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부고 소식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회사가 거의 마칠 무렵 아버지에게 온 연락이었다. 당황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생각에 10분 정도는 멍하게 보냈던 것 같다.
'우선 경조사 휴가를 써야 하고, 남은 일은 노트북을 가져가서 해결해야 할 것 같고, 일단 집에 가서 옷을 챙겨 저녁에 바로 버스로 내려가야겠다. 회사에 경조사를 올리지는 말자. 다들 부담스러울 거니까.'
급하게 집에서 짐을 주섬주섬 챙기고 시골로 가는 버스를 예약했다. 내려가는 내내 멍하게 시간을 보낸 것 같다. 평소 같으면 잠을 잘 법도 한데, 창밖 풍경을 보며 멍하니 그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한 것은 지난주에 할머니를 뵙고 왔다는 점이었다. 나는 어릴 적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자랐다. 그래서 가족이라고 하면 당연히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포함되었다. 함께 살았기에 너무나 당연한 가족이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대학교 신입생 시절 돌아가셨는데, 다행히 좋은 대학에 간 걸 보여드리고 가셔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할머니는 치매가 심해지셨다.
그 무렵 삼촌과 고모까지, 두 분이 1년 사이에 돌아가셨다. 우린 할머니에게 할아버지와 본인의 자식들이 연이어 돌아가신 걸 알리지 않았다. 할머니의 슬픔과 건강을 고려해 말씀드리지 않고 장례를 치렀다. 그 무렵부터 치매가 심해진 할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기 시작했다. 집에서 모시기에는 어머니가 너무 고생하셔서, 할머니께는 너무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때부터 명절마다 요양원에 계신 할머니를 가끔 뵙긴 했지만, 어쩌면 할머니를 잊고 산 적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몇 번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은 적이 있었고, 지난주에도 위급하다는 연락에 얼굴을 뵈러 갔었다. 고비는 넘겼다고 했지만 의식은 없으셨다. 살이 남지 않은 앙상한 몸에 여러 튜브가 꽂혀 있는 모습을 보니,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할머니를 고생시키시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안타까움과 동시에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고향에 도착하고 나서
고향에 도착해 만난 아버지는 눈물을 많이 흘리신 듯했고, 목소리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나에게는 할머니지만, 아버지에게는 어머니였던 분을 떠나보낸 마음이 너무나 속상해 보였다. 시골이라 가축들 사료를 줘야 했기에, 이른 아침 소밥을 주고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그곳엔 큰아버지 가족분들이 계셨다.
나는 어쩌다 보니 방명록과 부의금을 받는 역할을 맡았다. 아버지는 교회 장로셨는데, 나름 인품이 있으셔서 손님이 굉장히 많았다. 나중에 보니 문상객이 200명 정도 되었는데, 그중 직접 오신 아버지 손님이 160명 정도였다. 손님이 적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아버지 손님이 정말 많았다.
나는 밤을 거의 새웠다. 대부분의 가족은 어린 자녀가 있거나 가축을 돌봐야 해서 숙소로 돌아갔다. 소위 말하는 '장손'도 아닌 내가 어쩌다 보니 빈소를 지키며 밤을 새우게 되었다. 신기한 것은 장례 기간 내내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커피와 박카스 덕분인지, 아니면 평소 불면증에 적응된 덕분인지, 밤 10시면 잠들던 내가 새벽까지 꼬박 빈소를 지켜도 피곤하지 않아 스스로도 놀랐다.
몇 달 동안 지속되었던 허리 통증도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을 기점으로 씻은 듯이 사라졌는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해도 참 신기한 일이었다.
