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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May 10. 2020

다시 떠올려본 나의 입시 이야기

사교육 없이 시골에서 명문대에 우여곡절로 간 이야기

필자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필자는 본인이 시골에 살고 있는 줄 몰랐다. 가게는 걸어서 1시간 정도 가야지 있었고, 영화관이나 편의점, 오락실 같은 것도 당연히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다른 동네와는 다르게 마을 앞에 버스가 하루 4번 지나간다는 것과 보건소가 있다는 것에 매우 큰 자부심을 느꼈다. 초등학교 당시 한 학년이 5명이었고, 전교생이 21명이었기에 정말 가족같이 지냈다. (장난도 많이 치고,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 그랬다.)


이러한 생활의 장점은 사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크게 공부에 대해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대입을 미리 준비하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가끔 인터넷에서 대학 입시를 열심히 준비하는 도시의 학생들을 보면서 남의 일인 양 안타깝게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필자는 중학교 3학년까지는 그렇게 큰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공부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초등학교 때는 꼴찌를 해도 5등 안에 들어서 잘한다고 생각했고(다시 말하지만, 한 반이 5명이었다.), 중학교에서도 20명 정도가 한 반이라서 10등 정도는 곧 잘했던 걸로 기억했다.


그러나 사춘기가 오면서 점차 필자의 미래에 대해서도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때쯤 되어서 본인이 시골이라는 곳에서 살고 있다는 자각과, 이곳을 떠나 도시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화관이나 피시방, 지하철도 매우 타고 싶었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을 진학할 당시, 배치고사가 있었는 데 필자가 다닌 학교는 사실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 것으로 유명하진 않았다. 그렇다 보니 처음부터 꽤 상위권에 배치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국에서 순위가 높거나 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고등학교에서 선두로 시작하고, 어쩌면 좋은 대학교에 가서 서울 생활을 누릴 수 있겠다는 기대도 조금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집안 형편도 녹록지 않은 데다가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면 고등학교 내내 장학금을 받을 수도 있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씀에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그때부터 들었다. 애초에 모교에 오게 된 것도 재정적인 이유가 컸다. 당시 필자는 조금 비싸더라도 좋은 고등학교에 가보고 싶었는데(모교가 나쁘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누나가 형편을 생각해서라도 이곳에 가는 게 맞다고 하였고, 지금도 누나의 조언에 너무나 감사하다.


처음 친 모의고사 성적은 마음을 많이 아프겠다.

배치고사와는 다르게 모의고사는 전국에서 백분율이 나왔는 데, 필자의 기억으로는 수학에서 50~60점 (4등급?), 국어, 영어는 그보다 살짝 높은 정도의 성적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나 역시도 별다른 특이한 학생이 아니라 그저 그런 학생으로 지나갈 것만 같았다. 그때 필자의 생각에는 이 성적에 익숙해지고 싶지는 않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때 한 책을 읽게 되었는 데, 박철범이라는 작가의 '하루라도 공부만 할 수 있다면'이었다. 정말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책이었다. 명문대에 합격한 수기였는데, 그 책을 읽으면서 여러 면에서 그 작가의 삶에 공감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던 시골에서 공부하여 여러 고난을 거치고 명문대에 합격한 모습이 내게 큰 감명을 주었다. 왜냐하면, 당시에 내가 가진 환경에서 남들과는 특출 난 성과를 내거나 좋은 성적을 받는 게 과연 가능할까 에서부터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책은 내게 정말 큰 동기를 부여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다음 날부터, 그 책에서 나온 대로 똑같이 행동하게 되었다.

애초에 필자는 사교육을 접할 환경이나 여건이 안 되었기에, 사실 상 독학으로 공부를 하여야 했다. 책에서는 하루 종일 일어나서부터 공부만 생각하며 잘 때까지 공부만 하다가 잤다고 했다. 지금은 어림도 없는 소리지만, 당시에는 그 말을 정말 필사적으로 믿으면서 따라 하고자 했다.


학교에서는 친구들이 조금은 떠들고 그래서, 새벽에 한 4시 정도에 일어나서 학교 가기 전에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때 주로 영어 듣기랑 국어 공부를 했는 데, 특히나 국어 공부는 다른 시간에 하면 도무지 집중에 안 되었기에 새벽에 일찍 일어나 공부를 하였다. 영어 듣기의 경우는 필자가 영어를 정말 잘 못했기에 매일 하려고 노력하였다.


