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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현석 Feb 23. 2024

질문을 건네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리뷰

너는 왜 살아?


어렸을 때 숱하게 들어보았을 질문이다. 대개 처음에는 피식 웃으며 가볍게 흘려보내거나 ‘그러는 넌?’ 하고 반문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답변은 ‘그냥’이다. ‘그’에서 ‘냥’으로 넘어갈 때 목소리 톤이 낮아지는. 그러면 질문자 역시 헛웃음과 함께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질문은 짝을 찾지 못한 채 휘발된다.


그런데, 만약 질문자가 정색하며 연거푸 저 질문을 꺼낸다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아마도, 우선 웃음기를 거둘 것이다. 가벼운 분노와 함께 당신은, 당황한 채 말끝이 흐려질 것이다. 저 질문의 요지는 무엇인가. 상대방의 화를 북돋우기 위한 것인가, 혹은 숨은 의도가 없는, 순수한 질문 본연의 역할인가. 전자라면, 화는 일지언정 안도감이 자리한다. 의미를 파악했으니, 이제 응수할 방안을 강구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후자다. 악의 없는 삶의 이유에 대한 질문은 답변자로 하여금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을 심는다. 당신은 점차 공포를 느낄 것이다. 공포는 무지에서 촉발하기 마련이므로.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1996)는 위의 질문을 던진다. 주인공인 화자는 고객들을 찾는다. 삶을 통찰한, 혹은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화자는 질문을 건넨다. 당신은 왜 살아가나요. 고객들은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은 화자의 질문이, 단순히 분노를 유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고객들이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들은 이미 존재의 이유가 무지의 영역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질문의 요지를 파악한다. 그리고 그 의문은 그들 또한 오래 품고 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화자를 찾아온 것이다. 화자는 그들에게 하나의 해답을 제시한다.

그는 죽음을 권한다. 다크초콜릿처럼, 끝에 달콤함을 머금은 제안을 고객들은 응한다. 그렇게 그들은 질문을 완성하고, 그는 멀리 여행을 떠난다.


삶의 근원을 거슬러 내려가면, 그 끝에는 우연이 자리함을 깨닫게 된다. 출산은 선택이지만, 출생은 선택이 아니다. 우리는 삶의 출발점에서부터 주체성을 상실했다. 이는 시간이 흘러도 마찬가지이다. 가정, 학교, 직장, 사회, 종교와 법, 타인. 삶의 주체성은 채권처럼 여기저기로 팔려나간다. 눈이 멀어버린 채로 흐름 속에 유영하다 문득 돌아보면 깨져버린 거울 조각들 각각에 자신의 모습이 있다. 조각을 집어 든 자들이 외친다. 너는 도망갈 수 없단 말이야! 나이지만 나의 것이 아닌 삶. 이 부조리극에 질문이 틈입한다. 공포는 무지에서 촉발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두려움은 무력감에서 탄생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의 상태. 소설에서 화자의 제안이 달콤한 이유는, 그 무력감을 해소할 방안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삶에서 한없이 무력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은, 자기 파괴로의 비상이다.


당신은 삶의 이유에 관한 질문을 맞닥뜨린다. 답을 찾지 못한 당신에게, 소설 속 화자는 죽음을 권한다. 이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니다. 답변을 찾지 못한 채 무력감을 느끼는 당신에게 건네는, 질문 자체를 소거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화자의 이 제안은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변을 창조해낸다. 삶의 이유의 반대편에 죽음이 있다면, 삶의 이유에는 죽지 않음이 자리한다. 죽음의 목전에서, 당신은 선택권을 갖는다. 출생과 달리, 죽음은 선택이다. 죽음이 선택이라면, 죽지 않음 역시 선택일 것이다. 그리고 죽지 않음이라는 선택은 당신이 지금껏 해온 것이다. 당신의 삶이 그것을 증명한다. 당신은, 삶의 가장 근원적인 주체성을 이미 확보하고 있었다. 그간 ‘죽지 않음’을 선택함으로써 말이다.


삶의 이유는 해소되었다. 무수한 ‘죽지 않음’의 선택은 지금의 삶으로 당신을 이끌었고, 이유에 대한 인지는 무지의 베일을 걷고 공포를 휘발시킨다. 정연한 답변 앞에, 그러나 새로운 질문이 이어진다.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 삶의 이유만큼의 공포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이 질문은, 하지만 곧바로 답하기 머뭇거려진다. 최초의 질문이 과거의 근원을 묻는다면, 이 질문은 발 앞에 놓인 미래의 길을 묻는다.


아마 당신은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설사 나름의 답변을 내놓았더라도, 그러한 답이 의문을 완전히 상쇄시키기엔 어딘가 부족하다. 이 질문에 대해 당신은 평생을 고민하고 되새기며 답을 찾아가게 된다. 어떤 때에는 답을 찾았다 여기더라도, 또 어떤 때에는 혼란스러움에 젖기도 할 것이다. 이 질문은 삶의 순간마다 당신을 찾아갈 것이다. 당신은 끊임없이 답을 찾아갈 것이며, 그렇게 살아가는 삶을 우리는 인생이라고 부른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1996)>, 김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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