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서 영화 ‘오펜하이머’가 머지않아 서비스 종료된다는 소식을 듣고, 그 주에는 꼭 봐야지 마음을 먹었다. ‘한정적’이라는 속성은 언제고 사람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어준다. 그리고 그 주 수요일 아니 목요일이던가.. 아이를 재우고, 소파 옆 협탁에 다과상을 조촐히 차려두고, 이미 이 영화를 봤다던 남편은 서재에 두고, 마침내, 홀로, 영화를 재생했다.
세계 2차 대전 중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총괄 담당한 물리학자 ‘오펜하이머’를 다룬 전기영화인 이 영화는, 집중력을 잃어버린 건 아닌지 의심되었던 그 시기의 나조차도 몰입하게 했다. 이유를 굳이 찾자면 순수한 재미였기보다는 어려움을 이해하기 위한 애씀에서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리학이라는 소재 자체가 꽤 어려웠고, 여러 시점을 넘나드는 복잡한 구성, 개인의 욕망과 과학자로서의 윤리 사이에서 고뇌하는 오펜하이머의 감정선을 이해하고 따라잡으려면 온 정신을 집중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중간에 한 번 아이가 깨 아이에게 다녀왔어야 했는데, 그 순간마저도 몰두에서 비롯된 두통의 잔상이 이어졌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이 영화의 각종 어려움들이 나에게 감동으로 점철되고 나서야 머리의 열이 좀 가셨다.
영화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마침 아이가 배가 고파 다시 울었고, 나는 여느 때처럼 수유를 했다. 그런데 그날은 문득 이런 생각들이 드는 것이다.
이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지금 정도의 무사안일함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오펜하이머는 압도적인 파괴력을 지닌 원자폭탄의 개발로 세계의 평화와 질서가 유지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결국엔 전 세계에 핵무기 12,000개를 양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누군가의 잘못된 판단 하나로 이 세상은 불시에 핵전쟁에 휘말릴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나 우리나라는 휴전국으로 언제든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나라이지 않은가.
이 아이가 전쟁에 끌려가면 어떡하지?
불현듯, 서양의 영화에서 전쟁에 나갔던 자식의 비보를 전해 들은 어머니가 울며 쓰러지는 클리셰 같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연금 문제는 어떠한가.
아니 애초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소멸해 버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날로 무더워지는 이 땅에서 아가, 너도 사계절의 분명한 마디를 느끼며 살 수 있을까?
내 코가 석자,라는 말을 앞세워 주변이의 부침과 예견되는 먹먹한 미래를 외면해 왔었지만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의 나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수유하며 알아챈다. 경쟁을 거듭하던 난 어느 시점부터는 세상이 나의 조건에만 유리하게 기능하여 주길 바랐는데 이제는 이 사회가 내 아이와, 내 아이의 친구들이 여전히 꿈을 꿀 수 있는 공간으로 남아주기를, 아니 적어도 기본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울타리가 되어주기를 바라게 된 것이다. 내가 살아가지 않을 먼 훗날도 여전히 희망이 남아있기를, 내가 느꼈던 삶의 기쁨들이 지속되기를 바라게 되었다.
아이를 낳고 변한 것이 무어냐는 질문들에 그다지 변한 게 없다고 답하곤 했는데, 엄마가 된다는 것은 정말 다른 차원의 영역에 들어서는 것임을 깨닫는다.
내 몸에서 생성된 젖이 너에게로 흐르듯, 내 시간이 내 일생으로 그치지 않고 이 아이에게로 흘러가는 것임을 자정 가까운 시간 수유를 하며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