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데일렌 Apr 16. 2021

우리들의 못난 영웅

-우리의 형들을 위하여

*2014.04.16. 세월호의 침목에 희생 당한 그 수많은 분들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 글은 세월호 참사를 주제로 적은 허구의 글입니다. 이는 참사에 대하여 가벼이 여기고자 함이 아니라 다시 한번 그들의 희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적은 글임을 알려드립니다.







창 밖은 비가 하루 종일 내리고 있다. 수없이 내리는 빗방울은 누군가를 대신해 울어주기라도 하는 듯이 우중충한 얼굴로 눈물짓고 있었다. 이 억센 빗길을 뚫고서 연약한 초인종의 소리가 울렸다. 아마도 예상대로라면 내가 알고 있는 얼굴이 나와 같은 표정을 하고서 문 앞에 서있을 것이다.

"안녕."

"역시나 네 얼굴은 죽상이구나."

"그러는 너도."

우산도 소용이 없었는지 축축한 발걸음으로 집안에 들어온 녀석은 매가리 없이 억지웃음을 지었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 않는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는 사람을 보는 것은 생각보다 썩 좋은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그런 그를 제치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자 그도 따라서 내 옆자리를 잡고 앉았다.

"목 아파. 발목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심지어 근육까지 잔뜩 뭉쳐서 여기저기 쑤셔대는 걸 보니 무리했나 봐. 조금... 힘드네."

그의 지친 음성이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난데없이 찾아와 투정 부리는 것에는 상관없었다. 서로 바빠 그리 자주 만나는 것은 아니지만 어릴때부터 둘은 떨어뜨려놓을 수 없던 절친한 사이였고, 언제든 불쑥 찾아와 나를 놀래키곤 했으니까. 다만, 내가 당황한 이유는 음, 그 날 이후로 아마 처음일 것이다. 힘들다라는 단어가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이.

어찌 보면 사람으로서 당연하게 내뱉을 그 단어가 그의 입에서는 이리도 어색하게 느껴지는 게 듣지 못할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아마 평소의 그는 제 신념 가득한 얼굴과는 다르게 장난스런 분위기로 사람을 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늘 상 분위기를 띄우며 장난만 치는 사람이 진지하게 힘들다는 소리를 하는 것이 굉장히 오랜만이라 반평생을 봐온 친구임에도 어색했다.

"하아."

그럼에도 소파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한숨을 깊게 내뱉는 그의 모습이 썩 그리 보기 좋은 것이 아닌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를 위로해 줄 만큼 나의 기분이 괜찮은 것도 아니었기에, 고개를 떨군 그의 옆을 조용히 지키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설령 기운이 남았더라도 무언가 말을 할 분위기도 아니었고, 마땅히 해줄 만한 게 없다는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한동안은 정말 가만히 있던 것 같다.

10분? 20분?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변한 것이라고는 옆에서 아무런 말도 없던 그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움직인다는 것뿐이었다.

땅에 처박을 것 같던 얼굴은 어느샌가 내 어깨 위에 자리 잡혔다. 한쪽 어깨가 무거웠으나 그것이 그의 무게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마음이 어깨 위에 올라와서 인지는 알 길이 없다. 이 무게에 어떤 위로를 해주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그저 어깨 위에 안착한 머릿통에 손바닥을 올려두는 것밖에 별달리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그의 머릿통 위를 손바닥으로 두어 번 토닥였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어릴 적부터 위로는 늘 서툴렀으니 내가 하는 이 행동은 내가 학생일 적에 죽은 형이 해주던 행동을 똑같이 재현하는 것 이외에는, 달리 생각나는 위로는 없었다.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던 침묵은 머릿통에서 토닥거리던 손이 내려옴과 동시에 깨졌다. 손을 내리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머릿통 주인에 의해 손이 무릎으로 되돌아왔을 뿐이다. 어깨 위에는 아직까지 그의 머리가 올라가 았었으나 더 이상 불편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사실, 아까보다 더 낮게 내리깔린 그의 목소리에 의해 신경이 곤두서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산에 다녀왔어."

