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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호 Oct 04. 2017

자전거 타고 서울에서 부산

하루하루 평범하지 않았던 일들 궁금하시지 않으세요?


  서울-부산 저전거여행

  2013년 7월 30일, 원하던 목적지에 도착하기 1KM 가 남았다. 온 몸은 땀으로 젖 었고 허리에 찬 가방에는 생수통 1L짜리 3개가 꽂혀 있다. 등에 맨 조그마한 자전거 가방에는 물 2L 생수병,  속옷 2장, 기능성 티-셔츠, 금방 마르는 반바지, 지갑, 충전기가 들어있다. 그렇게 나는 물 몇개와 배낭 에 의지하고 서울에서 출발 했다. 마지막 목적지인 부산 낙동강 하구둑까지 1KM가 남았다는 사인이 보이고 지친몸을 이끌고 천천히 페달을 밟고 있다.


  때는 2013년 5월, 군대 전역하기 1달 남기고 막내 후임 박삼문 이 들어왔다. 안경쓰고 말랐으며 키도 작았고 소심한 스타일 이었다. 근무 끝나고 다 같이 샤워를 하는데 삼문이가 커피색 반 스타킹을 신고 샤워장에 들어왔다. 그래서 나는 “ 삼문아 다리에 반 스타킹 은 왜신은거야? ” 라고 물었다.

 삼문이가 말했다.

“1년 전쯤 4대강 자전거 국토종주 했을때 남은 영광의 자국입니다. 자국이 아직도 안없어 졌습니다.”라며 내심 자랑을 했다. 자국은 선명하게 남았다. 무릎을 기준으로 위로는 흰색으로, 아래는 검은색 으로 나눠져 있었다. 나는 내 미래도 모른체 삼문이에게 장난을 쳤다. 그러면서 우리는 친해졌고 난 4대강 자전거에 대해서 묻기 시작했다. 전역 후, 삼문이의 커피색 반 스타킹이 나를 서울에서 부산까지 이끌지 상상도 못했다.


  전역 하기전에 별 것 아닐 것 이라고 생각 했던 4대강 종주가 전역 후 내심 무서워 졌다. 서울 촌놈 인 나는 항상 대중교통만 이용했다. 자전거를 타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간다는 생각조차 한적이 없었다. 더욱이 압박감을 준 것은 서울 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인 633KM 라는 숫자였다. 그래서 전역한 후 자전거 여행을 조금 미루 었던 것도 사실이다.


  전역한지 2달이 지난 후, 가야겠다는 마음을 잡았지만 도저히 혼자갈 엄두가 나지않았다. 그래서 가장 친한친구 현묵이에게 미끼를 던졌다. 현묵이는 미끼를 물고 파닥파닥 거렸다. 예상치 못한 현묵이의 대답에 더욱 들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미끼가 풀렸는지 현묵이는 핑계가 늘어갔다. 예를들면 자전거 체인이 망가졌다느니, 핸들을 오른쪽으로 틀면 왼쪽으로 간다느니..2주일 동안 현묵이를 기다렸는데 점점 내 모습이 비참해 보였다. 또한 현묵이도 미안한 마음에 말을 꺼내지 못했다. 준비는 이미 끝낸 상태였다. 저녘 11시에 티비를 보고 있다가 충동적으로 지갑과 여벌의옷만 챙기고 집을 나섰다.


  두려운 마음은 컸지만, 어떻게든 출발하면 되겠지 라는 마음이 강했다. 더욱이 후련했던건, 이제 현묵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더 가뿐해졌다. 늦은저녘 11시30분 경, 연신내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한강이랑 가장 가까이 붙어있는 옥수역에서 내렸다. 마음의 준비만 하면 모든게 완벽했다. (원래는 4대강 종주의 첫 시작점은 인천 아라자전거길 인데 너무 늦은 시간이라 한강이랑 가까이 있는 옥수역에서 시작 했다.)


