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원의 유서 - 43화 -
2021년 03월 20일 02:03
얼마 전 카카오톡 채팅창을 내려 보다가 친구의 사라진 프로필 사진을 발견하고는 무슨 일이 있냐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랬더니 “눈치 빠르네 여자 친구랑 헤어졌어.”라며 답장이 왔다. 5~6년 동안 길게도 만났다는데 나 같은 솔로는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힘들지 가늠조차 할 수 없어서 휴무일에 꼭 같이 바람 쐬러 가자고 약속을 했었다. 그 날이 그녀에게 꽃을 선물한 날이다. 그녀는 어차피 오후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야 했기에 친구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충분했다. 마스크를 싸매고 백화점 구경도 하고 바닷가 근처 커피숍에서 커피도 한 잔 했다. 그러다 친구 녀석이 하는 말이 “너도 자동차가 있다고 해서 자동차로만 모든 것을 하려고 하지 말고 여자 친구와 많이 걸어. 나는 그게 후회가 돼. 그리고 넌 연애를 좀 많이 해봐야 해 그래야 어떤 여자가 좋은 여자인지 알 수 있는 안목이 생겨. 연애는 나이가 많다고 성숙해지는 게 아니야. 많이 해봐야만 성숙해질 수 있는 거야.” 말주변이 없는 친군데 이별 직후라서 그런지 얼마나 와 닿았는지 모른다. 그날 제법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쓸데없이 한 여자에게서 헤어 나오지 못한 거구나.’ 맞다. 그녀는 어려운 여자다. 아니, 가질 수 없는 여자다. 가끔 연락이 먼저 오더라도 절대 쟁취할 수 없기 때문인데 조금씩 밀어줘야만 연락이 유지되고 꽃을 준 날처럼 당겨 버리면 즉시 차가운 사람이 되어 버린다. 하도 많이 당하다 보니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됐다. 모든 말이 거짓말인데 넘어가지 않으면 “오 이것 봐라.”라는 생각으로 나를 꼬셔대고 내가 넘어가서 당기려고 들면 완전 다른 사람이 돼 버린다. 진짜 뼛속까지 나쁜 여자인 거다. 그래서 이번에는 애초에 연락을 하지 말아 달라고 말했었는데 “오 이것 봐라.”라며 그 말을 무시하고 또 연락이 왔을 때 미리 다짐했었다. ‘이번에도 내가 속는다면 넌 더 이상 좋은 추억이 될 수 없을뿐더러 어느 정도는 증오할 것이며 모든 연락 수단에 '숨김'이 아니라 '차단'해줄게 그리고 이제는 진절머리가 나니까 다른 여자를 만날 거야.’라고 말이다. 소위 말하는 ‘어장관리’는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도 그 패턴은 바뀌지 않는다. 즉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애초에 심심해서 가지고 놀고픈 장난감에 불과하지 않았던 거다. 저서에도 그녀의 내용이 많이 수록되어 있지만 이미 인쇄가 끝났고 돌이킬 수가 없다. 그러나 아, 이제는 진짜 딱 싫어졌다. 이별한 친구 녀석을 위로하겠다는 이야기에서 왜 이런 이야기가 흘러나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날 오히려 내가 위로받고 말았다. 원래 위로라는 것은 위로받고 싶은 욕망이 클수록 타인에게 더 큰 위로를 줄 수 있다. 갑자기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그 친구 마음에서 우러난 말들에 감명을 많이 받았었다. 다음 휴무일이 오면 친구를 한 번 더 만나서 바다로 가서 밤새도록 낚시를 해볼 계획이다.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어릴 적 추억도 되새기고 친구 마음도 내 마음도 풀어보고 싶다. 만남이 있으면 언젠가 이별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사람을 내 마음속에 담아내는 것은 노력만으로 가능하지만 비워내는 것은 노력만으로는 역부족이다. 더 힘들고 오래 걸릴뿐더러 가능한 다른 사람을 담아낼 때 조금 더 빨리 비워낼 수 있다. 나도 그렇고 친구도 그렇겠지. 오늘 점심을 먹으며 어머니께 “어머니 왜 조물주는 암컷과 수컷을 나누어 놓았을까요? 효모처럼 혼자 번식할 수 도 있을 텐데요.”라고 물었더니 현명하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밥 먹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샀노? 밥을 먹어라 밥을 나불대지 말고.” 밥을 마저 먹으며 생각했다. ‘맞다. 말이 안 될 수도 있겠구나. 밥을 맛있게 먹어야겠구나.’ 아무튼 오늘 ‘배달원의 유서’의 마무리를 제법 유머러스하게 해보고 싶었는데 어땠을지 모르겠다. 내일은 주말이고 모레도 주말이고 나는 일을 해야 하고 월요일이 와도 일을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터득한 것은 사람에게 얽매이면 에너지 낭비가 많아지고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는 거다. 꼭 기억할 수 있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