수업 시간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선생님의 말씀에 집중하였고, 쉬는 시간에는 수학 문제를 풀면서 최대한 버리는 시간이 없도록 하려고 했다. 당시에는 심지어 물도 잘 안 마셨는데, 쉬는 시간에 화장실 갈 시간에 공부를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림도 없는 소리이다. 지금도 내 책상에는 커피와 콜라 캔이 즐비한다. 그러나 성적은 사실 여느 선배 졸업생들보다 크게 좋지도 못했고 오히려 조금은 낮아서, 선생님들도 당시에는 나를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지만 크게 별 다른 학생이라고 생각지는 않으셨던 것 같았다.


당시에 필자는 주말마다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와드렸기에 보다 주중에 학교에서와 집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게, 아무래도 남들에 비해서는 시간적으로 여유가 부족하여서 최대한 주중에 집중하여 주말에 못한 공부를 따라잡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래도 농사일을 돕다 보니 별 다른 운동을 안 해도 꽤 건강한 몸을 유지했다.(그래서 이때부터 팔뚝이 신체에 비해 좀 굵어졌다.)  


아쉽게도, 1학년을 마칠 때 까지는 성적의 급격한 상승은 보기 힘들었다.

특히나 수학 같은 경우는 아무리 노력해도 80점을 넘기기 힘들었고 이는 3-4등급을 넘지 못했다. 사실 주로 4등급을 받았다. 당시 필자는 가감하게 의사를 꿈으로 목표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4등급은 의사가 되기 힘들었다. 2학년이 되어서는 문이과를 나눠야 했기에 필자는 정말 고민이 컸다. 무엇보다 필자보다 공부를 잘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이과로 가고자 확고히 마음을 먹었다. 아무래도 내신 점수를 생각하면 내가 문과로 가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친구보다 잘할 자신이 없었다.(항상 내가 그 친구보다 성적이 낮아서, 아무리 노력해도 그 친구는 못 이길 것 같았다.)


그래서 의사라는 꿈도 접고, 문과에 덜컥 가게 되었다. 2학년이 되긴 전 겨울 방학에 정말 매일 같이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였다. 당시 '강한 수학이라 고 불리는 문제집'이 있었는데 문제량이 많은 수학 책을 가지고서 1학년 내용과 2학년 초반 내용을 정말 많이 반복해서 풀었다. 하루에 100개 정도의 문제를 풀기도 했는 데, 어려운 문제의 경우는 필자는 답지를 빨리 보고, 다시 한번 문제집을 풀 때에 생각해보면서 풀어보았다. 그렇게 한 문제집을 한 3-4번을 풀었다.


사실 이처럼 같은 문제집을 여러 번 푼 것은 수학 만이 아니었는 데, 국어와 영어도 같은 문제집을 3-4번 푼 것을 기본으로 생각했기에 다른 연습장에다가 답을 적고 문제집을 깨끗하게 풀었다. (지금도 이게 습관이 되어서 내 전공 책은 줄 하나 안 그어져 있을 때가 많다. 공부를 안 해서 그런 것도 있긴 하다.!) 이는 사실 반복이 중요하기도 했고, 문제집 값이 조금은 부담스러워서 부모님께 부담드리고 쉽지 않아그런 것도 꽤 컸다. 조금은 다른 얘기지만, 항상 1000원 정도의 돈을 들고 가서 라면 하나로 점심을 때우고 저녁 10시까지 도서관에 있었는 데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 애처롭고 열심히 살았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한편, 한 영어 선생님께는 부탁 드려, 문제집을 잠시 빌려서 공부하여 깨끗하게 하여 다시 돌렸 드렸다. 그래서 선생님의 책장 속의 문제집을 모두 풀 수 있었다. 지금도 그 선생님께 너무나 감사드린다.


아무튼, 그렇게 치열하게 겨울 방학을 보내고 나서 2학년 4월 모의고사를 치게 되었다.

당시 모의고사 치는 날의 한 2주 전부터 배가 너무 아팠는 데,  그만큼 스트레스가 컸고 당시 선생님들께서 나와 공부 잘하는 친구를 비교를 많이 하셔서 너무 속상했기에 더욱 그랬다. 아무래도 선생님들께서는 내가 조금 더 열심히 하라는 좋은 뜻으로 그러셨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감사하다. 하지만, 그렇게 겨울 방학을 보내고 나니 2학년 모의고사에는 긴장보다는 빨리 나의 성적이 얼마나 향상되었을지 보고 싶었다.


그렇게 친 모의고사에서는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성적의 향상이 있었다. 그때부터 400 점 만점(국영수, 탐구 2개)에서 370~380점 대로 성적이 들어섰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전까지는 한 320~350을 왔다 갔다 했었다. 특히나 수학은 거의 다 맞아서 1등급이었는데, 이후로는 모두 1등급을 받았다.