  옥수역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고, 오직 가로등 몇 개만 빛을 밝히고 있었다. 분위기 자체가 나를 압도했다. 가슴이 빨리 뛰기 시작 했고 약간의 후회가 밀려 왔다. ‘괜히 왔나, 집에서 티비나 볼껄’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돌아 갈수 없었다. 이미 출발 하기 전에 친구들과 가족들 한테 호언장담을 하고 난 후라 다시 돌아 가기엔 늦었다. 일단 출발 해보고 힘들면 포기하고 돌아 오자는 생각을 하면서 자전거 핸들을 잡았다. 그리고 엉덩이를 들어 페달을 쎄개 밟았다. 혼자서 꽤 크게“가자” 를 외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페달을 밟다 보니 한강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엔 오직 나 혼자이며 , 믿을 사람은 나밖에 없다’라는 생각으로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핸들을 꺾었다. 느낌이 싸 한게 이상하다. 반대방향 으로 가는거 같아서 자전거 타다 쉬고계신 분께 여쭤보았다. 반대방향으로 가는거 맞 다고 말했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다시 핸들을 돌렸다. 자전거 여행이 잘 될지 의심이 되지만 자신있게 출발을 했다.


  내가 믿을건 오직 내자신과 4대강 펫말이다. 하지만 가는길에 펫말이 보이지 않는다면 한번쯤은 의심을 해봐야한다. 나는 팔당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바로 앞에 펫말이 있는걸 보니 잘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사람들이 없어졌다. 그럴때마다 두려움을 떨쳐 내기위해 혼잣말로 “화이팅” 을 외쳐가며 자기최면을 걸었다. 하지만 최면을 걸어도 안될때가 있는데 그것은 갑자기 4갈래 길이 나올때다. 무슨일이 생길때마다 화이팅 외친다고해서 해결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4갈래 길 앞에서 자전거를 잠시 세워두고, 지도를 보는데 60세 중순으로 보이는 지긋한 아주머니가 어디로 가냐며 저리로 가라고 했다. 마치 내가 여기 오는것을 알고 기다린듯이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이번여행 첫 스타트가 상당히 좋았다. 아주머니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한치 의심도 없이 자전거 안장에 앉아 “수호천사님 감사합니다” 를 외치며 출발했다. 불행인지 행운인지 몰라도 약 15분쯤 지나자 일렬로 나란히 있던 가로등이 하나씩 없어졌다. 밝았던 길이 한순간에 깜깜해지기 시작하는데 아주머님이 설마.…라는 의심이 들었다. 눈을 감고 타는지 뜨고 타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지금 순간에 의지할건 출발 하루전 미리 사뒀던 만원 짜리 싸구려 라이트 였다. 라이트는 자전거 페달을 밟을때마다 위아래로 흔들리는데 딱 그 가격 만큼했다. 사실 자전거 가게 사장님이 3만원 짜리 라이트를 추천했을때, 돈을 조금더 주더라도 비싼걸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또 풀들은 얼마나 크고 많은지 바람이 스쳐지나갈때마다 스사삭 소리가 나는데 등꼴이 오싹했다. 또한 벌레들도 불빛을 오랜만에 보는지 파티를 열었나보다. 벌레들이 신났는지 내얼굴에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지나갔다. 모든것이 삼박자 완벽했다. 날이 밝아 해 뜨는걸 본다면 귀신잡는 해병대 부럽지 않을 것이다. 약 1시간쯤 그길을 달리니 가로등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살아 있음에 감사함을 느꼈다.


