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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현석 Mar 20. 2024

이민자와 여행자

<패스트 라이브즈(2024)> 리뷰 및 생각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2024)> 내용이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눈코 뜰 새 없이 몰아쳤던 평일이 지나고 찾아온 주말의 평화는, 기나긴 항해 끝에 발 디딘 땅에서 느낄 법한 가벼운 멀미를 동반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틀어놓은 LP에 정신을 맡기며 유영하던 도중 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초봄의 햇살이 마음을 움직여 자연스레 밖에 나갈 채비를 했다. 그런데, 어디를 가야 하나? 쉬는 시간이 되면 공을 든 아이들이 자연스레 운동장을 찾듯, 나는 휴대폰으로 지도를 켠 후 카페와 영화관을 검색했다. 집 근처 CGV의 영화 상영표를 보던 중, 천만이 임박한 <파묘>와 빌뇌브 감독의 <듄:2> 사이에 있는 한 영화 제목을 발견하고서는 망설임 없이 예매를 했다. 예고편조차 보지 않은, 단순히 SNS 상의 홍보 글귀만 확인한 영화였지만, 이 영화는 왠지 내 취향에 잘 맞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한 판단이었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기억과 인연에 대해 다룬다. 첫사랑의 기억으로 얽힌 이민자와 여행자는 십수 년의 이별 끝에 가상의 공간(페이스북)에서, 그리고 현실의 공간(뉴욕)에서 재회한다. 그 시간 동안 이민자는 자국이 된 타국에서 새로운 가정을 꾸렸고, 여행자 역시 자국에서 현실의 안정을 도모했다. 어디론가 멀리 떠나는 존재라는 점에서, 두 사람은 서로 닮은 구석이 있다. 떠남의 행위가 같기에, 여행자는 회귀에 대한 일말의 미련을 품는다. 여행의 완성은 현실로의 복귀이기에.


그러나, 이민자에게는 떠남이 있을 뿐이다. 같은 출발점을 공유하였지만, 여행자와 달리 이민자에게 있어 돌아갈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행자의 항로가 U자형을 이룬다면, 이민자의 항로는 직선을 띤다. 낯선 도시에서 만난 둘은 그리웠던 유년기의 출발지를 공유한다. 그러나, 그들이 공유한 기억은 현실로 이어지지 않는다. 과거 어딘가에서 유실된 기억의 매듭은 길을 잃은 채 그저 떠돌 뿐이다. 이민자의 티켓이 편도인 것을 알아챈 여행자는 자신의 왕복 티켓에 적힌 날짜를 인지한다. 여행은 영원할 수 없기에, 여행자는 택시를 타고 여행을 완성하러 공항으로 향하며, 이민자는 눈물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인간의 삶은 기억으로 구성된다. 과거가 된 찰나에서 각색되고 편집되어 탄생한 기억은 얼굴의 주름처럼 겹겹이 층위를 이루며 삶을 현재로 밀어낸다. 그러나, 뒤돌면 펼쳐져 있는 과거로 우리는 돌아갈 수 없다. 눈앞의 현실은 시시각각 나를 통과하며, 엔트로피의 법칙에 의해 우리는 점차 무질서해진다. 기억과 근원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인생은 흔히 비유하는 여행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이민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회귀 없는 떠남 끝에, 결국 우리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는다. 닿을 듯 생생하면서도 너무나 먼 기억은, 그렇기에 더욱 아련하고 또한 미련을 남긴다.


영화관을 나서니 오후 5시. 노을 진 하늘을 보랏빛으로 물들었고, 거리엔 주말의 여유와 봄의 나른함을 만끽하는 느릿한 발걸음들이 이어진다. 일렁이는 바닷가와 나풀거리는 초목의 이파리들이 한데 모여 짐짓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점차 사그라든 멀미는 어느새 휴식을 자연스레 온몸으로 받아들이게끔 한다. 거리를 터벅터벅 걸어가며 귀에 에어팟을 꽂고 영화의 OST를 재생시킨다. 서정적인 음악이 흘러나오고, 나는 왠지 어디론가 멀리 떠난 것만 같은 기분에 젖는다. 이 순간도 결국엔 기억이 되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겠지. 이민자로 살아가는 삶에서 나는 과연 어디를 향해 가는가. 선선한 바람이 길가에 서서히 내려앉는다.


<PAST LIVES>(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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