나누자면 저는 62년생이고 일본 오타쿠 세대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오타쿠 세대는 윗세대인 단카이 세대가 정치적으로 실패하는 것을 목격했고, 단카이 세대가 정치 참여, 사회 참여를 실패하는 과정을 봤기 때문에, 그 결과 비정치적인 존재가 됐습니다. 오타쿠 세대는 자기 취미 세계에만 함몰하기 시작한 세대이기 때문에 가장 비정치적인 세대일 겁니다. 저는 창작자가 되기 전부터 그런 비정치적인 상황에 늘 위화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저의 베이스가 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스스로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을 의식하면서 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를 만들면서 깨닫게 되는 건 슬퍼하는 것보다 분노하는 게 더 강할 수 있고, 답을 제시하는 것보다 질문을 던지는 것이 훨씬 더 넓어질 수 있다, 확장성이 있다는 겁니다.


(252) 타르콥스키의 영화를 보고 학생들에게 어떻게 영화를 봤는지 질문하셨어요.(하스미 시게히코의 강의/ 타르콥스키의 <노스탤지아>) 예를 들어서 학생이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면 "그것은 영화 어디에 비춰져 있었습니까? 어디에 나타나 있었습니까?"라고 질문하시더라고요. 영화란 거기에 비춰져 있는 것, 나타나 있는 걸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관점으로 말씀하시는 걸 듣고 정말 큰 문화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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