이 한마디를 내뱉은 그가 침묵하는 것을 보니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산이라. 용케도 다녀왔다는 생각과 함께 자연스레 시선이 시곗바늘을 향했다. 11시 26분. 그가 들어온 지 어느덧 1시간이 흘러있었다. 짹각거리는 시침이 한 바퀴를 돌았을 때, 그는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새벽 일찍 산에 올랐어. 거기서 벌목도 하고, 제사도 지내고... 인사도 했다. 납골당에 자리도 없다며 강에 흘려보내려는 그 뼛가루를 도저히 못 보겠다고 둘이서 악을 쓰며 산에 묻어줬잖아. 그렇게 물귀신 된 사람들 산에 올려놨잖냐.  물은 지겨울 것 같아서 강에 안 보냈다고, 고마워하라고. 그렇게 인사하고 돌아왔다."

담담한 말투로 말하는 주제에 손은 왜 그렇게 벌벌 떨고 있는지. 5년이 지나도 여전하는 생각과 함께 나 또한 그 자리에 멈춰서 있다는 사실에 서글픈 조소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5년. 형이 죽은 지도 벌써 5년이 지났다. 몇 번의 제사를 치르며 이 집에 혼자 남게 된 것도 어느덧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언제까지고 곁에 있을 것 같던 형이 죽어버린 건 한 순간의 사고였을 뿐, 누군가가 예측한 일도 아니었고, 누군가 계획한 일도 아니었다. 그저 빌어먹게도 운이 나쁜 형이 사고에 휘말린 것뿐이었다.

2014. 04. 16.

형이 그토록 가보고 싶다 노래를 부르며 탄 커다란 제주도행 배는 그 큰 포부와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빌어먹을 선장은 배를 버리고 탈출했고, 수학여행을 위해 단체로 배에 몸을 실었던 고등학생들을 포함한 수많은 여행객들이 침수당했다.

그 끔찍한 사고 현장 속에서는 내 철부지 형과 옆에 앉은 녀석의 형이 가라앉고 있었다. 사고 당일 후 한동안 각종 뉴스나 웹사이트 기사는 침몰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았다. 처음에는 모두가 탈출했다 보도한 뉴스기사와는 달리 제대로 구조된 승객은 몇 없었다. 승객들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지시한 뒤 배를 버리고 탈출한  선장과 선원들은 온 국민들의 욕받이가 되었다.

웃기지도 않지, 인간도 못 되는 짐승 놈들 때문에 우리의 형들과 몇 백명의 사람들이 허망하게 죽어나갔다는 사실에 어린 나는 분노했고, 그 분노 끝에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나약함에 좌절했다.

수색대는커녕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해양경찰들과 구조대원들을 보며 악에 받쳐 울며 비명을 지르고, 탄식하며 주저앉을 때가 돼서야 두 명의 시체가 수면 위로 꺼내져 왔다. 나와 녀석의, 그렇게 찾아 헤매던 형들의 시체였다.

그들은 창백한 피부로 물에 퉁퉁 불어 가히 제대로 된 사람의 형태가 아니었다. 늘 시끄럽고, 단 한순간도 빼놓지 않고 우리에게 장난을 치며 즐겁게 웃던 형들이 더이상 숨을 쉬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며, 조용했다. 그들의 어울리지도 않는 침묵이 남긴 마지막은 참으로 허망해서 나는 더 이상의 눈물조차도 맺을 수없었다.

겨우 시체를 건져냈을 뿐이었다. 그 시체가 말해주는 답은 결국 우리의 형들은 이미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희망도 뭣도 없이, 평생 내 곁에 있을 것 같던 형이 죽어버렸다는 사실만을 상기시켰다. 대체 왜 그 날 제주도를 가야 했을까. 비행기를 타면 될 근방의 섬 하나를 무슨 낭만에 겨워 배를 타고 가야 했는지도 이해할 수없었다.

아니, 사실 그딴 건 상관없었다. 왜 형들이 지금 저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않는지에 대한 답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사건을 깊숙이 파헤치는 뉴스에는 형들이 보였다. 갑판 위에 서있던 형들은 배가 기울이자마자 바다로 탈출 했었다. 분명 그랬다. 저 뱃속에서 허무하게 침몰당한 것이 아니었다.

