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혜와 채연(1)

덕분에 나도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by 재치

신혼여행에서 돌아올 때 나는 디즈니월드 미키, 미니 인형을 두 친구에게 선물했다. 슬혜와 채연(가명). 그 둘은 모두 고등학교 시절 친구인데, 나에게는 친구를 넘어 가족의 범주에 더 가까운 이들이다. '친하다'는 표현보다는 '믿는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그런 관계.. 공교롭게 결혼 전후로 슬혜, 채연과 각각 반년 정도씩을 함께 살기도 했는데, 단언컨대 이 둘과 함께 보냈던 시간은 내가 다사다난했던 30대 초반을 버틸 수 있던 근간이었다.

나는 먼저 슬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슬혜는 나와 닮은 친구다. 얼굴이 닮았다는 것은 아니고(슬혜는 내가 미인 대회를 권했을 정도로 아주 예쁜 친구다), 추구하는 가치, 취향 이런 것들이 많이 닮았다. 반이 달라서 인사 정도만 하는 사이었던 슬혜는 대학교 면접을 보러 육지 여정을 함께했던 것이 계기가 돼 친해졌다. 결과적으론 우리 둘 다 면접에서 떨어져 제주에 남게 되었고, 우리는 그 헛헛한 마음을 서로에게 의지하며 채워나갔다. 같이 단기 크루즈 아르바이트를 하고, 초등학교 영어 방과 후 수업 보조교사로 일해 보기도 하고, 같은 해외 인턴십 프로그램에 해 걸러 참여했다. 우리는 서로의 진로에도 큰 영향을 줬다. 슬혜는 나를 따라 잠시 교사의 꿈을 꾸기도 했고, 나는 중등 영어교사 임용시험에 떨어진 그 해에 그를 따라 공공기관 취업을 준비하기도 했다.

우리 둘의 좌표가 계속 겹쳤던 것에 대해 돌이켜 생각해 보면, 물론 외국어에 대한 흥미, 끊임없이 성장하고 싶어 하는 타고난 성정 탓도 있겠지만, 우리를 둘러싼 환경도 그에 못지않게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보수적이었던 가정환경, 끝도 없는 학교에서의 경쟁, 착하고 자랑스러운 딸로서의 기대 등등. 우리는 욕구도, 결핍도, 지고 있는 무게도 비슷한 것이 많았다.


그렇지만 내가 슬혜를 좋아했던 건 비단 우리가 닮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닮았다고 인지하게 된 것 자체가 이 글을 쓰고자 그를 떠올리며 든 생각이니.. 내가 슬혜를, 또 슬혜와 보내는 시간을 소중히 여긴 큰 이유 중에 하나는, 그와 함께일 때 내가 더 좋은 사람일 수 있는 믿음 때문이었다. 나를 바라봐주던 슬혜 시선은 언제나 관대했고, 따듯했다. 슬혜의 시선에 따르면 나는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 현명하고 강한 사람이었,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낼 때면 또 그 만남 이후로 한동안은 나는 정말 그런 내가 듯한 최면에 걸리곤 했다.


그런 슬혜와 함께 반년의 시간을 보내게 된 건 슬혜가 다니던 직장을 잠시 휴직했던 때였다. 당시 내 집에는 남는 방이 있었고, 휴식하는 방식과 방법을 고민하는 슬혜에게 나는 나의 집에서 리프레시할 것을 권했다. 처음에는 슬혜도 고민스러워했지만, 나는 30대에 접어든 우리가 같이 이렇게 살아볼 기회는 지금뿐이라고 그를 설득했다. 그렇게 우리는 23년도에 약 6개월의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됐다.


각 개인에게 있어 이 반년은 투쟁의 시간이었다. 나는 결혼을 앞두고서 회사 소재지가 옮겨지는 이슈로 결혼을 하네마네, 또 결혼을 준비하면서 이직 시도를 병행하느라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슬혜는 직장 그리고 일상에서 지친 마음을 회복하고, 그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숙고하느라 다른 결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로서는 치유와 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매일 저녁 각자의 하루가 어땠는지 이야기를 나눴고, 음식을 함께 만들어 먹었고, 같이 이따금 엉엉 울었다. 이렇게 슬혜와 보낸 하루, 하루는 다음 날 전쟁을 치를 치의 양분이 되어줬고, 어쩌면 삶에 진짜로 중요한 건 우리가 매몰되어 있는 것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환기를 주었다. 우리들의 동거가 끝나갈 무렵, 슬혜와 나는 그 소회로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하루 끝에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식사를 함께 하는 게 얼마나 행복하고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어."


"너와 함께하는 시간 덕택에, 나도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토요일 연재
이전 04화인생에 정답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