  그길을 쭉 따라 새벽 4시경 팔당역 자전거 인증소에 도착했다. 수첩에 도장을 찍고 잠시 쉴겸 옆 의자에 앉았다. 5분 정도 쉬었을까, 내가 도착 한후 아버지 나이로 보이는 분이 도장을 찍으려고 자전거에 내렸다. 도장을 찍고 나온 아저씨는 나에게  “어디서 오는길인가? ”라며 물었다. 아저씨의 겉 모습은 완전 무장을 했고, 자전거 타는걸 좋아 하시는 분 같았다. 난 “서울에서 부터 왔습니다” 라며 웃으며 대답을 했고, 아저씨는 2박 3일 잡고 부산까지 내려 간다고 말했다. 아저씨는 시간이 없다며 자전거를 서둘러 타고 떠났다. 우리는 대충 인사를 하며 헤어졌고, 이 대화가 앞으로 미래에 무슨일을 갖고 올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저씨가 떠난 후 나도 다음 장소를 향해 달렸고, 그 다음장소에 쉬고 있는 아저씨를 발견 했다. 나는 아저씨께 인사를 드렸고, 우리는 짧은 대화를 가졌다. 예를 들면 어디까지 가는지, 어디서 잘껀지 등등 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대화가 끝나갈 무렵 혼자 가기에는 한국 사람의 정이 없어보여 같이 타기로 했다. 같이 출발 하기전, 혼자 생각으로 내가 너무 빨리 달려서 아저씨가 내 페이스에 못 따라올거라고 생각했다. 더불어서 ‘22살의 허벅지 힘이 아버님 나이에 질수없지’ 라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은 전혀 달리 아저씨는 자동차 처럼 쭉쭉 나가는 방면에, 나는 계속해서 아저씨와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후 난 무리 해서 자전거를 밟았고 마지막 단계인 엉덩이 까지 들며 아저씨 뒤꽁무늬를 쫓아 갔다. 나는 점점 지쳤는지 속도가 줄어 들었고 우리는 점점 격차가 벌어 졌다. 이대로 가기에는 같이 타는 의미가 없었다. 아저씨도 느꼈는지 나에게 “내가 뒤로 갈테니 앞에서 네 페이스 대로 가” 라고 말했다. 부끄러웠지만 티를 내지 않고 앞으로 갔다. 아저씨 앞으로 가니 갑자기 앞이 자동차 쌍 라이트 처럼 밝아 졌다. ‘아저씨는 5만원 짜리 라이트를 쓰나’ 라는 쓸대 없는 생각과 ‘나때매 아저씨가 피해 보면 안된다’ 라는 생각이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계속 무리 해서 달리다보니 자전거가 망가진 것도 모르고 계속 페달을 밟았다. 이상한 느낌이 나서 아저씨께 양해를 드리고 자전거를 세웠다. 자전거 브레이크가 망가졌다. 자전거 증상은 브레이크를 잡지도 않았는데 자동으로 잡혀 있었다. 그말은 즉 자전거 뒷바퀴를 돌리면 계속 돌아 가야 하는데, 세바퀴 정도 돌고 저절로 멈추는 것이다. 망연자실 하고 있던 순간, 아저씨는 준비 했다는 듯이 가방에서 자전거 수리 용품을 꺼냈다. 그리고 자신있게 내가 손을 봐주겠다며 10분정도 부품을 돌리고 풀고 자전거를 돌렸다. 아저씨는 끝났다며 자신있게 타 보라고 했다. 자전거를 타보니 더 망가져 있었다. 감사하다고 말씀 드려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몰랐다. 해는 밝아 오고 우리는 누워있는 자전거를 보며 뻘 쭘히 서 있었다. 계속 서 있기보다는 움직이는게 나을 것 같아서 망가진 상태로 자전거를 타기로 결정 했다. 같이 달리던 도중 아저씨는 4대강 길 보다 자기가 잘 아는 길이 있다며 그길로 따라 갔다. 20분 정도 탔으나, 길은 안 나왔고 우리는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 갔다. 출발점에 돌아 온 후 더이상 같이 타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을 했다. 자전거도 망가졌고, 체력도 다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난 아저씨께 예의 있게 인사를 드린후, 먼저 가시라고 말씀 드렸다. 우리는 서로 악수를 하고 격려의 몇 마디를 한 후 헤어 졌다.


  자전거를 타고 걷다 반복 하다 보니 해가 밝아 왔다. 시계를 보니 아침 8시 쯤 이었다. 자전거 수리점들은 하나둘씩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난 열려있는 가장 가까운 곳 으로 들어갔다. 들어 가자 마자 사장님은 내 자전거를 고정대 위에 걸었다. 그리고 자전거를 수리 했다. 제2의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아저씨 옆에 꼭 붙어서 확인을 했다. 15분이 지났을까, 끝났다는 말과 함께 난 자전거 뒷바퀴 를 다람쥐 통 돌리듯 계속 돌렸다. 아저씨가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이상이 없어서 돈을 지불 하고 밖으로 나왔다.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이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 보인다. 이런 소소한 행복이란 무엇과도 바꿀수 없을 것이다.


