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리뷰
가끔 엘리베이터를 타다 보면 말을 건네는 사람들이 있다. 출퇴근 길을 제외하면 대개 옷을 편하게 입기 때문에, 처음 마주친 분들은 나를 대학생쯤으로 여기시고 ‘학생’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며 반말로 인사를 건넨다. 지금이야 그냥 ‘네’ 하고 대답했겠지만, 처음 발령을 받았을 때만 하더라도 직장인이라는 걸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컸던 것 같다. ‘학생이야?’라는 물음에 굳이 ‘교사입니다.’라고 답하면, 깜짝 놀라 당황한 채 사과를 건네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그럴 때면 왠지 사회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구성원으로서 당당히 인정받은 것만 같은, 다소 유치한 만족감이 들기도 했다.
아마도 사회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대면하게 되는 직업은 교사일 것이다. 의무 교육을 시행하는 사회 안에서 모든 구성원들은 필연적으로 학생의 신분을 거쳐가게 된다. 모두는 저마다 유년 시절의 기억에 교사가 자리하게 되고, 기억에 대한 호오와는 별개로 교사라는 직업은 어른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렇기에 처음 대면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생‘님’이라는 호칭과 함께 언어에 예의를 담게 되며, 조부모 뻘 세대에게 그러한 인사를 받을 때면 왠지 모를 기시감과 함께 겸연쩍은 느낌이 일기도 한다.
학생의 신분을 벗어나 교사가 되고, 여러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면서 ‘나’라는 존재에 대한 시선이 달라지는 현상에 대해 의문이 인 적이 있었다. 나라는 존재 자체는 그대로이지만, 개인을 규정하는 사회적 특질이 개인에 대한 시선을 조정하고, 이는 곧이어 개인의 정체성이 된다. 켜켜이 쌓인 타인의 시선들이 나를 만든다는 사실은, 개인의 정체성이 기반한 토양이 얼마나 나약하고 위태로운가를 생각해 보게끔 한다.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이러한 시선과 존재의 역학관계를 잘 드러내는 영화다. 2부로 구성된 영화는 같은 사건 내에서 인물의 다른 행동을 대비한다. 영화감독 함춘수는 여행지에서 희정을 만난다. 1부에서 함춘수는 희정이 원하는 대답만을 건넨다. 희정은 그러한 춘수에게 끌리지만, 술자리에서 춘수의 다른 면들이 드러나자 실망하게 된다. 2부에서 함춘수는 솔직하다. 때론 가감 없는 표현으로 희정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지만, 결국 희정은 춘수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그가 감독한 영화를 감상한다.
표면적으로 영화는 가식에 대한 조소와 더불어 솔직함의 미덕을 설파하는 듯하다. 희정은 가식적이었던 1부의 춘수와 멀어졌지만, 2부의 춘수에게는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1부에서 술자리 전까지만 하더라도, 희정은 세심한 춘수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 만약 1부에서 술자리가 없었더라면, 혹은 춘수가 끝까지 일관된 태도를 유지했더라면 희정은 춘수를 계속 좋아하지 않았을까.
1부와 2부의 함춘수는 동일 인물이다. 같은 배우(정재영)가 연기하는 인물은, 두 세계에서 희정이 받아들이는 모습에 의해 서로 다른 결말에 다다른다. 과연 1부와 2부의 춘수는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독립적인 존재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두 세계에서의 춘수의 행동은, 모두 춘수 본연의 모습일 것이다. 타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을 가식이라 칭하며 거짓으로 여기지만, 그 가식마저 어쩌면 인간의 욕구를 드러내는 진실된 모습의 소산일 것이다.(라캉은 거짓말을 하는 행위를 두고, 도리어 인간이 품은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라 칭하지 않았는가.) 두 세계의 춘수는 전부 춘수 그 자체일 따름이다. 하나의 인물을 2부로 나누어 다른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희정(김민희)의 시선이다. 즉, 이 영화에서 ‘지금’과 ‘그때’를 가르는 기준은 감독도, 춘수도, 그리고 관객도 아닌 ‘희정’이다. 존재의 관찰자로서 희정의 시선은 인간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타인의 지위를 갖는다.
인간은 단일한 존재적 성격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폭력성과 의로움, 이성과 욕정 모두를 지닌 인간은 하나의 잣대로 규정할 수 없는 복합적 산물이다. 공동체 내에서 드러나는 개인의 특질은 한정적이고, 그러한 소수의 정보를 습득한 타인의 시선을 통해 개인의 정체성이 형성된다. 교사라는 직업을 밝히면 나에 대한 상대방의 태도가 많이 유해지는 것을 느끼곤 한다. 이는 개인에게 부여된 시선이 개인을 파악하는 데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 수 있는 현상이다. 직업과 인상, 말투와 몇몇 행동은 내 안에 존재하는 복합적인 선악의 실타래를 단순한 선 몇 개로 정리하여 전시한다. 그렇게 나의 정체성이 형성되고, 이는 신용 점수처럼 나라는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홍상수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삶의 진실을 묻는 질문에 ‘있는 그대로를 보고자 한다.’라는 답변을 제시했다. 인간의 내면적 층위의 복잡성은, 그 자신조차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몇몇 기준으로 재단된 개인의 정체성은 시선이 교차하는 과정에서 변용과 훼손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그는 그저 자신의 눈과 순간의 감각에만 의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판단과 편견을 최소화한 채, 얽힌 실타래에서 삐져나온 한 올 한 올 자체에만 몰두하고자 하는 그의 태도는 오히려 존재 자체가 아닌, 존재의 순간으로 시선의 범위를 한정한다. 감독은 영화 속 희정과 춘수를 그저 따라가며 바라본다. 철저히 관찰자로 존재하는 감독의 세계에서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그때이며 또한 지금이기도 하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사회적 정체성은 타인의 시선에 달려있다는 점에서, 삶의 주체성이 빼앗긴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형성된 정체성이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는 데에는 한계를 지닌다. 그렇기에 정체성을 실존과 동일시하는 자는 삶의 어느 순간에 이르러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한 점에서 삶의 여로는 결국 시선의 더깨 안에 자리한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과정이며, 예술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가만히 바라보는 거울 속에는 나의 시선이 있고, 문이 열리면 누군가의 시선이 또한 나를 비춘다. 그렇게 매일매일 나라는 존재가 파도 앞 모래성처럼 만들어지고 부서지기를 반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