정말 감사했던 것은 교회 분들, 먼 친척들, 마을 사람들도 오셨고, 심지어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분들까지 위로하러 와주셨다는 점이다. 애사에 와주신 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한 분 한 분 소홀히 대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할아버지 장례식 때는 친척끼리 싸우기도 하고 서운함을 크게 토로해서, 어린 내가 보기에도 보기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할머니 장례식에서는 친척 어른들도 나이가 들고 기력이 빠지셔서 그런지, 싸우기보다 서로 화해를 많이 하셨다. 어쩌면 할머니가 남기신 마지막 선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부끄러웠던 소란
물론 큰 소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발인 예배를 마치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큰아버지의 큰아들이 화를 냈다. 사정인즉슨, 그간 할머니의 병원비 약 400만 원을 큰아버지가 내고 계셨고, 추가적인 장례식장 비용이 500만 원 정도 나왔다. 내 생각에는 우선 큰아버지 측에서 결제하고 나중에 정산해서 나누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결제를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었더니, 갑자기 큰아들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내 말을 오해해서 '큰아버지 쪽에서 다 내라는 거냐'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더 말할 틈도 없이 당장 400만 원을 내놓으라고 소리를 쳤다. 내 돈이 아니기에 아버지께 여쭤보고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새를 못 참고 나를 따라오며 계속 화를 냈다. 발인 예배를 마치고 손님들이 모여 있는 상황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니 너무 부끄러웠다.
하지만 할머니를 보내는 마지막 길이라 화를 내지 않고 알겠다고 한 뒤, 얼른 400만 원을 쥐여주었다. 큰아버지와 아버지의 부의금 안에서 해결해야 했기에 두 분의 의견을 여쭤봐야 하는 내 상황이 답답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내 돈으로 던져주고 해결하고 싶었지만, 돈 문제이기도 하고 두 분 다 상심에 잠겨 계셔서 결정을 빨리 내려주지 않으셨다.
큰아버지의 큰아들도 삶이 팍팍하다 보니 돈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장손인 본인이 상황을 파악하고 결제 방식을 논의했으면 됐을 텐데, 왜 나에게 화를 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나는 본의 아니게 돈 정리만 했을 뿐인데 말이다.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니 '우리가 돈을 떼먹을 거라 생각했나' 싶어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빈소를 밤새 지키고 조문을 받고 예배를 준비한 건 우리 가족인데, 어떻게 그렇게까지 생각할 수 있을까 아쉬움이 남았다. 예전 할아버지 장례 때는 우리 가족이 모든 비용을 부담했지만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당시 큰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사이가 좋지 않아 우리 아버지가 장남 역할을 대신했었기 때문이다. 이번 할머니 장례만큼은 큰아버지께 장남 역할을 하시라는 의미였는데,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않아 안타까웠다. 이제 다시 엮일 일이 없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할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서운함을 잊으려 노력했다.
발인을 마치고
나는 장례 기간 중에 거의 울지 않았다. 슬픔보다 감정이 몽롱했고, 어머니를 잃은 아버지와 고모들을 챙기며 장례가 차질 없이 진행되게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컸다.
딱 한 번 울었던 것은 할머니를 화장터로 모셨을 때다. 관을 화로에 넣기 전,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아버지와 고모들은 관을 만지며 눈물을 훔치셨는데, 이상하게 나는 관을 만질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무언가 스치듯 몸을 만지는 느낌이 들었다.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나를 안아주고 가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부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참으려 해도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울음이 터져 나와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채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나만 그렇게 크게 울어서 민망하기도 했지만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그 후 한동안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장례를 마치고
우여곡절 끝에 장례를 마쳤다. 부모님이 나중에 편하시도록 조문객 명부를 엑셀로 정리했다. 한 분 한 분 연락처를 찾고 수소문하느라 새벽까지 작업이 이어졌다. 하지만 할머니 장례에 와주신 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커서 제대로 정리하고 싶었다.
휴대폰 사용이 서툰 아버지를 대신해 문자로 감사 인사를 모두 전해드렸다. 장례를 마치고 나니, 할머니가 이제 천국에 가셨다는 생각 때문인지 오히려 마음이 후련했다.
원수처럼 지내던 친척들이 화해하고, 가족과 신앙의 소중함을 다시금 일깨워준 것. 이 모든 것이 할머니가 남기고 가신 마지막 선물이 아닐까 싶다.
평생 고생만 했던 할머니가 이제 하나님 품에서 행복하게 계셔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