  벌써 자전거를 탄지 10시간이 되었다. 배가 고팠다. 식당을 찾기 위해 굶주린 하이에나 처럼 두리번 거리는 도중 자전거 여행자 환영 이라는 현수막이 보였다. 순대국 집이었는데 자전거 세울곳도 있었고 규모가 커 보이는 만큼 맛있을거 같았다. 자전거를 밖에 세우고 안에 들어갔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순대국을 주문 했다. 그리고 다음 일정을 위해 바로 핸드폰 충전하고 자전거 지도를 펴 어디서 자야 할지 거리를 쟀다. 만약 오늘 지치지 않으면 수안보 온천에서 숙박 하기로 했다. 지친다면 앞에 보이는 아무 모텔이나 들어가서 자기로 했다.거리를 재는 동안 음식이 나왔다. 10시간 만에 먹는 음식 이였다. 음식이 나오자마자 대하 드라마 추노 부럽지 않게 먹어치웠다. 거의다 먹다 보니 인삼과 대추가 남아 있었다. 종업원에게 물어 보니 인삼과 대추를 먹어도 문제 없다고 했다. 의심 없이 먹었다. 그리고 인삼과 대추의 힘을 받아 열심히 타기로 했다. 계산 하고 나와 자전거 안장에 앉았는데 속이 따듯 하다 못해 뜨겁게 불타 올랐다. 침만 삼켜도 속이 뜨거 웠다. 생각해 보니 항상 어머니께선 인삼이 안 맞는다고 먹지 말라고 말씀 하셨는데 먹고 난 후 생각이 났다. 잠시 자전거를 세워 두고 속에 있는 불을 끄기위해 물을 마셨는데 속이 더 아프다. 그냥 페달이나 밟아 야겠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비가 오기 시작했다. 몸은 추운데 속은 뜨겁다. 아이러니 했다.


  속은 아직도 뜨거웠고, 참고 버티며 페달을 꾹꾹 밟았다. 저녘 8시경 수안보 온천 펫말이 보였다. 약 1KM 정도 남았다. 부지런히 가고 있는데 경찰차에서 마이크 소리가 났다.
“거기앞에!! 자전거 세우세요”
나한테 말한 것은 아닌거 같아서 계속 달렸다. 하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주위를 둘러봤다. 나밖에 없었다. 모른척할까 하다가  멈췄더니 경찰차가 내 앞에 딱 섰다. 또 한번의 자전거 여행의 위기가 찾아 왔다. ‘왜 맨날 시련은 나에게만 오는가’ 라며 생각을 했다. 괜히 잘 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심장이 두근 거렸고 내가 뭘 잘못 했는지 생각을 했다.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경찰이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나를 보고 말했다.
“밤인데 왜 라이트도 안켜고 자전거 하이바를 안쓰세요?”
나는 최대한 겸손하게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사실 라이트는 켜나 마나 위 아래로 흔들릴 것이 뻔했고 자전거 하이바는 답답해서 잠시 벗었는데 그게 걸렸나 보다. 대화를 하다보니 경찰관은 자전거를 좋아 하는 사람 이었고, 나에게 말 한마디 건네고 싶었던 것 이었다. 경찰관은 나에게 격려와 길 안내를 해준 후 갈길을 갔다. 지방의 인심은 좋았다. 사실 서울에서는 자전거 하이바를 벗 던 말던 신경을 안쓰고 먼저 말도 잘 걸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는 달랐다. 안전에 유의 하라며 걱정 하니 감사 했다. 배낭에 걸었던 하이바를 쓰고 10분 정도 달리니 수안보 온천에 도착 했다. 도착 하자마자 입구에 큰 찜질방이 보였다. 편의점에서 대충 먹고 찜질방에서 오늘하루 첫날을 마무리 하기로 했다. 샤워를 하고 찜질방에 누워보니 바로 잠이 들었다. 22시간 정도 탔으니 지칠만도 했다. 자전거는 찜질방 안에다 세워 놨고, 앞 바퀴 뒷 바퀴 다 묶었다.