그때 학교에서는 작은 소란이 있었다.

이렇게 이처럼 좋은 성적을 받은 학생이 그렇게 흔하지는 않았기에 선생님들이 수업 시간에 들어오실 때마다 학업에 대한 좋은 조언을 해주셨다. 그 후에 공부는 순풍에 돛 단 배 마냥 정말 신나게 했다. 그때부터 주말에도 학교에 와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학교가 사실은 가장 공부하기도 좋고, 편했다. 주말에 선생님들이 계셨는데, 난 혼자 교실에 들어와서 아침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혼자 공부를 시작하는 것은 사실 때로는 많이 외로웠다. 텅 빈 교실에 혼자 책을 긁적거리면서 가끔씩 창가를 보곤 했다.


창가에 비친 운동장의 푸른 잔디와 따뜻한 햇살을 보니, 언젠가는 이곳을 어서 나가 조금 더 큰 물에서 놀고  싶다고 다짐했다. 물론, 여기서 다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집안 사정과 더불어 친구들과의 소원해진 관계, 이외에도 여러 가지 환경에 대한 불평을 많이 했다. 내신 관리도 사실은 정말 열심히 하여서 항상 1등급을 유지하였는데, 그러다 보니까 친구들의 시샘도 많이 받았다.


특히나 친한 친구들과는 정말 많이 멀어졌다. 그때 내게는 좋은 대학교에 가는 것이 가장 우선순위라서 친구들과 대화하는 것도 멀리 했다. 선생님도 어느덧 내가 왕따가 아니냐고 생각하셨다. 사실은 거의 왕따 비슷한 상태였지만, 자존심도 강했고 무언가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래서 친구들과는 거리를 먼저 두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후회하고 좋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전혀 대학에 가는 데에 친구들이 방해가 되는 것도 아니고, 사실 대학이 전부도 아니다. (나중에는 다시 친하게 연락하고 지낸다.)


아무튼, 그러한 말 못 할 집안 사정과 친구 관계 등등으로 인해 나는 더욱 공부에만 몰두하려고 했다.

그것만이 내가 겪고 있는 심리적인 갈등과 문제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한다면 나는 정말 모든 것을 잃는다는 불안함도 있었다. 그래도 이 불안함을 가지고서 2학년 동안은 잘 버텨왔다. 그러나 오히려 3학년이 되자 잘 참아왔던 불안함은 결국 현실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가끔 교실에 혼자 있으면, 여러 가지 나쁜 생각이 들기도 했고(아무래도 우울증도 좀 있었던 것 같다.), 도무지 공부에 집중을 잘할 수 없었다. 영어도 집중이 잘 안 되었고, 때로는 가슴이 답답하여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그러다가 체력 검사를 했었는데, 평소에 가장 건강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체력이 가장 꼴찌로 나왔었다. 항상 앉아 있었기에 체력도 많이 망가졌고, 사실 무엇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3학년 처음 모의고사를 최고점으로 하였는데, 그때가 백분율도 99.3% 정도였고 전체에서 1-2개 정도밖에 틀리지 않았다. 다들 칭찬을 해주시는 가운데, 스스로는 무언가 이미 잘 못된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심리적으로 이미 너무 소진한 상태였다. 그때 만약 같이 얘기를 들어줄 친구 하나만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믿거나 말거나, 난 공부만 했지 대학이나 전공에 대해서 전혀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말 그대로 정말 공부만 했고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도 잘 몰랐다. 난 당시 '농어촌 전형'이라는 특별전형으로 대학 수시를 모두 썼는데, 사실 내신이랑 모의고사를 고려하면 서울대릉 가는 것도 그리 크게 어렵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수시를 서울대 딱 하나만 쓸려고 했다. 그러나 담임 선생님의 극구 만류에 다른 대학교를 포함하여 총 4군데를 쓰게 되었다. 그때 워낙 급하게 작성하고 있던 터라, 서울대에서 쓴 자소서를 거의 비슷하게 하여, 다른 학교의 잘 알지도 못하는 학과에 지원했다.(나중에 알고 보니 꽤 괜찮은 학과긴 했다. ) 급할 수밖에 없었는 데, 당시 지원 마감일 이틀을 남기고 4군데에 지원하기로 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분들에게는 부디 미리 전공과 대학을 준비하시기를 바란다. 나는 정말 바보같이 시간을 보냈었다.