이 바보 같은 형들은 어선 위로 무사히 구조되었다. 배가 침몰하는 와중에도 나라에서는 도와줄 사람 하나 오지 않았고, 그 당시 빠져나온 관광객의 수는 소수의 몇몇 뿐이었다고 한다. 저 멀리서 들리는 어부의 뱃소리. 구조를 하가 위한 배는 자그마한 고기잡이 배 몇 척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다행이라고 느낄 만큼 절박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배 위에서 겨우 정신을 차린 형들은 정말 바보 같았다. 그 자리에서 어부의 배를 타고서라도 나왔어야 했다. 적어도, 그 배 위에 올라가 숨이라도 고르고 있어야 했다. 그 상황에서 제 몸하나 건사하기 힘들 텐데도 형들은 주위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고 바라도 뛰어들었다.

학생들을 구하고 승객들을 구했다. 몇 명을 구했는지는 모르겠다. 구해낸 생명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형들은 최선을 다 했다고 그렇게 전해 들었다.

그랬는데, 그런데 이게 뭐야. 제 몸하나 구하지도 못하면서 남을 구하다가 결국은 저 배와 함께 가라앉았다. 마지막까지 남을 구하려고 애쓰다 죽어버렸다.

뉴스에서는 이들을 영웅이라 불렀다. 영웅이라 칭송할 뿐, 영웅의 호칭은 우리들의 형을 살려낼 수는 없었다.

형들의 시체가 이끌려 나왔을 때 시민들은 박수를 쳤다. 옆에 있던 유가족들은 시체라도 찾아서 다행이라며 우리를 달랬다. 형들이 자랑스럽다 그리 외쳤다.

그러면 뭐해, 내 형은 죽어버렸는데.

영웅이 된 형들은 부모에게 불효자가 되었다. 나와 남겨진 주위 사람에게는 그리도 모진 사람이 되어버렸다.

사건을 조금씩 깊이 파헤칠수록 나는 형이 그저 바보 같았다. 왜 제 몸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그렇게 바다로 뛰어들어야만 했을까. 죽음으로 뛰어들 때 가족 생각 한 번쯤은 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당시 작고 어리석던 나의 생각은 깊지 못하였다.

지금은 다 지나간 일에 더 이상의 사족 붙여 무엇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이가 먹고서야 형들이 살려낸 생명이 더 많으니 두 사람이 자랑스럽다 여길 수도 있게 되었다. 두 사람이 지켜낸 수많은 목숨이라니, 자랑스럽지 않다면 그것 또한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딱 그뿐.

형은 그때 그 순간에도, 몇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어느 누구와 비교할 수없을 만큼 내게 소중했다. 사실은 형들이 살린 사람들 따위는 나와 관계없었다. 수없이 지나는 밤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형이 살아난다면 형들을 살려달라 바라는 기도를 여전히 하고 있을 만큼, 내 삶에서 형은 나의 기둥이었다.

시체가 올라오고서 처음에는 당황스러워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 창백하게 누워있는 시체들 위로 단 한마디도 꺼낼 수없었다.

그렇게 내뱉지 못한 말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슬픔이 밀려왔고, 화가 났고, 형들이 너무나 미웠고, 마지막에는 원망스러웠다.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불효도 그런 불효가 없다며 얼마나 욕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런 미움과 원망들을 수도 없이 내뱉고 나서야 그들이 그리워졌다.

그래, 뭐든 상관없다. 죽은 사람에게 더 이상의 미련은 허락되지 않았다. 나의 형들은 미웠고, 미운만큼 그리웠고, 그리운만큼 소중했으니까.

나뿐만 아니라 내 옆에 있는 녀석도, 우리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였을 터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큰 상심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당시에 가라앉은 형들이 돌아오기만을 그렇게 울고 불며 애원하던 부모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나이를 먹고서 생각이 정리되자 확실히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죽은 형들은 다시금 되살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다. 형들을 보낸 지 벌써 5년이 흘렀고, 나는 어느새 형의 나이가 되어있었다.

형이 죽고 나서 날이 참 빠르게 간다고 느꼈다. 며칠은 시간이 영영 멈춰버린 것 같다가 2년 정도가 지나고부터는 사는 시간이 두 배로 지나가는 것 같았다. 내 옆에 있는 녀석은 그럴 때마다 형이 자신의 인생을 같이 사는 것 같다고 말했다. 두 생명이 하나의 세월을 사니까 두 배로 빠르게 지나는 거라고.