  어젯밤은 피곤 했지만, 찜질방에서 자는게 불안했다. 일어나니 새벽 5시 였다. 씻고 다시 나갈 준비를 했다. 샤워 하면서 자전거 생각이 나 길래, 서둘러 옷 입고 자전거가 있기를 희망 하며 밖으로 나갔다. 자전거는 다행히 잘 있었다. 새벽 5시, 수안보 온천의 새벽 공기는 상쾌하고 맑았다. 서울이랑 정말 공기의 질이 달랐다. 자는 동안 비가 왔는지 거리가 안개로 덮여 있는데 너무나 아름다웠다. 오늘은 조용히 지나가길 희망 하며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출발 하는 길은 몹시 가벼웠고 컨디션이 좋았다. 하지만 백두대간 이화령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두대간 이화령은 자전거를 자주 타는 사람도 힘들어한다. 산을 깎아서 자전거 길을 만들었는데 각도가 45도다. 평지가 없이 오르막 길만 약 2시간 정도 타고 올라 가야한다. 나는 초행길에 그것도 모르고 콧 노래를 불러 가며 4대강 사인이 보일 때 마다 "화이팅"을 외쳐 가며 눈치없이 신이 났었다. 수안보 온천에서 떠난지 1시간30분 정도 열심히 달려오니까 백두대간 이화령 고개가 입구가 나왔다. 올라가기 전에 입구에서 물방울이 하나씩 떨어 지기 시작 했다. 가방에서 우의를 꺼내 자전거를 씌우고 나는 비를 맞기로 했다. 입구 초반엔 엉덩이를 들고 씰룩씰룩 자전거를  올라갔으나 5분도 체 못타고 걷기 시작 했다. 걷는 도중, 갑자기 2박 3일 부산 아저씨가 생각이 났다. ‘그 아저씨는 1시간만에 올라갔을 거야’ 아니면 ‘전동 자전거 일수도 있어’ 라며 이상한 상상을 했단 비를 맞으며 약 2시간 쯤 자전거를 탔다 걸었다를 반복하자 드디어 안 보일것 같았던 정상에 도착 했다. 이 기분은 안가본 사람이면 모를것이다. 군대 1달 할래, 이화령 고개 다시 오를래 한다면 결정하기 힘들 것이다. 정상에 도착 해 주위를 둘러 보니 큰 돌에 이명박 친필 사인이 있었다. 돌에 박힌 사인을 보자마자 ‘이명박은 여기에 못왔을꺼야, 나처럼 고생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을 했다. 핸드폰을 꺼내 주변 사진을 찍어 보고 4대강 스탬프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잠시 쉬었다.


   충분히 쉬었다. 그리고 내려가기 위해 자전거 안장에 앉았다. 오르막 길은 2시간 걸렸는데 내리막 길은 15분 밖에 안 걸렸다. 울상 지으며 올라가던 내얼굴이 아무일 없었다는듯 바보처럼 웃으면서 내려갔다. 자전거를 타다보니 또 브레이크가 말썽 이었다. 그 일이 있고난 후 나의 모든 말초 신경 브레이크에 집중 되어 있었다. 그래서 마을이 나오자마자 들어 갔다. 마을 입구엔 작고 허름한 슈퍼가 있었다. 나는 음료수를 사면서 슈퍼 주인 할머니께 혹시 주변에 자전거 고치는곳이 있냐고 물어 보았다. 할머니는 잠시 기다리라는 말만 남기고 어디다가 전화를 했다.


  10분 정도 지나자 몽키 스페너를 건들건들 흔들면서 건달처럼 할아버지가 걸어 오셨다. 내 자전거를 손봐줄 분이었다. 조금은 2박 3일 아저씨가 생각 났으나, 호의를 거절 할 수 없어 감사 하다며 자전거의 문제점을 설명 하였다. 할아버지께서는 잠시 만지작거리더니 다행히 모르겠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핸드폰을 꺼내면서 다른분에게 전화를 거시려고 하셨다. 나는 일이 커질 까봐 괜찮다고 말씀을 드리고 다른곳 가서 수리를 맡긴 다고 했다. 그리고 인사를 드린 후 빠져 나왔다. 마을을 빠져나오면서 왠지 모르게 울컥 했다. 서울에서는 느낄수 없는 따듯한 감정들이 여기에는 많았다. 물론 자전거 수리에 대한 트라 우마는 있었지만, 무조건 돈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는 서울과는 달리 조금한 것이라도 신경 써주려는게  감동 이었다. 서울 사는 22살인 나에게 너무나 따듯했다. 다행히 10분정도 자전거를 타자 자전거 수리점에 들려 수리 받고 다시 출발 했다.