2014년 수능은 정말 따뜻한 날에 치러졌고, 이 날만 지나면 모든 게 끝난다는 생각에 정말 그냥 많은 문제를 찍었었다. 그래도 잘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결과는 이때까지 받은 성적 중에 최악이었다. 농어촌 전형은 최저 기준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조차 맞출 수 없었다.


그때 내가 느낌 감정은 정말 화가 난다는 격동적인 감정이라기보다는 너무 우울해서 아무런 감정을 느끼거나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그 후 한 동안 시험 트라우마(?) 비슷한 것이 생겨, 간단한 시험 조차도 칠 수가 없었다. 이후 토익 시험이나 자동차 면허 시험 같은 것에도 여러 번 떨어졌고, 시험이란 시험은 다 기피했다. 극복하는 데 시간이 정말 많이 걸렸다. 처음 SKY 대학 2곳은 당연히 탈락이었고 그래서 나머지 하나는 확인을 안 했다. 다행히 교대에 합격하여 선생님이 되어야겠다고 스스로를 다짐시켰다. 혹은 그곳에서 재수를 해야겠다고 생각도 했다.


그러나 담임 선생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부모님도 그렇고 다들 정말 한 동안 아무 말 없이 지냈다.

부모님께서는 수고했다면서 별말씀이 없으셨지만, 부모님이 내 걱정을 많이 하시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한 번도 웃지도 않고 그냥 멍하니 방에서 지내는 나를 부모님이 혹시나 어떻게 될까 깊이 걱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때 수능 끝나고 본 자동차 면허 시험에 한 3번이나 낙방했었다.(아무래도 부모님 농사일 도와드리는 데에 포터 차를 끌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날도 우울하게 집으로 들어왔다.


당시 나는 휴대폰이 없어서 어머니 휴대폰으로 모든 것을 가입하고 연락을 받게 해 두었다.(고등학생 때 내가 가장 잘하는 것 중 하나는 휴대폰이 없이 지냈던 것이다.) 어머니 방에 들어와서 문자 하나가 왔다고 하셨다. 문자를 보니 SKY 대학 중 하나에 예치금을 내일까지 넣으시라는 문자였다. 당연히 나는 스팸메일이라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다. 그러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대학에 합격 결과를 조회나 해보았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나는 합격해 있었다. 처음에는 정말 거짓말인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대학만 최저 기준이 다르게 적용되었고, 그때도 수학은 1등급이어서 가까스로 최저는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날 저녁에 나는 서울에서 학원을 운영하는 친척 형에게 연락하여 내가 합격한 학교가 좋은 곳인지, 학과도 괜찮은지 여쭤봤다. 친척 형은 내게 강남의 모든 사교육에 쓰이는 돈이 거기에 들어가려고 쓰인 다며 자기라면 무조건 그곳으로 가겠다고 말씀하셨다. 누나들은 나의 합격 소식에 비명을 질렀고, 학교 담임 선생님의 내 형편을 아시는지라 예치금이 부족하면 대신 내주시겠다면서 어서 내일 예치금을 넣으라고 하셨다.


사실 내가 간 학교는 학비가 비싸서 선뜩 바꿀 용기가 잘 나지 않았다.

서울대에 가고 싶었던 것도 학비가 저렴한 것도 꽤 컸으니까. 그러나 여러 기관과 장학 단체에 지원을 하여서 운 좋게 학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아무튼 여기까지가 내가 대학 입시를 하게 된 이야기이다.


이렇게 힘들게 대학에 들어오다 보니, 정말 힘들었던 군대에서의 부조리도, 해외에서의 말도 안 되는 인종 차별도 믿기진 않겠지만 잘 이겨낼 수 있는 내성이 생겼던 것 같다. 물론, 여전히 입시를 나름 성공적으로 마쳤다 해도, 그 후 한 동안 시험 트라우마와 우울증, 대인 기피증, 낯선 타지 생활에 극복하고 적응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남겨져 있었다.


지금은 당시의 감정을 많이 잊어버려서 고등학생 분들의 마음을 내가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다만 그때 적었던 일기를 문득 보면서, 정말 힘들었구나, 정말 지금의 고등학생 분들이 많이 고생하고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원래는 사교육 없이 대학에 온 경험과 뭔가 교훈을 줄 수 있을까 했는데, 내가 그럴 위치는 아닌 것 같다. 모든 학생들이 부디 조금은 맘고생 덜하고, 건강을 챙기면서 할 수 있다면 즐겁고 건강하게 공부하셨으면 좋겠다. 열심히 사신만큼, 그 고생과 역경이 좋은 결과로 나타나길 바라며, 적어도 그러한 기억이 앞으로 삶을 살아가는 데 큰 자산이 될 것이라 조심스럽게 말씀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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