어떻게 보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형이 죽고 난 후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기계적인 일 일뿐, 그 사건이후의 시간은 오로지 형들의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할 뿐이었다. 남들이 보이게는 너무 심한 거 아니냐는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 허나, 떠나간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사람들은 그들이 그리울 수밖에 없다. 며칠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나도. 나에겐 오로지 하나뿐인 형이었으니까.

세월호의 기사들은 사고 당시부터 3년 정도가 지나가 더 이상 올라오지 않았다. 광화문 앞에서 시위하던 사람들의 규모는 점차 줄어들었고, 이제는 각자 생활에 묻혀 개인 시위 한 둘 정도일 뿐, 그 누구도 삶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다.

오로지 유가족들만이 슬픔에 잠겨있을 뿐이다.

시간은 평범하게 흐른다. 사실 나와 친구조차도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 사회는 항상 암울하게 지낼 만큼 여유 있는 곳이 아니었고, 각박한 삶은 현실이었으니까.

다만, 4월 16일. 형들이 죽어가던 날.

우리는 형들의 기일이 되어버린 이 날만큼은 무표정조차 짓지 못할 만큼 슬퍼했다. 미련은 세월이 지나도 언제나 남는다. 살아있을 때 잘해줄걸, 좀 더 말 잘 듣는 동생이 될걸, 좀 더 사랑한다고 표현할 걸. 그 모든 것들의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4월 16일은 자괴감에 빠져드는 날.

'저 아이 형이 뉴스에 나온 영웅이래.'

'어머, 불쌍해서 어떡하니 정말...'

'죽은 형이 자랑스럽겠구나. '

우리의 형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수군거렸다. 동정 어린 시선으로 죽상인 우리의 얼굴을 보며 하는 말은 '힘내, 형들이 자랑스럽구나. 좋은 곳으로 갔을 거야' 같은 가벼운 위로였고, 뒤에서는 '불쌍하네, 쟤가 걔 동생이야? 쟤 부모는 마음이 찢어지겠다' 등의 반응이었다.

웃기지 마, 제멋대로 형들을 평가하는 저들의 새치 혀를 뽑아내고 싶었다. 1년은 매일을 얼굴에 그림자를 띄우고 살았다. 그러다 원망이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바뀔 때, 문득 형들은 우리의 얼굴을 보며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지를 생각했다.

그때부터 우리들의 일상이 조금씩 달라졌다.

형들은 바보 같을 정도로 항상 활기차게 웃고 다니며 사람들을 웃음 짓게 했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동생이 본인 때문에 죽상인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웃고 다녔다. 형들처럼 누구보다 활기차고 즐거운 인생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물론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매일같이 슬프고 그리웠으나 그 매일을 노력했다. 그 누구보다 많이 웃고 살기를, 형들이 살아있을 적 보다 더욱 활기차게 사는 것을 목표로 하며 살아나갔다.

그러니 4월 16일 만은 우리들이 유일하게 죽상인 채로 있을 수 있는 날이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날. 오늘만큼은 우리들이 꾹꾹 눌러 담아 홀수를 이루던 슬픔을 쏟아낼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다.

11시 56분. 4분 뒤에는 형들이 바라는 삶으로 돌아가야 했다.

나는 아직까지도 형들이 그리웠다. 그들이 다시 살아 돌아올 수만 있다면 남은 인생을 다 걸어낼 수 있을 만큼 다시 보고 싶었다. 그들의 체온을 느끼며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이 기나 긴 잔혹한 꿈이었기를 바랄 만큼 그들의 활기 넘치는 모습을 눈에 담고 싶었다.

11시 58분. 내년 이 날짜에 다시 인사 갈 형들의 묘가 떠올랐다. 그 무덤 속에 있을 형들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랐다.

11시 59분. 이제는 흐릿한 기억으로 남은 형들의 얼굴이 흩어졌다. 아아, 이제는 그만 생각해야 해. 올해의 그리움을 여기서 끝으로 그들을 보내주어야 할 시간이었다.

00시 00분.

"돌아갈게."

아까 기운 없던 그의 얼굴은 말끔히 사라지고 평소의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 형들을 위해 울어줄 시간은 끝이 났다는 것이다. 이제는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서 그들이 바라던 인생을 살아가야만 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씁쓸한 미소와 함께 그들의 안식을 빌었다. 그들의 희생을 자랑스러워하며.

우리들의 영웅은 잠들어야 할 시간이다.

작가의 이전글 비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