  밥도 먹고 브레이크도 수리 하고 든든했다. 기분이 좋아서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에 길을 잘못 들었다.한순간 방심하면 왜 이렇게 길을 잃는지, 다시 정신을 차려 보는데 4대강 펫말이 없이 주위에는 밭만 있었다. 길 잃은 떠돌이 강아지가 된 느낌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바로 4대강 콜 센터 에다가 전화를 하였지만 상담원과 통화를 하였는데 서로 의사소통이 안 된 상태에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한테 물어 가면서 운이 좋게 4대강 길에 다시 들어섰다. 조금은 돌아 왔지만 마음 만은 따듯 했다.


  특별히 둘째날은 산을 많이 탔다. 4대강 자전거를 타다 보면 알 테지만 서울에서 부산까지 길이 이어져있긴하다. 하지만 고속 도로를 통해서 달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길이 없으면 산 길로 다니고 강이 있는 곳에서는 강 길을 따라 다닌다. 4대강 펫말을 따라 가다보니 산길 입구가 나왔다. 누가 펫말을 잘못 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펫말을 믿기로 하고 산길을 올라갔다. 오늘만큼은 엄홍길 산악인 선생님이다. 어쩌면 엄홍길 선생님 보다 내가 더 대단 할지도 몰랐다. 엄홍길 선생님은 자전거를 끌고 산에 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페달을 밟기 위해 자신있게 엉덩이를 들었지만 5분이상 타지 못하고 자전거를 끌고 가기로 했다. 약 30분정도 자전거를 끌었을까, 가던 도중 큰돌이 하나보였는데 ‘무심사’ 라고 적혀 있다. ‘이런곳에 절이 있다니’ 생각하며 그냥 지나치려고 하는데 승복을 입은 분께서 멀리서 손짓을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밖에 없었다.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다가가자 나를 기다렸다는듯이 “밥먹고가” 라고 말씀 하신후 집안으로 들어가셨다.


  조금은 배가 고팠으나, 예의상 괜찮다고 말하면서 자전거를 어디다 세워야 하는지 둘러보는 나를 발견했다. 스님 은 문앞에 서서 나에게 숟가락 하나만 놓으면 된다며 부담갖지 말라고 하셨다. 신발을 벗고 절안에 있는 집으로 들어가자 수행하는걸로 보이는 외국인 한명과 한국인들4명 정도가 이미 둘러앉아 있었다. 나는 외국인 옆에 앉았다. 그리고 숟가락과 밥그릇을 받고 무슨 반찬부터 먹어야할지 생각했을 했다. 젓가락을 들려는 찰라, 나빼고 나머지 사람들은 불경을 외우기 시작했다. 젓가락을 들었던 오른손을 내려놓고, 옆에 있는 외국인 입모양을 보면서 대충 따라했다. 불경이 끝난후, 다들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왠지 모르게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은 급하게,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여줬다. 사실 22살인 나에겐 모르는 사람과 밥을 먹는다는 자체가 처음 이였다. 그래서 많이 어색하고 눈치를 많이 봤다. 사실 모르는 사람과 어떻게 밥을 함께 먹어야할지 잘 몰랐던것 같았다. 밥을 다먹고 난후 “잘먹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일어나면서 내 밥그릇과 숟가락 젓가락을 들고 싱크대에 갖다 놓았다. 내 밥그릇은 내가 설거지 하려고 하는데 싱크대 앞에 서있던 아주머니께서 괜찮다며 가보라고 했다. 한번더 여쭤 보았는데 웃으면서 괜찮다고 했다. 죄송한 마음에 그래도 무언가 해야할것같은 느낌이 들어서 밖에 있는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려고 하니까 스님께서는 한마디 하셨다.

“그런 마음이면 어디가서든 성공할수있습니다. 얼른 가던길 가세요”

계속 고집부리는것보단 가는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감사 하다는 인사를 드린 후 자전거 안장에 앉았다. 현재 2017년에, 무심사에서 밥을 먹은지 4년 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아직도 감사한 마음은 내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다. 나를 기억을 못하시겠지만 나는 죽을때 까지 감사한 마음을 기억할 것 같다. 바쁜 현대사회에서 나만 잘된다는 마음을 갖으면 안된다는 교훈 이었다.


