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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완성시킨 음악의 디테일

킹스맨 속 '영국' 클래식 음악

by Aurore오로르

'신사의 나라 영국'을 작정하고 가득 담은 영화, 킹스맨

영화 속 클래식 음악에는 어떤 '영국스러움'이 들어갔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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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투르게나마 영상을 제작하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느낀 것 중 하나는 바로 BGM이었어요. 메이저 광고대행사에서 일하던 지인이 영화를 보면서도 제작 중인 광고에 들어갈 BGM을 골라내던 것이 생각납니다. 이렇다 보니 영화를 만드는 분들은 넓은 음악적 취향을 갖고 계신 경우가 많은데요. 덕분에 영화 속에 예리하게 큐레이션 된 음악들을 살펴보면 작업자들의 고민과 흔적을 느낄 수 있지요.



킹스맨은 '영국 신사'를 전면에 내세웠어요.


매끄럽고 길쭉하게 떨어지는 슈트, 반짝반짝하게 닦인 옥스퍼드화, 깔끔하다 못해 우아함이 느껴지는 장우산뿐만 아니라 실제 클래식 슈트 산업의 본고장인 새빌로우(Savile Row)의 양복점을 킹스맨 아지트로 선정한 것까지 모든 면에서 '영국 신사'를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킹스맨 제작자들이 선택한 음악에는 어떤 포인트에서 '영국 신사'를 느낄 수 있을까요?

common (1).jpeg 출처: 네이버 영화



영국을 대표하는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

출처: 네이버 영화

악당 발렌타인을 중심으로 한자리에 모인 각 나라의 권력자들. 이들은 환경을 위해 인류의 숫자를 줄이자는 끔찍한 발렌타인의 계획에 동참한 사람들이에요. 인류 대량 청소 계획을 외부에 발설하는 순간, 이들의 귀 뒤에 심은 칩이 폭발하게 됩니다. 에그시와 친구들은 발렌타인을 저지하기 위해 직접 뛰어들어 활약을 펼치는데요. 멀린이 발렌타인 컴퓨터를 해킹해 모든 칩이 한 번에 터지는 장면, 여기가 영화의 하이라이트죠.

매튜 본 감독은 해당 장면에 들어갈 음악으로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을 선택했어요.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은 한국 대중들에게도 유명한 곡이지만 영국에서의 위상은 생각보다 크답니다. 조지 5세, 6세,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서 연주되었고 올해 5월에 있었던 찰스 3세 대관식에서도 연주됐어요. 영국인들에게 이 곡을 두 번째 애국가랍니다.

사실 영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중요한 행사에서 쓰이는데 미국의 모든 졸업식에서 항상 울려 퍼지며 한국의 문재인,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에서도 쓰였지요.



BBC 프롬즈(Proms)에서 최초로, 유일하게 교향곡이 앙코르 된 사례


iPhone 14 & 15 Pro Max - 24.png (좌) 에드워드 7세(Edward VII) / (우) 에드워드 엘가(Sir Edward Elgar)


엘가는 친구에게 군인들을 위해 썼는데 사람들을 완전히 사로잡을만한 곡이라고 말했습니다. 엘가가 보기에도 이 곡의 힘이 느껴졌던 모양이에요.


1901년, 영국 공영방송 BBC에서 주관하며 세계에서 가장 큰 클래식 음악 축제에 속하는 프롬즈(Proms)에서 처음으로 위풍당당 행진곡을 선보입니다.

얼마나 반응이 좋았는지, 관객들은 지휘자가 당황할 정도로 격하게 앙코르를 요청했어요. 길이가 꽤나 긴 교향곡을 무려 2번이나 더 연주합니다. 지휘자는 프롬즈에서 오케스트라 연주가 두 번이나 앙코르 된 유일한 사례였다고 회고했죠.


