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2024)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호수와 산으로 에워쌓인 한적한 시골 마을, 글램핑장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마을을 찾은 회사 측 인물들과 마을 주민들은 마찰을 빚는다. 요지는 정화수 설치 장소와 관리인의 상주 시간에 따른 마을 훼손 문제. 더불어 주민들은 보조금을 목적에 둔 채 급하게 일을 처리하려 하는 회사에 강한 반감을 가진다. 여기저기서 고성이 일고, 주민들을 설득하려 내려온 말단 직원인 둘은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그때, 본인을 개척이주 3세대라 소개하는 한 남자가 일어나 말한다. 마을 주민 역시 전쟁 후 농지 개척을 위해 들어온 이주민이며,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입장이라고.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균형이라고. 상류의 오염은 하류에도 필연적인 영향을 미치므로, 상류의 존재들은 그에 대한 책임의 의무가 있다는 마을 회장의 말은 힘을 싣는다. 곳곳에서 박수가 이어지고, 회사 직원들은 그들을 어느 정도 납득한 채 왔던 길을 돌아간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2024)의 제목은, 타쿠미(오미카 히토시)의 발언과 맥이 닿는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얽히고설키며 갈등과 마찰을 빚는다. 모두의 만족으로 귀결되는 결말은 공허한 이상주의에 지나지 않기에, 사람들은 적당히 타협하고 협력하며 중간지대를 찾는다. 이를 우리는 현실적이라 논한다. 그렇다면,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납득한 양측은 협의를 통해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 내지 않을까. 천진난만한 이상주의를 거둔 채, 냉철하고 현실적인 대화를 이어갈 테니 말이다.
영화의 결말은, 그러나 우리의 기대를 보기 좋게 배반한다. 회사는 이미 시작된 프로젝트의 진행을 무를 생각이 없으며, 도리어 지역 주민인 타쿠미를 사업에 이용하려 한다. 말단 직원 둘은 타쿠미를 설득하러 다시 마을로 향하고, 와중에 타쿠미의 딸이 실종된다. 한참을 찾아 헤매던 딸은, 치명상을 입은 사슴과 마주 보고 서 있으며, 타쿠미는 직원인 타카하시(코사카 류지)의 목을 졸라 쓰러뜨린 뒤, 딸을 안고 숲속 너머로 사라진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단 직원들은 저마다 복합적인 사정이 있었으며, 마을 주민들에 대한 공감과 더불어 유대감을 느끼기에 이른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 도우며 공생하고, 아이들은 학교에서 즐거운 하루를 보낸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악은 너무나 뚜렷한 흔적들을 곳곳에 남긴다. 마유즈미(시부타니 아야카)는 손을 베고, 타카하시는 목이 졸린다. 타쿠미는 아내에 이어 딸인 하나(니시카와 료) 또한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며, 마을은 자본의 손에 넘어갈 위기에 처한다. 상처들이 도처에 부유하고, 도망칠 곳이 없는 사슴들은 비로소 인간을 공격한다. 그러한 점에서, 균형의 가치를 논하는 타쿠미는 철저하게 이상주의자다. 균형은 없다.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그들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세상의 문법이 존재하며, 고통은 필연적으로 그들 사이를 파고든다. 악은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의 현상이며, 흐름이자 파동이다. 그것들은 존재하는 자연과 인간에 흔적을 새기고, 고통으로 내몬다. 그들은 숲으로 도망치지만, 숲의 곳곳에는 죽은 시체들이 즐비한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냉철하다. 그는 타협과 균형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같은 상처를 공유하는 사슴과 하나는, 보이지 않는 병균으로 인해 서로의 몸이 닿을 수 없다. 악은 존재의 사이를 흐르며, 존재는 부재하는 악을 증명한다.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고통의 원인을 찾는 우리의 노력이 헛됨을 시사한다. 참극의 원인은 회사에게도, 마을 주민에게도, 자연에도 있지 않다. 영화는 탁류 앞에 놓인 사람들에게 질문을 건넨다. 과연, 상류는 어디이고 하류는 또 어디인가.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어디에 속하는가. 아니, 애초에 물이 오염되지 않은 적이 있던가.
숲으로 사라진 부녀는 필사적으로 달린다. 어디쯤에 와 있는 지도 모른 채로, 그들은 고통으로 가득한 악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이는 그것이 이상주의자인 타쿠미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이다. 균형의 불가능함을 깨달은 그는 치명상을 입은 사슴이다. 도망칠 곳 없는 사슴은 인간을 공격하고, 목적지 없는 탈출을 감행한다. 카메라는 그런 타쿠미와 더불어, 또 다른 상처 입은 사슴을 향한다. 손바닥을 다친 마유즈미는 붕대로 감긴 손과 함께 하나의 실종을 알리는 안내 방송을 들으며 지는 노을을 바라본다. 고통 속에 살며 일부러 그 안에 속하고자 했던 그녀는,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에서 삶의 방법을 질문하는 자다. 그녀는 악이 실재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악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는 떠나지 않는다. 상처 난 손바닥은 흉이 질지언정 결국 치유될 것임을 알기에, 고통 속에서도 삶을 응시하는 그녀는 진정한 현실주의자다. 삶은 그녀가 응시하는 노을처럼 지고 난 후 다시 아침 해가 되어 떠오를 것이다. 시간과 계절은 반복을 거듭하고, 악은 여전히 흐르며 우리의 상처는 진해지고 옅어지기를 반복할 것이다.