  무심사에서 출발해 산을 넘어 큰 마을에 도착했다. 그날 만큼은 편하게 자고 싶었다. 그래서 시장 중간에 있는 모텔에 들어갔다. 방안에 자전거를 들여 놓고 자전거 뒷바퀴와 침대 를 같이 묶었다. 모텔에는 욕조가 있었다. 따듯한 물에 몸을 담구고 싶어서 따듯한 물을 잠시 틀어놓고 편의점에 얼른 갔다 왔다. 그 사이에 욕조에 물이 가득 찼다. 옷을 벗고 신나는 마음에 물속에 풍덩 들어갔다. 하지만 “으악” 하는 소리와 함께 욕조에서 뛰쳐나왔다. 알고보니까 팔 다리가 너무 심하게 타서 따듯한 물에 닿으면 엄청 따가 웠다. 욕조받은 물은 물거품이되었고, 가장 싫어하는 차가운물로 샤워를 해야했다. 샤워를 끝낸후 밖으로 나와 대충 밥을먹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혼자 자는것은 무서웠고 티비를 켜고 다시 잠을 청했다.


  세번째 날 아침 일찍일어나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자전거를 탔다. 사건은 마을에서 점심 먹고 마을을 빠져 나오는길에 발생했다. 항상 출발할때 난 골반에 찬 가방에 1L물을 3개 끼워 놓고 자전거 가방에는 2L 페트병을 항상 넣고 다닌다. 마을에서 밥을 먹고 4대강 자전거 길로 가기위해서는 오르막길 터널을 지나가던 순간 이었다. 엉덩이를 들고 오르막 길에 오르던순간, 골반에 꽂혀있던 물병 3개 중에 1개가 빠지더니 또르르 내려갔다. 물병에 물이 가득차 있어서 내려가는 속도가 빨랐다. 자전거를 갓길에 세워놓고 물병을 가지러 밑을 봤는데, 자전거 동호회 사람들로 보이는 10명 정도가 올라오고있었다. 불길한 예감은 여기서 빗나가지 않았다. 빠른속도로 내려오던 물병을 피하지 못하고 자전거 동호회 한명이 물병을 밟고는 넘어졌다. 단지 몇초안에 이일이 발생 한것이다. 바로 뛰어내려가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동호회 분들은 자전거를 바꾼지 얼마 되지도않았는데 이런일이 다 있냐고 하시면서, 20만원정도 손해배상 청구를 해야한다며 나를 몰아세웠다. 동호회 중 한분은 나에게 몇살이냐고 물었다. 나는 22살 이고 전역해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종주한다고 말씀드렸다. 말씀없이 나를 계속 쳐다보더니 가라고 하신다. 나는 떠나지 않고 계속 고개 숙였다. 그중 대장으로 보이는 분이 손짓으로 가라고 한다. 그리고 말했다.
“허리에 꽂혀있는 물은 빼”
“네..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왠만하면 허리에 물 꽂고 다니지 말고, 가방에 넣고 다녀”
“아..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물통을 바로 백팩에 놓고 자전거에 올라 탔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불편한 마음을 갖고 천천히 달렸다.


   그 일이 있고난후, 3시간이 지났다. 자전거를 타다 우연히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보았는데 몰골이 말도 아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들에게 구걸한다면 100% 몇 십만원을 모을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씻고 샤워한다고 해도 얼굴은 뻘겋게 달아올랐고 티셔츠 2장을 번갈아 입었으나 땀냄새도 약간 나는듯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배가고파 마을로 들어 갔고 허름해 보이는 식당을 찾았다. 체인점 음식도 많이 있었지만 지역의 특색있는 음식을 먹고싶었다. 역시나 들어 오자마자 난 핸드폰 충전을 하고 큰지도를 펴 보이며 다음 목적지 까지 거리를 쟀다. 오늘은 멀리 안가고 주변 숙소에서 자기로 했다. 거기를 재고 있는 나에게, 주인은 내가 주문한 제육볶음이 다 떨어졌다며 자기가 점심에 먹으려고 끓여 놓은 음식을 먹어도 괜찮냐고 물어 봤다. 괜찮다고 한 후 음식을 먹어보는데 일반 음식점에서 느낄수없는 어머니의 손맛이 느껴졌다. 다 먹고난 후 속도 편안했다. 감사하다고 말씀 드린 후 1시간 정도 자전거를 더타고 모텔에서 잤다. 자전거를 오래탈 기분이 아니었다.