이후 엘가는 영국 왕실의 연락을 받습니다. 에드워드 7세가 자신의 대관식에 곡을 사용하고 싶으니 가사를 붙여달라는 요청이었어요. 시인 아서 크리스토퍼 벤슨이 가사를 담당해 '영광과 희망의 땅(Land of Hope and Glory)'이 탄생했고 실제 대관식에서 말 그대로 '위풍당당하게' 울려 퍼집니다.


1904년, 엘가는 기사 작위를 받게 되죠.



에그시와 엘가의 공통점과 차이점

킹스맨의 주인공 에그시는 뒷골목에서 험하게 자라난 청년이에요. 킹스맨 입단 시험을 치를 때도 명망 있는 집안의 자녀들이 그를 은근히 무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늠름한 풍채를 자랑하는 위풍당당 행진곡 역시 타고난 영국 신사가 아닌 만들어진 영국 신사에게서 태어난 음악이랍니다. 엘가는 평범한 상인 집안 출신에 무명시절이 길었던 작곡가였거든요.


그는 서른 살이 넘도록 피아노를 가르치며 근근이 생활했는데요. 엘가의 일생을 빛나게 만들어준 인연이 찾아옵니다. 바로 아내 앨리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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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는 유서 깊은 명문가의 자녀였는데 멘델스존의 제자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5개 국어에 능통했으며 소설까지 펴낸 작가였어요. 그녀는 엘가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왔다가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죠. 서로의 집안 배경에서 차이가 컸기 때문에 부모의 반대가 극심했지만 모든 것을 이겨내고 결혼하게 됩니다. (엘가가 앨리스에게 자신의 마음을 담아 결혼 선물로 준 것이 '사랑의 인사'예요.) 앨리스는 엘가의 재능을 믿어주고 언젠가는 빛을 발할 것이라며 꾸준히 음악을 할 수 있도록 격려했어요. 길고 지난한 무명 생활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응원 덕분이었죠.


https://youtu.be/v0Hl0CcM-A4?si=1TPi0UMGDLYQHJGc

엘가의 '사랑의 인사' (Elgar: Salut d´amour)



엘가는 앨리스와 결혼하면서 자연스럽게 영국의 상류 사회를 접하게 되는데요. '수수께끼 변주곡'을 발표한 이후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출신 배경 때문에 무시당하거나 냉대를 받는 경우가 많았어요.

에그시와의 차이점이라면, 에그시는 결국 세계를 구해내고 인정을 받았지만 엘가는 상류층의 거절에 상처를 받고 귀족사회를 동경했다는 것이에요. 결혼 후 그는 영국 귀족 말씨를 사용하려고 노력했고 악보에는 유독 품위 있게 연주하라는 뜻의 Nobilmente가 자주 등장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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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롬즈에서는 마지막 날, 모두가 영국 국기를 흔들며 다 함께 이 곡을 제창해요. 자부심과 환희에 찬 눈빛의 영국인들이 하나가 되어 노래하는 모습을 보며 괜스레 마음에 감동이 일기도 합니다. 아래 링크에서 축제의 하이라이트를 감상할 수 있어요.

https://youtu.be/V6c0zwVv9Tg?si=B4rL2yFI8Jx2_Q42



디테일의 끝판왕, 이 장면을 알아본 사람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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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킹스맨에서 많은 분들이 잘 알지 못하는 포인트가 있는데요. 악당들의 머리가 터지는 장면의 폭탄 색이 프롬즈의 조명색과 일치한다는 거예요. 예전부터 위풍당당 행진곡과 프롬즈에 대해 이야기를 전했던 저도 인지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답니다. 이렇게 디테일한 설정이라니,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되네요.


https://youtube.com/shorts/Tn4qXbzVVL8?si=xf2LXZQOArOkwBvU



오늘은 영화 킹스맨에서 선택한 클래식 음악에서 '영국 신사'의 포인트를 찾아봤어요.

영화의 디테일한 부분들을 찾아내다 보면 영화를 다방면에서 더 깊게 감상할 수 있게 되어 재미가 배가 되는 것 같아요. 오늘 저녁에는 엘가를 생각하면서 오랜만에 킹스맨을 다시 꺼내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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