   자고 일어나 부지런히 자전거를 끌었다. 점점 가다보니 목적지에 거의 다 왔다. 어딜 가든지 사람들은 부산 사투리를 썻다. 앞에 70KM 남았다는 펫말이 보였다. 점점 펫말 숫자가 작아질수록 느낌상 더 힘든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떨구고 잠시 숫자를 신경 안 썼다. 그리고 2시간 3시간 달리다 보니 희미하게 저 멀리 하구둑이 보였다. 가면 갈수록 사람들도 많아졌고 차들도 많았다. 날씨는 포근했고 하두국에는 사람들이 산책을 나온듯이 편안한 복장으로 길을 걷고 있었다. 참 보기 좋았다. 하두국 끝 쪽으로 다 달으자 자전거 복을 입은 사람들 무리들이 보였다. 그쪽으로 다가가 마지막으로 스탬프를 찍고 나니 자전거여행이 끝났다는게 잠시 허무해 지면서 후련한 마음이 들었다.


   스탬프 찍는 곳 옆엔 낙동강 하두국 이라고 적혀있는 돌이 있었다. 남자 한분께 돌 옆에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틱 한후 하구둑에 있는 4대강 종주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서울에서 부산까지찍었던 스탬프를 보여주었다. 직원은 각 지역이 갖고 있는 특유의 스티커를 주면서 이번달 안에 4대강 메달이 집에 도착한다고 했다. 주소를 적고 간단히 점심을먹고 고속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부산에서 샤워하고 버스를 타려고 했으나, 집에 가고 쉬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땀 냄새도 약간 났지만 집이 더 간절했다. 냄새 때문에 옆 사람이 없기를 희망하며 자전거를 싣고, 버스에 올랐다. 불행하게도 옆사람이 앉았고 앉자마자 옆사람이 창문을 열었다. 죄송하다고 말도 못하고 자면서 서울까지 올라갔다.


  고속버스에서 노래를 들으니 지난 일들에 대해서 생각에 잠겼댜. 3박4일동안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갔고 하루하루 평범한 날이 없었다. 브레이크가 망가지거나 물병이 떨어져 다른사람에게 해를 입혔고, 무리해서 타다보니까 무릎이 아파 파스를 붙이고 달리기도 했다. 자전거 여행 출발 하기 전에는,  나는 못한다고 생각을 했고 당연히  할수없었다고 여겼다. 또한 자전거가 망가졌을때 두려움에 떠는 나의 모습을 보았고 한편으로는 모텔에서 혼자 자기가 무서워 티비를 켜고자는 나의 모습도 보았다. 나는 약한 사람이었고 세상에 눈을뜨지 못한 아기새 같은 존재 였다. 친구들이랑 어울리기를 좋아했고, 혼자있기 싫어했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모습을 잘 보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자전거 여행을 통해 나의 진정한 모습을 보았다. 매번 사건사고가 일어날때마다 하나하나씩 극복해 가는 모습을 보았고 또한 참을성도 있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세상엔 따듯한 사람이 많았고 한편으로는 사람들은 여유로 웠고 너그러웠다.


  자전거 여행을 한지 4년이 지났다.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나를 도와준 분들의 호의를 잊고 살고 있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한다. 혹은 나도 도움을 받은 만큼 베풀어야 할 생각을 한다. 하지만 바쁘더라도 마음의 여유와 너그러움은 갖고 살 것이라 다짐한다.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있다.


“왜 쓸대없이 사서 고생을 하세요?” 그땐 대답을 “젊었을때 고생 해야죠” 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고인 물이 되기 싫습니다”. 그말은 고인 물은 썩는다. 하지만 물이 순환을 한다면 물이 고이지 않고 깨끗해 진다. 풀어서 말하자면 찌들지 말고 항상 맑게 살자는 이야기다. 부산에서 집에 도착해 보니 저녘 10시쯤 됬다. 집에서 씻고 누웠다. 내일은 자전거 안타도 된다는 마음에 은근히 기뻤다. 1주일이 지난후, 1~2년 동안 자전거를 보지 않았을것 같았지만 다시 자전거를 꺼내 한강으로 나갔다.

 

마지막으로 나의 다리에 남겨진것은 커피색 반 스타킹 이었다.



 - 정주호 2017.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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